전주시가도(全州市街圖)
전주시가도(全州市街圖)
  • 임종권 작
  • 승인 2018.03.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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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1 (70년대 봄 전주시 한옥주택가)

안개낀 이른 아침. 허름한 한옥. 가야금 소리와 이따금 기침 소리가 흘러 나온다.

-타이틀-
#씬2 (아침 수돗가)

이른 시간부터 셋방사람들로 붐빈다.

#씬3 (맨 끝방 마루)

잠에서 들깬 표정, 긴 하품을 하며 마루에 앉아 있는 성만. 이 때 부엌에서 밥상을들고 어머니가 나오며 늦장부리고 있는 성만을 바라보고

어머니=학교 늦겠다. 빨리 세수하거라.
(성만이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수돗가로 간다)

#씬4 (다시 수돗가)

하나 밖에 없는 수돗가에 세면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된다. 양치질하며 차례를 기다리던 집에서 할일 없이 놀고 있는 서울사람 이씨가 짜증을 낸다.

이씨=이거 원, 아침마다 세수좀 할려면 난리 법석을 떨어야 하니, 제기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옆방 버스운전기사 김씨가 얼굴에 비누칠하다 말고 이씨 말을 받는다)

김씨=집주인은 대체 뭐하는거여? 이 집에 사는 셋집이 몇인디, 수도꼭지가 하나가 뭐여. 허구헌날 말혀도 소귀에 경읽기네 그려.

김씨부인=(세수대야에 물을 담아 남편에게 주며) 이게 다 집없는 사람들 설움인께 이씨도 마냥 놀고만 있지 말고 얼른 얼른 돈벌어 단칸방이라도 내집 챙겨 나가야지.

미스 홍=(물통을 수도꼭지에 갖다대며 볼맨 소리로) 한섭이 엄마는 뭣땀시 아침부터 우리 밖같 양반을 또 들먹거린다요?

김씨부인=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빈둥빈둥 놀기만헌께 한번 해본 소리여.

미스 홍=아이구, 남말 하지 말고 다 큰 자식새끼둔 한섭이네나 걱정하슈.

김씨부인=(이씨네 물통을 한쪽으로 밀쳐내며) 마누라한테 기대사는 사내가 뭐가 이쁘다고 그렇게 핏대를 올린디야?

미스 홍=(다소 흥분된 목소리) 지허고 감정있다요? 무신 말을 고렇게 기분 나쁘게 한다요?

김씨부인=(눈을 흘기며) 이 여편네는 말만허면 역정내네 그려. 아니, 내가 없는 말혔어? 젊은 것이 어디다 대고 ...

미스 홍=(벌떡 일어서서 소매를 걷어부치며) 이년이 사람을 뭘로 보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김씨부인=새파랗게 젊은 것이 누구한테 누구한테 함부러 대들려고 혀?

이씨=(수건으로 얼굴을 닦다 말고) 아침부터 왜들 그래? 당신 어서 들어가.

(잔뜩 화가 치민 이씨부인. 더 이상 분을 못참겠다는 듯 남편 손을 뿌리치고 물통을 김씨부인 한테 쏟아 붓는다. 물을 뒤집어쓴 김씨부인. 미스 홍 머리카락을 움켜잡는다. 이내 서로 엉켜 수돗가에 나뒹굴고. 순식간에 싸움 소리 듣고 수돗가로 몰려든 셋방 사람들. 아수라 장이 된 수돗가 아침)

#씬5 (옆집 담)

얼굴을 담위로 내밀고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옆집 아낙네들.

아낙네 1=저 집 사람들은 아침만 되면 왜 저렇게 쌈박질 한디야?

아낙네 2=다들 먹고 살기 힘등께 그라제.

아낙네 3=(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무신 좋은 구경거리라고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는거여?. 그만 보고 어여 자기 할 일들이나 혀!

#씬6 (다시 수돗가)

간신히 두사람을 떼어놓은 이씨와 김씨. 옷이 찢겨져 맨살이 드러난 두사람. 각기 남편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악을 쓴다.

집주인=(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을 내쫒으며) 여기서 뭣들 하는거여!  어서 학교가야지. 이 놈의 종자들은 쌈박질 못혀 환장했나. 허구헌날 눈만 뜨면 쌈박질이네.

(이내 조용해 진 수돗가)-이상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새벽 먼동이 뜰 무렵이면  나는 언제나 담너머 옆 집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와 힘없는 기침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리고 늘 수돗가에서 벌어지는 셋방 아낙네들의 싸움을 보다가 허겁지겁 학교에 달려갔다) -디졸브-

#씬7 (중학교 교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 선생이 나가자 금새 소란해진다. 성만이는 책장을 덮고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언제 말이 없던 박병렬과 눈이 마주 친다. 짝꿍 은 찬이 병렬이를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은찬=쟤는  좀 불량해 뵈지 않냐? 벌써 한달이 지났는데도  지 짝꿍 의필이하고도 말한마디 하는 것 못봤는데?

성만=인상은 별로 좋지는 않은지만, 그렇다고 불량배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은찬=두고 봐야지.

(이 때 의필이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다. 병렬이는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싫은 듯 얼굴을 찡그린다)

병렬=창문 좀 닫아라.

의필=(못들은 척한다)

병렬=창문 좀 닫어!

(그 때서야 뒤를 돌아보는 의필. 병렬이는 매섭게 그를 쏘아본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는 의필.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책상과 함께 의필이가 뒤로 넘어진다. 터진 잎술에 흐른 피를 닦는 의필. 그 앞에 병렬이가 험상굳은 얼굴로 서있다. 순간 조용해진 교실. 성만이가 몸을 일으키자 은찬이 재빨리 붙잡는다)

은찬=가만히 있어. 의필이도 만만치 않아.

성만= 이손 놔. 싸움은 말려야지.

(수업 종이 울리자 애들은 각기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성만이는 손을 내밀어 의필이를 일으켜 세운다.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제자리에 앉는 병렬)

#씬8 (학교 옆 다가공원)

병렬이는 책가방을 땅바닥에 내려 놓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잠시 후 의필이와 성만 그리고 은찬이가 다가온다. 의필이는 병렬이에게 가까이 이르자 책가방을 내팽겨 치고 웃옷 단추를 푼다. 모자를  푹 눌어 쓰고 팔짱을 낀채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병렬. 화난 의필이가 그의 어깨를 툭 친다.

병렬=(고개를 천천히 든다) 꼭 싸워야 되겠냐?

의필=(주먹을 불끈 쥐며) 그래, 내가 맞고 가만히 있을 사람으로 보였냐?

병렬=(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난 거칠긴 깡패는 아냐.

의필=왜, 겁나냐?

병렬=(책가방을 집어들며) 아까 있었던 일은 미안하다. 니가 날 무시하는 것 같아서순간적으로 주먹이 올라갔을 뿐이야.

의필=(앞을 가로 막으며) 이 자식이, 어딜 갈려고 그래.

(의필이는 병렬이에게 주먹을 날린다. 재빠른 동작으로 몸을 피하는 병렬. 의필이를 매섭게 쳐다 본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주춤하는 의필)

병렬=내가 사과한다고 했지. 더 이상 다투지 말자.

(병렬이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한다. 순간 의필이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을 붙잡아 땅바닥에 넘어뜨린다. 씩씩거리는 의필. 병렬이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선다. 다시 그에게 달려드는 의필이를 뒤에서 붙잡는 성만)

성만=야! 임마,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애한테 왜 그래?

의필=이 손 놔! 내가 저런 놈한테 맞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애?

은찬=너에게 사과했잖어. 이제 그만 끝내.

(의필이는 성만이 손을 뿌리치고 병렬이에게 다시 대든다. 성만이는 재빨리 앞을 가로 막아서서 화난 목소리로 그를 떠민다)

성만=싸우기 싫다는 사람 붙들고 무슨 짓이야? 자꾸 그러면 나도 가만히 안있는다.

(의필이는 성만이의 화난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곧 그를 밀치고 병렬이 턱에 주먹을 날린다.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는 병렬. 그의 잎가에 피가 흐른다. 참다 못한 성만이는 의필이에게 주먹으로 명치를 때리자 고통스러워 하며 땅바닥에 천천히주저 앉는다)

성만=(의필이를 내려다 보며) 싸우지 않겠다는 애를 붙들고 너답지 않게 웬 추잡을 떠는거야?

(너무 뜻밖에 성만이에게 얻어 맞은 의필이는 멍하니 바라본다. 성만이는 고개를 돌려 아직 그 자리에 서있는 병렬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성만=(손을 내밀며) 미안하다. 난 너가 나쁜 애인줄 알았거든. 말이 없고 항상 표정이 굳어 있어서 말이야.

병렬=(냉냉한 표정으로) 그렇게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어.

(그는 말을 마치고 의필이를 힐끗 바라본뒤 발길을 옮긴다. 은찬이는 의필이를 일켜 그의 등뒤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있다)

#씬9 (어둔 밤 방안)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등. 책상 위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 성만. 옆집 담너머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 성만은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간다.

#씬10 (마당)
어둠 속 각 방마다 불빛만 보이고 옆집 금순이 아버지가 뜯고 있는 가야금 가락이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얼마후 심한 기침소리가 들리고 가야금 소리도 멎는다.
성만은 마루에 드러누어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그 때 가운데 방 팔공주네에서 다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온다. 점점 다투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윽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말순이 엄마 악쓰는 소리 남편의 고함이 정적을 깬다. 곧 이어 얘들 울움소리가 한여름 철 매미떼 울음 소리처럼 터져 나오자 방마다 문을 열고 잠옷차림으로  말순이네 방 앞으로 모여든다. 부서질듯 방문이 열리고 말순이 엄마가 마루 위로 떠밀려 넘어진다.

말순이 엄마=(울부짖으며) 그래, 이놈아! 니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날 때려. 이날까지 여짓껏 고생이란 고생은 다 시켜놓고 그것도 모자라 겟돈으로 술퍼마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이놈아! 니 어린 딸년이 껌팔아 모아놓은 돈이여.

(말순이 아버지는 방안에서 뛰쳐나와 머리채를 잡고 발로 마구 찬다. 이씨와 김씨가
보다 못해 말순이 아버지 팔을 붙잡고 한쪽으로 끌고 간다. 마루를 치며 울부짖는 말숙이 엄마. 옆방 아낙네들이 달랜다)

집주인(여자)=(말순이 엄마 옆에 앉아) 이제 그만혀. 한밤중에 이게 무신 일이여? 어린 것들이 저렇게 울어대쌌는디. 고렇게 울고만 있을꺼여? 어여, 눈물 그치고 방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들 죄다 잠도 못자고 있잖어. 어여, 들어가서 어린 것들이나 달래줘.

(막내 딸 말순이를 안고 질질 눈물을 짜면서 방안으로 들어간다. 화를 가라앉힌 말순이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 앉아 김씨가 내민 담배를 피워 문다. 사람들은 하나둘씩각기 방으로 들어가고 멀리서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여온다. 그 때 19살된큰 딸 정님이와 16살된 둘째 딸 정순이가 들어온다)

정님=(방안을 들여다 보고) 또 엄마 두들겨 팬거여. 정말 지겨워 죽겠어.

(정님이는 손에 들고 있던 껌통을 마루에 던져버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낀다. 정숙이는 방안으로 들어가 동생들을 끌어 안는다. 이윽고 방마다 불이 꺼지고 마당은 다시 어둠과 정적에 싸인다. 그 어둠 속에 말숙이 아버지의 담배 불빛이 보이고 방안에서는 간간히 말숙이 엄마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그리고 담너머 다시 가야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디졸브-

#씬11 (비오는 날  거리 )
안개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성만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다. 성만이는 한적한 중심가를 지나 좁은 도로를 달리다가 골목길로 접어든다. 막다른 골목. 양철 대문 앞에 멈춘다. 검정색 교모가 빗물에 젖어 물방울이 차양에 송글송글 맺혀 있다.

성만=(안쪽을 들여다 보며) 병렬아!

(미닫이 방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신발이 찍찍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병렬이가 대문 밖으로 얼굴을 빠꼼히 내민다)

병렬=(차가운 표정) 잠시 기다려.

#씬12 (다시 길거리)
자전거 뒤에 병렬이를 태우고 안개비가 내리고 있는 시가지 아스팔트 위를 달린다.잠시후 전주천변 길.

병렬=어떻게 우리 집 알고 온거냐?

성만=니 앞집에 사는 태주가 알려줬다.

병렬=저번엔 싸움을 말려줘서 고맙다. 학교에서 그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이 안떨어졌어.

성만=말 안해도 표정보고 알았다. 근데 넌 왜 다른 얘들하고 어울리지 않는거냐?

(병렬이는 말이 없다. 멀리 수양버들나무 사이로 한벽루가 보인다)

#씬13 (한벽루)
나란히 누각 위에 앉아 있는 두사람. 누각 밑에는 맑은 전주천이 흐른다.

병렬=(물끄러미 물살을 바라보며) 난 얘들이 싫다.

성만=왜?

병렬=어린애 같아서. 난 3수했거든.

성만=3학년에 국민학교 동창들이 있겠구나.

병렬=걔들하고 마주칠까봐 교실 밖엔 안나가.

성만=나도 마찬가지야. 은찬도 그렇고 의필이도 늦게 그래.

(병렬이는 고개를 돌려 성만이를 바라본다.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병렬)

#씬14 (어느 날 대문 앞)
급히 달려오고 있는 의필. 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성만이를 부른다. 방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성만.

의필=(숨을 헐떡이며) 야, 빨리 나와봐.

성만=(밖으로 나오며) 왜 그래, 무슨 일났냐?

의필=(가쁜 숨을 가다듬고) 은찬이가 불량배들 한테 걸렸어.

성만=뭐야? 거기가 어딘데?

의필=저기 제일탁구장 골목길.

성만=(마루에서 내려와 운동화를 신고서) 어쩐지 니들이 안보인다 했더니...

#씬15 (골목길)
바지만 교복을 입은 네명의 고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은찬. 벌써 몇대 얻어 맞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의 눈언저리엔 멍들어 있다. 허겁지겁 달려온 성만이는 한사람을 밀쳐내고 은찬이를 일으켜 세운다.

성만=니들 석청파 얘들이지? 힘없는 애를 왜 때리고 그래?

불량배1=(가소럽다는 듯 코웃음치며) 이 자식봐라. 중학생아냐?

불량배2=이 새낀 탁구장에서 판석이 때린 놈 같은데. 너 잘만났다.

성만=그래, 하도 개같이 굴어서 좀 손좀 봐줬다.

불량배3=(성만이 멱살을 움켜쥐고)이게 겁도 없이 대드네. 너 오늘 혼좀 나봐라.

(성만이는 먼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타한다. 뒤로 나뒹구는 불량배3. 순간 세명이 성만이를 덮친다. 잔뜩 겁을 먹은 은찬은 옆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바라만 보고 있다가 성만이가 맞기 시작하자 큰 길로 달려간다. 의필이는 뒤에서 한 녀석 허리를 붙잡고 넘어뜨린다. 이 때 병렬이와 은찬이 나타난다)

병렬=(큰 소리로) 그 손 놓지 못해?

불량배4=(성만이 목에서 손을떼며) 이 쌔끼는 또 뭐야.

(갑자기 나타난 병렬이를 바라본 불량배들은 그의 중학생 교복을 보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불량배2=(병렬이에게 다가서서 얼굴을 툭툭치며) 야, 이 짜식아. 너 한번 코피 터지게 맞아 볼래?

(병렬이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본다. 순간 병렬이의 주먹이 불량배2의 명치를 강타한다. 힘없이 그의 앞에 꼬꾸라지자 일제히 달려든다. 날엽한 몸놀림으로 대응하지만 이윽고 힘에 부쳐 맞기 시작한다. 성만이와 의필이도 합세하지만 결국 역부족, 세사람은 땅바닥에 나뒹군다)

불량배1=(옷에 묻은 흙을 털며) 이 쌔끼들, 또 한번 걸리면 그땐 작살나는 줄 알어?

(불량배들이 사라지자 은찬은 얼른 세사람을 일으켜 준다)

은찬=괜찮냐? 성만아, 말좀 해봐!

성만=아무렇치도 않어.

은찬=얼굴에 피가 묻었잖어?

(성만이는 몸을 땅바닥에 주저앉아 병렬이를 바라본다. 상처가 난 얼굴에 피가 흐른다. 의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다. 그의 귀밑에도 피자욱이 보인다. 성만이는 일어서서 병렬이에게 손을 내민다)

성만=(의필이를 바라보며) 임마, 엄살 그만 떨고 일어나!

병렬=(의필이에게 다가간다) 많이 아프냐?

(의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귀밑을 만져본다)

의필=괜찮아.

성만=(병렬에게) 와줘서 고맙다.

병렬=지나가다가 은찬이를 만난 것 뿐이다.

의필=니가 나타날 줄은 정말 몰랐다.

(병렬이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세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나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간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우리 세사람이 병렬이와 친해진 것은 그 일이 있은 후 부터였다. 교실에서는 언제나 차가운 표정으로 말이 없던 그는 가끔 쉬는 시간에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항상 자리에 앉아 있었다. 때론 그의 표정엔 짙은 외로움이 베어있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면 그저 살며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집에만 들어박혀 있던 그를 찾아갔을 때였다.  -디졸브-

#씬16 (병렬이 집안)
수돗가 옆에 매달아 놓은 샌드빽을 툭툭치고 있는 병렬. 마루에서는 온 식구가 달려들어 술주정하는 둘째 형을 붙잡고 방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마당과 마루에는 옷가지와 깨진 그릇, 책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한차례  소란이 끝나자 대문이 사이로 성만이가 빠꼼히 얼굴을 내민다.

병렬=(황급히 밖으로 나와 성만이를 끌어 당긴다) 여긴 왜 왔어?

(다소 신경질적이다)

#씬17 (완산 칠봉 공원)
벚꽃이 활짝 피어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공원 길. 성만이가 자전거 뒤에 병렬이를 태우고 나타난다. 곧 벤취에 나란히 앉는다. 발밑에 벚꽃이 수북히 쌓여있다.

성만=아까 깽판 친 사람이 누구냐?

병렬=(딱딱한 목소리)둘째 형이다.

성만=맨날 그러냐?

병렬=(바람에 날리는 꽃잎만 바라보며 말이 없다)

성만=형 때문에 니 엄마 속상겠다.

병렬=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서 그래. 술로 살어.

성만=그래서 너도 말이 없는 거냐?

병렬=(피식 웃으며) 나까지 소리쳐대면 집안이 온전하겠냐? 식구 모두가 입을 다물고 살고 있는거야. 서로서로가 편하게 살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거든.

성만=그건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병렬=봐서는 안될 것만 보고 사는구나.

성만=우리도 어른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될까?

(꽃잎은 두사람 어깨 위에 떨어진다)

#씬18 (성만이네 방문 앞)
양장 차림 젊은 여자가 마루에 앉아 있다. 성만이가 막 학교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고 가방을 던진다. 집안에는 여느 때보다 조용하다. 여인은 힐끗 성만이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여인=여기가 니네 방이지? 니 엄마 좀 찾아 올래?

성만=어디 갔는지 모르는데요.

여인=(눈꼬리를 치겨세우며) 흥! 살다보니까 별꼴 다 보겠네.

성만=옷 맡겼어요?

여인=니 엄마한테 옷감을 맡긴지가 보름이 넘었어. 오늘은 틀림없이 해놓겠다면서 코빼기도 안보여? 나원 기가 막혀서,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 핑개 저핑개 대면서  여태껏 가위질도 않해놔? 오늘 내 그냥 가나 봐라.

(성만이는 슬금슬금 여인 눈치를 보며 밖으로 빠져나간다.마침 성만이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머니=넌 허구헌날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거냐?

성만=(볼멘 소리로) 어떤 아줌마가 옷 여태 안해 놨다고 화 잔뜩 나서 엄마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여인은 어머니를 보자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표독스럽게 쏘아본다)

어머니=미안혀서 어쩐디야. 이틀만 기다리면 다해 놓을 텐데.

여인=(잔뜩 화가나서) 이 여편네가 누굴 바보 천치로 아나. 핑개도 하루 이틀이지. 삯을 미리 줬으면 제날짜에 해줘야 할거 아녀? 어디 말좀 들어 봅시다. 기욱이네 옷은 그 다음 날에 해주고 내 옷은 보름씩이나 넘겨? 사람을 얏잡아 봐도 유분수지.

어머니=내 오늘 밤샘해서라도 내일까진 해놓을텐게, 이만 분을 삭이게.

여인=아니, 그게 어디 한두번 혔어? 나도 참을 만끔 참았응께 내 옷감허고 준 돈이나 내놔!

(어머니는 여인 팔을 붙잡아 마루에 앉히며 통사정을 한다. 다소 화가 가라 앉은 여인, 내일까지 해놓기로 약속을 다짐받고 몸을 돌려 획 나가버린다. 어머니는 힘없이 마루에 주저 앉고 담벽에 기대서서 어머니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성만.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밖으로 나간다)

#씬19 (저녁 무렵 마당)
갓 돌이 지난 말순이 울음소리와 김씨네 아이들 떠들며 이리저리 뛰다니며 떠드는 소리로 어수선하다. 이 시간이 되면 언제나 라디오 볼륨을 크게 틀어 놓는 이씨. 주인집 아저씨는 내일 세들어 올 부엌 문짝을 고치고 있다.

집주인(남자)=(일손을 멈추고 잔득 화난 목소리로) 거, 이씨! 라디오 소리좀 줄여! 여기가 시장 바닥인줄 알어? 사람들이 경우가 없어.

이씨=셋집이 다 그렇지, 뭘 그리 야단이쇼?

주인(남자)=그 놈의 라디오 좀 꺼! 사람 귀청 떨어지겄어! 헐일 없으면 발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초저녁부터 라디오 크게 켜놓고 뭐하는 짓이여? 그렇지 않아도 정신 없어 죽겠는데.

이씨=아따, 권투 중계 좀 들을려고 그러는 것 가지고 뭘 그리 역정을 내는 거요?

주인(남자)=방 구석에 쳐박혀서 혼자 조용히 들을 일이지, 라디오는 밖으로 왜 들고 나와?

이씨=셋방이라고 괄시하지 마쇼? 이거 원 집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겄나.

집주인(남자)=(언성을 높이며) 뭐가 어쩌? 아니, 이 사람아,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당신 혼자 사는 집이 아니면 예의를 지켜야 할 것 아녀? 멀쩡한 인간이 빈둥거리면서 챙피한 줄도 모르나.

이씨=(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 뭐여? 집주인이면 그렇게 말을 함부러 해도 되는 거여?

(집주인은 기어이 화를 못참고 망치를 팽겨치고 이씨에게 다가와 멱살을 움켜쥔다)

집주인(남자)=(이씨를 땅바닥으로 잡아 끌면서) 너, 이놈! 오늘은 내 가만 안둔다.

(이씨도 질세라 집주인 아저씨 멱살을 움켜 쥐고 힘껏 밀쳐댄다. 순간 두사람은 뒤엉켜 땅바닥에 나뒹군다. 사람들이 뛰쳐나와 두사람을 뜯어 말린다. 마주보며 씩씩거리는 두 사람)

이씨=(숨을 헐떡이며) 집주인이라고 사람 그렇게 괄시하면 안되는 법이여. 어쩌다 서울서 사업 실패하고 잠시 쉬고 있으니까 우숩게 뵈는 모양인데, 사람이 좀 가진 게 있다고 해서 몰상식하게 행동하면 안되지.

집주인(남자)=낯살이나 먹은 놈이 술집 기집년한테 빌붙어 먹고 사는 놈이 챙피한줄도 모르고 어디다 대고 주둥아릴 놀려? 내 오늘 당장 니놈을 못쫒아 내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씨를 밀쳐내고 방안에 들어가 가재도구를 밖으로 내던진다. 이씨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집주인이 방금 고친 부엌 문짝을 마구 발로 찬다. 그리고 망치를 주워들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시 그를 붙잡는다)

이씨=(몸부림치며) 이 손 놔! 저 놈의 새끼 때려 죽일거다!

말숙이 아버지=(망치를 뺏으며) 이 사람아! 이게 무신 짓이여! 자네가 참게나.

이씨=(거의 울부짖는 목소리로) 참긴 뭘 참어! 그게 어떤 살림인디.

(말숙이 아버지는 질질 끌다시피 이씨를 끌고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집주인 아저씨는 이씨 방안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밖으로 내팽겨친 후 손을 털며 침을 밷고서는 자기 방으로들어가 버린다. 말숙이네 방에서는 이씨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씬20 (얼마 후 이씨방 마루)
이씨는 마루에 걸터 앉아 소주를 마신다. 잠시 후 멀리서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길게 들려 온다. 각 방에 불이 하나 둘씩 꺼진다. 그 때 요정집에 나가는 이씨 미스 홍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대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미스 홍=이게, 대체 웬일이여? 아니, 여보, 무슨 일있었어? 말 좀해봐!

(이씨는 벌써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진다. 미스 홍은 울먹이며 그의 몸을 바로잡아 세우고 다그쳐 묻는다)

미스 홍=이게 대체 웬 날벼락이여. 말 좀 혀봐!

(이씨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미스 홍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이씨=우리.. 내일 여기서 ...나가자. 세상 천지에... 갈 곳이 없겠냐? 집없는 설움이... 이렇게... 비참한 줄... 이제야... 알겠다. 우리..내일... 이 집에서...

(이씨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옆으로 쓰러지며 중얼거린다. 미스 홍은 이씨는 붙잡고 흐느끼다가 땅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가재도구와 옷가지를 하나씩 챙긴다)

#씬21 (얼마 후 이씨 방)
깜깜한 마당. 이씨 방만 불빛이 보인다. 그리고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지면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씨 옆에 앉아 있는 미스 홍 그림자가 문 밖으로 비친다.빗줄기가 점점 많아지면서 밤은 깊어가고 이윽고 가느다랗게 미스 홍의 애잔한 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 회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그 날밤 한차례 소동이 있은 후 빗소리에 잠을 깬 나는 이씨 아저씨 방에서 흘려나오는 미스 홍 아줌마의 슬픈 창 가락 소리을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빗소리를 뚫고 곱고 가늘게 들려온 기생 미스 홍 아줌마의 소리는 그 날 밤 그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의 가난과 고달픈 삶의 애환을 달래주는 듯 어둔 하늘 멀리 퍼져갔다.그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미스홍 아줌마와 이씨 아저씨는 그 집을 떠나버리고 텅빈 방만 보였다.  -디졸브-

#씬22 (골목길 대문 앞)
잔뜩 토라진 모습의 정숙이와 정님이가 들어온다. 정숙이는 대문 앞에 다가오자 뒤에서 정님이 옷자락을 잡아 끈다.

정님=(화를 내며) 이 손 놔!

정숙=(애걸하는 목소리로) 언니, 그냥 들어가면 어떡해! 오늘 벌이도 별로 없는데.

정님=야, 이년아! 껌 한통 팔려고 빰까지 맞고도 이짓하고 싶어?

정숙=그럼 어떡해? 내일 당장 방세내는 날이데. 두달치가 밀려서 더 이상 주인이 가만히 안있는단 말이야.

(정님이는 대문 앞에서 발걸음 더 이상 옮기지 못하고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 뒤를 따라 나서는 정숙)

#씬23 (저녁 무렵 골목길 앞)
성만이와 같은 또래 금순이가 가야금을 들고 담벽에 기대고 훌적이며 서 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 있는 성만.

성만=금순아, 여기서 왜 울고 있어? 니 아버지 한테 야단 맞았냐?

금순=(눈물을 닦으며) 아냐, 아무 것도. 별일 아냐. 그냥 가.

성만=별일 아닌 것 같은데? 집안에 무슨 일이 있냐?

금순=(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린다) 아버지 병세가 더 심해 졌어. 의사가 더 이상 가망 없대.

성만=아하, 그래서 요즘 가야금 소리가 안들렸구나. 니 오빠는?

금순=(고개를 떨구며) 오빤 집을 나갔어.

성만=언제?

금순=한 달전 쯤. 돈벌어 오겠다며 편지만 남겨 놓고. 아버지가 충격을 받을까봐 고모집에 갔다고 거짓말 했어.

성만=그럼 그동안 가야금 배우러 온 사람들은 어떡혔냐?

금순=내가 가르쳤어. 우리 아버진 아직 그런 줄 몰라. 아버지가 불쌍해.

(금순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담벽에 얼굴을 돌리고 흐느낀다)

성만=어쩔 수 없잖어. 니가 오빠대신 계속 가르쳐야지. 지금 가야금 가르치러 가는 중이냐?

금순=(고개를 끄덕인다)

성만=니 엄마 소식 아직도 없는거냐?

금순=(힘없는 목소리) 다른 남자한테 시집갔대.

성만=미안...하다. 괜한 것 물어서. 니 아버지가 맨날 니 오빠를 야단쳐서 나갔을 거야. 금방 돌아오겠지. 너무 걱정하지마.

금순=모르는 소리 말어.우리 아버지는 오빠가 행여 딴짓 할까봐 야단친거여.

성만=딴 짓이라니?

금순=오빤 아버지 몰래 요정집에 가서 기생아가씨들 가르쳤거든. 아버지가 폐병으로 들어 누우니까 가야금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발길이 뚝 끊겼어.

금순=(가야금을 가슴에 끌어 않으며) 아버지가 오빠한테 술냄새를 맡고 눈치를 챈거여.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는  얼굴은 첨봤어. 우리 엄마가 집을 나갔을 때도 아무렇치도 않았는데.

(슬픈 얼굴 금순이 모습. 힘없이 가야금을 끌어 안고 발길을 옮긴다. 아스팔트 길위로 점점 멀어져 가는 금순이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만) -디졸브-

#씬24 (12월 학교 교문 앞 다리)
금새 눈이 내릴 것같은 오후.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몰려나온다. 그 틈에 섞여 은찬과 병렬이와 함께 교문을 나와 다리를 건너는 성만. 사거리에서 각자 헤어진다. 거리에는 벌써 캐롤 송이 흘러 나오고 있다.

#씬25 (잠시 후 집안)
마당에 들어선 성만이는 활작 열려진 방안에 재봉틀이 넘어져 있고 옷감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어머니는 허탈한 모습으로 방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고 그 옆에 여동생 선자가 훌쩍이고 있다. 언제 왔는지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 앉아 참담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버지=처자식먹여 살릴려고 타지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있는디, 그런 서방 위로는 고사허고, 집만오면 왜 지랄이여. 지까진게 바늘질혀서 벌면 얼마나 벌었다고 공치사혀.

어머니=(금새 표독스럽게 변하며) 고생? 또 어떤 기집년하고 살림차려 놓고 살면서, 뻔뻔스럽게 터진 입이라고 처자식 땜에 고생한다는 소리가 나와?

아버지=(고개를 돌려) 이놈의 여편네야! 아직 덜 맞아서 안달이여?

어머니=어이구, 자식 앞에서 챙피한 줄도 모르고, 지버릇 남주나, 여지것 이날 이때까지 니놈이 처자식 한번 생각헌적 있어? 먹을 양식을 사줬어, 애들 학비를 한번 주봤어? 그래놓고 낯짝도 없이 덜렁 나타나서 행패부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어머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밖으로 끌어내며 마구 발길질을 해댄다. 옆방 말순이 엄마와 앞방 춘순이 언니가  보다 못해 아버지 팔을 붙잡고 어머니에게서 떼어 놓는다. 흩어러진 머리카락.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어댄다. 아직 분이 안풀린 아버지는 방문을 한차례 발로 차고서는 다시 마루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그리고 옆집 담벽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성만이와 눈이 마주 치자 얼른 시선을 피한다)

주인집 아줌마=이놈의 집 사람들은 왜 이렇게 싸움질만혀? 쌈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이제 제발 좀 그만혀! 죄다 내쫒든가 혀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낮으로 시끄러워서 살수가 있어야지.

(집주인 아줌마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쫒아낸다.그리고 혀를 차며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성만이는 흐느끼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뒷걸음으로 나간다)

#씬26 (늦은 밤 금순이네 집)
곧 무너질 듯한 한옥. 금순이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씬27 (방안)
눈을 지긋이 감고 아랫목에 누워 있는 금순이 아버지. 그 옆에 금순이는 찔끔 찔끔눈물을 짜고 있다. 잠시 후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몰아 쉬는 아버지. 힘없는 목소리로 금순이를 부른다.


아버지=내... 몸.. 좀, 일으켜... 다오.

금순이=(울먹이는 목소리) 어쩔라고 그래요. 가만히 누워 계시지 않고.

(고개를 들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금순이가 얼른 등 뒤를 받혀 준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은 아버지. 또 한차례 심한 기침을 토해낸다. 입가을 닦은 옷소매에 묻어난 피.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본다)

아버지=저기.. 가야금을... 가져오거라.

금순이=그냥 누워 계세요. 편찮은 몸으로 뭐하실려고 그런다요?

아버지=어여, 가져와!

(금순이는 마지못해 가야금을 그의 앞에 내려 놓는다. 손 때 묻은 가야금. 아버지는 힘없은 손으로 가야금 12줄을 천천히 만져본다)

아버지=니.. 오빠, 여직껏... 소식 없지?

금순이=아, 아니예요. 지가 연락했응께, 곧 올거만요.

아버지=날, 속일... 필요는... 없다. 그 놈은 ...어차피, 밖에 나가.. 살놈이었어.

(금순이는 끝내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움을 터뜨린다. 창백한 얼굴, 입가에 미소를 띠우는 아버지)

아버지=그만, 울고... 인제, 고개를... 들거라. 할 얘기가.. 있다.

(고개를 들고서도 두손을 얼굴을 가리며 여전히 흐느끼는 금순. 아버지의 또 한차례 숨넘어 갈듯한 기침. 그 때서야 울음을 멈추고 아버지를 바라본다)

금순이=아부지! 하실 말씀이 뭐다요?

아버지=(가야금을 앞으로 내밀며) 이걸, 니 오빠에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이제, 니가, 갖거라. 난,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같구나. 좀 눕혀다오.

(자리에 다시 누운 아버지는 지긋히 눈을 감는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찬찬히 흝어본다)

아버지=(가쁜 숨을 길게 내뱉고) 니, 솜씨가... 듣고... 싶구나.

(금순이 손가락이 어느새 가야금 줄을 듣기 시작한다. 초췌하게 움푹 들어간 아버지 얼굴. 그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

#씬28 (밖)
방안 불빛이 비치는 마당 위에 함박눈이 소리없이 쌓여간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하염없이 눈이 휘날리던 겨울 밤, 금순이 아버지는 가야금 산조 가락에 실려 결국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한평생 가야금을 벗삼아 살아온 금순이 아버지는 다 쓰러져가는 한옥집에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어린 열 여섯의 딸금순이에게 슬픔만 가득 남겨 주었다. 그 뒤로 금순이는 먼 친척을 따라 전주를 떠나 버렸고 나는 이른 새벽과 늦은 밤마다 담너머 들려왔던 그 애절한 가야금 산조 가락을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봄, 우리 집도 전주시 변두리 금암동으로 이사가게 되면서 나의 중학 시절을 보낸 중앙동의 가난과 삶에 지친 셋방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은 점점 잊어져 갔다. -디졸브-

#씬29 (학교 교정)
점심시간.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성만이는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운동장에서 뛰노는 얘들을 바라본다. 그 때 그 곁으로 다가오는 도병룡.

병룡=너,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아 다녔다.

성만=무슨 일로?

병룡=의논할 게 있어서.

(잠시 후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오재명과 김동욱이가 다가온다)

동욱=여기 있었구나.

성만=무슨 얘길하려고 떼몰려 다니면서 날 찾았냐?

병룡=사실은 우리끼리 중찬단을 만들어 볼까 해서.

성만=중창단? 난 노래는 좋아하지만 노래는 못해.

동욱=연습하면 돼.

재명=우리 학교에 피닉스 4중창단이 있잖어. 우리 교회에 나오는 재성이 형이 리더구.

병룡=피닉스 멤버가 모두 3학년이라서 뒤를 이을 후배를 키우고 싶단다. 그래서 같은 교회 다니는 우리끼리 만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동욱=같이 해보자. 재성이 형이 지도해준다고 혔어.

성만=연습은 언제 할건데?

병룡=토요일에는 교회에서 하고 수요일에는 수업 끝나면 학교음악실에서.

성만=그래, 한번 해보자.

(재명이는 발로 벚꽃나무를 찬다. 꽃잎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진다. 곧이어 점심시간이 끝나는 벨이 길게 울린다)

#씬30 (토요일 오후 교회)
어두 침침한 고등부실. 성만이 혼자 피아노 건반을 눌러보고 있다. 곧 문여는 소리. 고개를 돌려바라보는 성만. 세라복을 입은 김상숙이가 들어온다)

상숙=어머, 혼자 있어요?

성만=재명이는 청소당번이고 동욱이는 주번이라서 조금 늦는댔어요.

상숙=둥욱씨가 저보고 반주 좀 해달라고 했는데 잘 될 지 모를겠네요.

성만=피아노 잘 치잖아요.

상숙=(피아노 앞에 앉으며) 생각보다 별로예요. 모두 노래를 잘하니까 자신이 없어요.

성만=사실 전 음치거든요? 병룡이가 억지로 하자고 해서 마지 못해 끼어들었지만...아마, 화음이 좀 이상하면 틀림없이 제 목소리 일겁니다.

(상숙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웃는다. 이윽고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동욱이와 병룡이가 함께 들어온다)

병룡=재명이는?

성만=같이 안왔냐?

동욱=걔 교실에 갔더니 없던데?

병룡=그 짜식은 동작이 워낙 늦어서 항상 꼴찌로 나온다니까.

(빠꼼히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미는 재명. 미안한 듯 가방을 의자에 내려 놓고 웃음을 띠며 다가온다)

재명= 좀 늦었지?

병룡=좀 어딜갔다 오는거냐? 좀 일찍일찍 다녀라.

성만=자, 그만하고 재성이 형은?

(다시 문여는 소리. 재성이가 악보를 들고 들어온다)

재성=오래 기다렸지?

병룡=지들도 방금 왔어요.

재성=(피아노 쪽을 힐끗 바라보며) 상숙이구나. 난 또 어떤 예쁜 여학생이 와있나 했지. 자, 이리 모여.

(피아노 앞에 앉은 상숙. 그 뒤에 나란히 서있는 네사람. 재성이는 의자에 앉아 악보를 보며 음정을 맞춰준다. 창문사이로 실같은 햋빛이 길게 뻗어 있다)

#씬31 (잠시 후 밖)
살구꽃과 진달래가 활착 피었는 교회 정원. 네사람 화음이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이때 상숙이 친구 윤형숙, 그리고 조혜숙  두여학생이 얘기를 주고 받으며 들어 온다.

형숙=다 끝날 시간 안됐냐?

혜숙=(시계를 드려다 보며) 좀 지났다 얘.

형숙=여기 앉아서 기다리면 나오겠지.

(곧 노래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소리. 상숙이가 밖으로 나온다)

상숙=연습이 좀 늦었어. 오래 기다렸냐?

형숙=아니, 많이 안기다렸어.

(뒤이어 밖으로 나오는 네사람. 재성이는 곧바로 교회를 빠져나가고 벤취 위에 모인 이들은 즐겁게 얘기를 나눈다)

형숙=친한 친구끼리 노래 불러서 좋겠네요.

동욱=그 쪽도 한번 해보지그래요? 숫자가 맞고.

상숙=예네들은 게을러서 못해요. 괜한 소리 말고 네분들이나 열심히 하세요.

형숙=언제쯤 노래들을 수 있어요?

성만=나 때문에 오래 걸릴껄요?

형숙=(웃숩다는듯) 왜요?

성만=제가 음정을 잘 못맞춰서요.

혜숙=아까 들어보니까 화음이 잘맞던데요?

성만=그건 내목소리가 예네들 목소리에 묻혀나와서 그렇지요.

병룡=(성만이 어깨를 툭 치며) 그러니까 중창이지. 이 짜식아.

(세 여학생들은 꾹꾹거리며 한동안 웃어댄다. 재명이는 살구 꽃잎을 한송이 따들고 상숙에게 건넨다.무심코 받아든 상숙, 재명이 얼굴을 바라보자 금새 빨개진다)

상숙=어머, 늦겠다. 빨리가자.

(상숙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서 교회 빠져나간다. 재명이는 벤취에 앉아 다시 살구 꽃을 한 송이 꺾어들고 상숙이 뒷 모습을 바라본다)

병룡=(재명이발을 툭 건들며) 뭘 그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냐?

재명=(당황하여) 아무 것아녀.

병룡=아니긴 뭐가 아녀, 임마. 빨랑 일어나.

#씬32 (학교 음악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재성. 그 뒤에 둘러 서서 노래연습을 하는 네사람. 창문 밖으로 다가공원에 활짝 핀 벚꽃이 보인다. -디졸브-

#씬33 (초여름 교회)
가느다란 이슬비가 내리는 교회 뜰. 막 예배가 끝나자 고등부 학생들이 몰려나온다. 그 틈에 상숙이 친구들도 우산을 받쳐들고 은행나무 아래서 서성이고 있다.

#씬34 (고등부 예배실)
병룡이와 동욱이가 나가자, 성만이와 재명이 둘만 남는다. 성경책을 정돈하고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성만. 뒤에서 재명이가 부른다.

성만=(다시 안으로들어오며) 왜, 무슨 할 얘기 있냐?

재명=(머뭇거리며) 부탁...좀 할려고.

성만=부탁? 무슨 부탁?

(재명이는 호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꺼낸다. 그리고 성만이 손에 살며시 쥐어준다)

성만=이게 뭐냐?

재명=편지.

성만=누구한테 줄건데?

재명=(더듬거리며) 저...니가, 상숙씨한테 전해 줄래?

성만=(미소를 지으며) 너, 그앨 좋아하는거냐?

재명=(얼굴 붉히고) 니가 여학생하고 말을 잘하잖아. 좀 부탁한다.

(성만이는 그의 수줍은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씬35 (밖)
병룡이와 동욱, 그리고 상숙이와 그 친구들이 은행나무 밑에서 잡담을 하고 있다. 대예배실에서는 찬송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교회 문을 빠져 나가는 상숙이 일행.성만이는 그녀들 뒤를 쫒아간다.

#씬36 (길가)
친구들과 우산을 맞대고 걸어가는 상숙이 뒷모습. 성만이는 뒤에 바짝 다가가 상숙이를 부른다. 일제히 뒤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상숙이는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 손에 하얀 종이를 건네준다. 물끄러미 성만이 얼룩을 바라보는 상숙.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그 하얀 종이를 손에든채 저만치 떨어져 기다리는 친구에게로 걸어간다. -디졸브-

#씬37 (교회 뜰)
한적한 뜰에 노랗게 단풍든 은행잎이 수북히 쌓여 있다. 고등부실에서 중창 화음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씬38 (잠시 후 교회 정문앞)
연습을 마치고 교회 정문을 빠져나오는 네사람. 동욱이와 병룡이 바쁜 걸음으로 사라져 간다. 성만이와 재명이는 천천히 교회 담벽을 따라 걷는다. 담벽 끝. 상숙이가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인채 서있다. 발걸음 멈추는 두 사람. 상숙이는 고개를 들고 두사람을 바라본다.

상숙=성만씨를 기다렸어요.

(재명이는 몸을 돌려 다시 교회로 발검을 옮기고 성만이는 뒤를 돌아 재명이의 뒷모습을 보며 상숙이와 함께 걸어간다)

#씬39 (다가공원)
가람 이병기 시비 옆 벤취. 낙옆이 쌓여있다.

(-인서트-재명이는 고등부 예배실에서 혼자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있다)

상숙=미안해요. 참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성만씨가 제게 편지를 제게 편지를 전해 준 뒤로 어떻게 계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교회 생활도 무척 힘들었구요. 재명씨와 마주보기가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성만=재명이 그 친구도 오랬동안 마음 아파했어요. 속 마음을 잘 내색하지 않ㄴ 성격이라, 마음의 고통이 컸을거예요.

상숙=(고개를 들고) 저도 알고 있어요. 교회에서 마주칠 땐 서로 시선을 피하곤 했어요. 오랫동안 말을 않해던 것은 재명씨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성만=좋은 친구지요. 마음도 여리고.

상숙=정말 미안해요. 본인에게 직접 말하려 했는데...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저도 무척 괴롭단말이예요.

(상숙이는 울먹이며 벤취에서 일선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땅위로 뒹군다)

#씬40 (전주천 변)
(석양이 완산칠봉 위로 붉게 물들어 있다. 재명이는 계속 말이 없다. 성만이는 걸음을 멈춘다. 점점 멀어져 가는 재명) -디졸브-

#씬41 (학교 교정)
운동장 스텐드에 나란히 앉아있는 세사람. 침울한 표정. 하늘은 잔뜩 흐려있다.

성만=재명인 상숙이 때문에 기운을 잃고 있어. 우리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병룡=상숙이를 설득해 봐야지.

성만=설득해서 해결될 일이 아냐.

동욱=그럼 어떡하자는거냐?

성만=재명이 마음이나 위로해 줘야지 뭐.

병룡=야, 임마.바보같은 소리마. 그놈의 성격에 위로한다고 맘돌리겠냐. 한번 니가 상숙이를 다시 만나서 얘기 잘해봐.

성만=또, 내가?

병룡=그럼 누가 하냐? 니가 맨 처음부터 떠맡은 일아녀? 우리한테도 숨기고.

#씬42 (다가공원 길)
동욱이는 말없이 걷기만 한다. 투덜리며 뒤따라 오는 성만.

성만=야, 무슨 일인지 말해야 알것 아녀? 요즘 니들 왜 그러냐? 한결같이 침통해 가지고 말도 없고, 그렇다고 노래연습도 안하고. 겨울 방학전에 발표하기로 했잖어 얼쩔라고 그래?

(동욱이는 대꾸도 없이 걷다가 공원 한적한 곳에 이르자 벤취에 주저 앉는다)

성만=야, 좀 말좀해라. 사람을 불러 놓고 오늘따라 왠 청승이냐?

동욱=(낙엽을 주어들며) 사실 오늘 널 부른 것은 고백할 말이 있어서 그래.

성만=고백?

동욱=상숙씨가 재명이를 멀리한 것은 나 때문이야.

성만=(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동욱=우리 둘은 오래 전부터 사귀고 있었거든.

성만=(표정이 굳어진다)

동욱=너희들에게 미리 얘기를 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성만=재명이한테 말해야겠지?

동욱=아냐, 말하지마. 재명이 충격이 클거야. 그냥 모른체 해줘.

성만=언제까지 속일려고 그래?

동욱=내가 상숙이 포기할거야.

성만=꼭 그래야 돼냐?

동욱=재명이를 위해서는.

(성만이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서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바라본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개를 들어 동욱이를 바라본다)

성만=우리, 피닉스중창단 발표회 준비나 열심히 하자.

(동욱이는 웃기만한다)

#씬43 (학교 교정)
수업이 끝난 늦은 오후. 을씨년스런 교정. 낙엽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음악실에서 중창 화음이 들려나온다.

#씬44 (교회 예배실)
텅빈 예배실. 맨 앞 상숙이가 혼자 앉아 훌쩍인다. 점점 어두어 진다.-디졸브-

#씬45 (늦은 밤, 다가교)
다리 위에서 전주천을 바라보며 서있는 재명. 하늘에선 조금식 눈발이 흩날린다.
다리 앞 골목길에서는 재명이를 바라보며 서있는 세사람.

병룡=틀림없이 상숙이가 나올 것 같냐?

성만=재명이가 직접 약속했다니까 나오겠지.

동욱=(아무 말없 묵묵히 다리쪽만 바라보고 있다)

병룡=야,너는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냐? 떱덜한 표정으로.

성만=임마, 추워서 그래.

(시간이 흐른다. 병룡이는 자꾸 시계만 바라본다. 다리 위에 있는 재명이는 좀처럼 떠날 생가을 안한다)

병룡=8시에 만나기로 했다면서? 지금 10시가 다 됐잖아. 아무래도 안올 것 같은디. 그냥 재명이 끌고 들어가자.

(세사람은 제법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한다. 세사람은 재명을 억지로 끌고 다리에서
걸어 나온다)

#씬46 (교회 골목길)
세사람은 말이 없다. 교회 앞에 이르자.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병룡=제 또 왜 그러냐? 이 야심한 밤중에 교회는 왜들어가?

성만=좀 잠자코 있어라. 넌 제 맘도 못읽냐?

동욱=(낮은 목소리로) 혼자 기도하고 싶은 모양인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자.

(시간이 흐른다. 벌써 통금 예비 사이렌 소리가 길게 울린다. 성만이는 교회문을 열고 안으러ㅗ 들어간다)

#씬47 (고등부 예배당)
아무 것도 안보인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놓는 성만. 한쪽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나는 쪽을 향해 발을 옮기는 성만. 그 곳에 재명이가 앉아 있다. 성만이는 가만히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는다.

#씬48 (재명이 방)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길게 들려온다.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는 네사람. 모두 천정만 바라보고 있다. 침묵을 깨고 재명이의 낮은 노랫 소리가 흘러나온다.

#씬49 (창문 밖)
굵은 눈발이 흩날린다. 골목길 입구에 서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 눈이 쌓여간다.-이 화면 위에-

#씬50 (학교운동장)
네명이서 둘씩 편을 갈라 야구를 한다. 동욱이는 공을 던지고 재명이는 야구방맹이로 공을 친다. 성만이는 포수를 맞고 병룡이는 수비를 맡고 있다.-이상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그 이후로 재명이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그러나 동욱이는 갈수록 우울한 표정이었고 상숙이도 예배만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디졸브-

#씬51 (다음 해 봄, 동서학동 산언덕 달동네)
가파른 골목길 끝 산밑. 담장도 없는 한옥집. 뒷쪽 외딴방에서 성만이가 가방을 들고 방문을 나선다. 이때 부엌에서 누나 성숙이가 나온다.

성숙=아침 굶고가서 어떡혀냐. 배고프드래도 좀 참고 있어. 점심대 벤또 갖다줄께.

성만=난, 괜찮아. 성희한테나 갖다줘.

성숙=너, 오늘부터 야간 자습한다며?

(성만이는 들은 척하지도 않고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선 가파른 골목길을 뛰어간다)

씬52(저녁 방안)
성희가 발을 만지며 훌적이고 있다. 밖에서 발자욱 소리. 문이 열리고 성만이가 들어온다.

성만=너 또 맨발로 연습했구나.

성희=선생님이 한켜례 빌려줬는데 발에 안맞아서 그래.

성만=(책상 앞에 주저 앉으며) 야, 그놈의 발레 때려칠 수 없냐? 토울 슈즈 한켜례 사지도 못하지도 못하는 형편에.  -디졸브-

#씬53 (숲속)
단풍이 곱게든 완산칠봉.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숲속에 세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은찬=아직도 니 부모는 군산에서 장사하냐?

성만=요즈음 장사도 안되는 지 방세도 못주고 있다.

병렬=생활비는?

성만=누나가 양품점 점원으로 있어서 그럭저럭.

은찬=예비고사가 얼마 안남았는디, 대학은 갈 수 있냐?

성만=예비고사가 문제냐? 당장, 수업료도 못내서 학교도 못나갈 판인디.

(낙엽이 뚝둑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디졸브-

#씬54 (다음 해 2월 학교 앞 다가교)

차가운 바람, 다리 위에 걸어가는 네사람 옷자락을 펄럭인다. 손에 입김을 쏘이는 병룡. 동욱이는 바람부는 쪽을 향해 등을 돌린다.

병룡=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거냐?

동욱=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시 떨어져 있는거지.

성만=한동안 못보겠지.

동욱=넌, 재수할 생각이냐?

병룡=서울서 학원 다닐까 한다.

동욱=성만이 너는 여기서 공부할래?

성만=전주에 남아 있어야 겠지. 난 니가 신학대에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오래 생각하고 결정한거냐?

동욱=어머니 뜻이야. 성직자 길이 어렵다는 건 알지만 어머니가 불쑥 말씀을 꺼낼 때  왠지 거부감이 안들었어. 마치 오래전 부터 준비해온 것같은 생각이 들더라.

(재명이는 걸음을 멈추고 동욱이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말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는다. 동욱이의 멋적은 웃음, 동욱이가 먼저 노래를 부른다. 이어서 세사람 모두 함께 따라 부른다. 지나는 사람들이 힐긋힐끗 바라보고, 미장원 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자가 얼굴을 내민다) -디졸브-

#씬55 (봄, 서울 대학 캠퍼스)
새학기. 학생들로 붐비는 캠퍼스. 강의가 긑나는 벨이 울리자 강의실 건물 밖으로 나오는 성만. 점차 학생들이 많아지자, 갑자기 한 학생이 반종부 구호를 외면서 유인물을 뿌리며 지나간다. 땅에 떨어진 유인물을 한장 집어들고 읽어보는 성만.

#씬56 (강의실 복도)
한 학생이 복도에서 벽에 기댄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잠시 후 강의가 끝나자 성만이가 뒷문으로 나온다. 복도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학생은 담배 꽁초를 창문 밖으로 던지며 성만이 앞에 다가선다.

학생=자네가 임성만인가?

성만=누군데요?

학생=(몸을 움추리며) 전주신흥학교 나왔지?

성만=그런데요?

학생=그렇게 눈치볼 필요 없어. 니 고등학교 선배니까.

성만=아, 제 동창한테 말씀 들었어요. 영문과 선배 한분 있다고.

학생=(손을 내밀며) 바로 나다. 이영찬이라고 한다.

(눈매가 날카롭다. 내민 그의 손은 막노동꾼 처럼 딱딱하다)

학생=밖에 나가서 얘기 좀할까?

(이영찬은 앞서서 걸어 나간다)

#씬57 (다방)
자욱한 담배연기. 시그럽게 떠드는 소리. 학생들로 북적댄다. 송창식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 구석진 곳. 서너명이 앉아 있다.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이 눈에 띈다.

영찬=자, 인사하지. 내 공등학교 후배 임성만.

(시선이 일제히 성만이에게 쏠린다. 멋적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 하는 성만)

영찬=이 친구는 박대순, 윤흠재, 최경식, 그리고 우리의 호프 최영미.

(최영미가 손을내민다)

영미=우리 친하게 지내자?

대순=벌써 눈이 맞은 거야?

경식=쓸데없는 소리 집어치고 박수로 환영해야지.

(박수 소리가 들리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다. 영미는 옆자리로 옮기며 자리를 비워준다)

영찬=이 친구는 앞으로 우리와 함께 의로운 싸움의 선봉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자, 새동지의 다짐을 들어봅시다.

(시선이 다시 성만이에게 쏠린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머뭇거린다)

성만=저, 전 아직 신입생이라....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디요.

(영미는 그의 사투리를 듣고 끽끽 웃는다. 성만이는 금새 얼굴이 빨개지고)

#씬58 (늦은 밤 지하실)
청정에 매달려 있는 백열전등 불빛아래 등사기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구겨진 종이, 그리고 이영찬 일행이 부산하게 유인물을 만들이고 있다.

이영찬=(유인물 한묶음씩 건네주며) 성만이 너는 문리대와 도서관을 맡아라. 될 수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눈에 띄게 뿌려놓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좀심해?

영미=형! 아직 성만이는 신입생이잖아, 이런 일을 맡기면 어떡해?

영찬=(성만이를 바라보며) 너 자신 없으면 이리 줘.

성만=괜찮아요. 이런 일은 할 수 있어요.

(성만이는 유인물을 옷 속에 감추고 지하실을 빠져 나온다) -디졸브-

#씬59 (교회)
뜰에 유년부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상숙이는 아이들을 이끌고 정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씬60 (정문 앞)
아이들이 보내고 몸을 돌리는 순간, 재명이와 마주친다. 상숙이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 앞을 비껴간다.

재명=상숙씨!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는 상숙)

재명=(그녀 등뒤로 다가서며) 매주 교회에 나오면서도 오랫만에 뵙는군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명이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상숙=미안해요. 사실 몇차례 보고도 나도 모르게 그냥 지나갔어요. 일부러 피한건 아니예요.

재명=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전 옛날 일은 다 잊었거든요.

상숙=(고개를 들고) 고마워요. 재명씨 밝은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이네요.

재명=학교는 재미있어요?

상숙=그저 그래요. 성만씨랑 동욱씨 요즘 어떻게 지네는지 궁금하네요.

재명=벌써 5월이니까, 못본지 두 달쯤 됐군요. 병룡이는 못봤어요?

상숙=너무 자주 봐서 지겨울 정도예요.

(그 때 상숙이 친구가 교회 문으로 들어선다)

상숙=저 먼저 들어갈께요.

(상숙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재명, 뒤에서 병룡이가 어깨를 툭 친다)

병룡=야, 임마! 예배시간이 다됐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어?

재명=응, 지금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병룡=너 요즘 통 안보이던데, 뭐하고 지내냐?

재명=(싱겁게 웃으며) ROTC가 한가하냐?

병룡=그렇다고 교회도 빼먹어? 일요일에도 훈련받냐?

재명=왜, 내가 없으니까 심심하디?

#씬61 (강의실)
창가에 앉아 있는 성만. 교수 강의를 듣지않고 밖깥만 바라보고 있다.

#씬62 (같은 시간 복도)
복도 끝, 영미는 강의실마다 기웃거리며 다급히 걸어온다. 그녀 뒤에 건장한 두남자가 뒤따라 온다. 영미의 얼굴에는 눈물로 범벅돼 있다.

#씬63 (다시 강의실)
다급히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일제히 시선이 복도쪽으로 쏠린다. 강의는 중단되고 성만이는 뒷문으로 뛰어 간다.

영미=빨리 도망쳐!

(성만, 복도 끝을 바라본다. 달려오는 두 형사. 영미 손을 붙잡고 몸을 피하는 순간 어느 새 성만이 팔을 뒤에서 움켜잡는 형사. 복도로 쏱아져 나온 학생들두 팔을 뒤로 꺾인채 끌려가는 성만이를 바라만 보고 있다. 영미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 앉아 운다)

#씬64 (건물 밖)
성만이를 태우고 서서히 캠퍼스를 빠져나가는 검은 승용차.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는 학생들. 바람이 불자 벚꽃 잎이 허공에 휘날린다.

#씬65 (경찰서 취조실)
책상 위로 길게 늘어졌는 백열전등. 훌적이며 자술서를 쓰고 있는 성만. 여기 저기 멍든 자욱과 퉁퉁 부은 눈 언저리엔 금이 간 안경이 걸려 있다. 책상 위에 올려진 형사의 두 발. -디졸브-

#씬66 (해질무렵 주택가)
고개를 숙인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하숙집을 향해 걷고 있는 성만. 하숙집 앞, 가로등 밑에 영미가 서있다.

영미=고생 많이 했지?

(성만이는 담벽에 등을 기대고 가로등을 바라본다. 벌써 어두워진 하늘 가로등에  불이 켜있다)

성만=영찬이 형 소식은 있었나요?

영미=(고개를 덜구며) 2년정도 징역살거래.

성만=그럼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거죠.

영미=미안해, 고생시켜서. 우리 일에 끌어들이지 말아야 했는데...

성만=누군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영미=학교엔 왜 안나와? 시골에 내려간 줄 알았어.

성만=저 군대가기로 했어요.

영미=그게 무슨 말이야? 왜 군대가?

성만=군입대 하기로 각서 쓰고 풀려 나왔거든요. 곧 입영통지서가 나올거래요.

(영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짤막하게 )

영미=몸조심해.

(어둠 속에 점점 사라져 가는 영미의 뒷모습)-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재수 끝에 들어간 나의 대학생활은 이렇게 3개월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 때 군입대는 어쩌면 유신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나의 짧은 대학생활에서 맛보았던 좌절과 절망감으로 부터 유일한 도피처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디졸브-

병룡=네명 중에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이 너하고 나밖에 더 있냐? 대학부에 자주 나와. 너 상숙이 때문에 그러는 거 아녀?

재명=쓸데없는 소리. 오늘 나왔잖어.

병룡=그 자식 한번 해보는 소리같고 성내긴. 빨리 들어가자. 예배 시작했겠다.

#씬67 (산 중턱)
가파른 산능선. 은찬과 성만이가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씬68 (정상)
맨 먼저 은찬모습이 보이고 곧 이어 성만이가 가쁜 숨을 쉬며  올라온다. 은찬은 어깨에 멘 망태를 내려 놓고 바위 위에 앉는다. 멀리 산 아래 저수지와 마을 이 보이고 구불구불한 신작로에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은찬=언제 입대하냐?

성만=(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다음 주 월요일.

은찬=나도 내년에 또 서울대 낙방하면 곧바로 입대가 보다.

성만=절에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냐?

은찬=예비고사 볼 때까지만.

성만=이 절에만 벌써 2년째 아니냐?

은찬=집 형편도 그렇고 또 절에 있으니까 맘도 편하고, 그럭저럭 지낼만해. 너는 쓸데없이 공부나 할 일이지 운동권에는 왜 들어갔냐?

성만=나도 몰라. 희망이 없는 것 같았어. 병렬이 말처럼 그냥, 대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어.

(은찬은 말이 없다. 그리고 다시 망태를 어깨에 둘러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은찬=다음 산봉우리 넘어갈려면 서둘러야 겠다. -디졸브-

#씬69 (9월 비포장 신작로)
가파른 산밑. 포풀러 가로수 사이 길게 뻗어 있는 신작로에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군용트럭 한대가 질주한다.

#씬70 (부대 앞)
하늘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안테나가 눈에 들어온다. 정문에서 검문을 마친 트럭.부대 안으로 들어간다.

#씬71 (본부 앞)
트럭이 멈추고 하사관 한사람이 앞좌석에서 먼저 내린다.

하사관=모두 하차!

(트럭 뒤에 탄 신병들이 하나둘씩 뛰어 내린다)

하사관=동작 봐라. 4열 종대!

(각기 더불백을 어깨에 매고 열지어 부동자세를 취하는 신병들. 잠시 후 중대장이 본부막사에서 나오자 신고식이 시작된다)

#씬72 (내무반)
취침시간. 성만이는 생각에 잠겨 몸을 뒤척인다.

#씬73 (전주 시가)
이른 새벽, 병룡이는 자전거를 타고 안개가 자욱한 한적한 도로 위를 달린다. 몇라례 네거를 지나 한옥 주택가로 들어 선다.

#씬74 (골목길 앞)
상숙이가 시계를 보며 서있다. 잠시 후 안개 속에 병룡이 모습이 보인다.

병룡=오래 기다렸어?

상숙=(뒤에 올라타며) 학교 늦겠다.

병룡=안개 때문에 좀 늦게 일어났어.

#씬75 (전주천 뚝 길)
활짝 핀 코스모스 꽂. 그 사이로 병룡이는 상숙이를 태우고 달린다.

병룡=참, 어제 동욱이 한테 편지 왔다.

상숙=뭐라고 써있어요?

병룡=별 얘기 없고 니 안부가 궁굼하단다.

상숙=(시무룩한 표정) 그 것밖에 없단말예요?

병룡=같은 교회에 다니는 여학생 얘기도 써있어.

상숙=어떤 여자?

병룡=음대생이래. 성가대에서 만났단다.

상숙=언제 쯤 전주에 내려온다는 얘긴 없어요?

병룡=만나고 싶어서?

상숙=(말이 없다)

#씬76 (캠퍼스 가정대 건물 앞)
자전거에서 내리는 상숙.

병룡=이따가 강의 끝나는 사간 맞춰서 이리로 올께.

상숙=아냐, 오늘은 그냥 먼저 가요. 내일 아침, 다시 그곳에서 기다릴께요.

#씬77 (교외)
멀리 들판이 보이는 한적한 시골길. 상숙이와 병룡이가 나란히 걷고 있다.

병룡=요즘 왜 그렇게 시무룩해?

상숙=모르겠어요, 계절 탓인가봐요.

병룡=동욱이 때문이야?

(걸음을 멈추고 풀밭에 안는 상숙. 그옆에 병룡이도 앉는다. 잠시 아무 말없이 먼 들녘만 바라보던 상숙, 병욜이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상숙=벌써 잊은지 오래됐어요. 한동안 동욱씨와 재명씨 생각에 가슴앓이만 할 땐 정말견디기 어려웠지만...병룡씨 아니였으면 난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을꺼예요. 병룡씨! 나 지켜줄 거죠?

(병룡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상숙) -디졸브-

#씬78 (산능선)
몇몇 사병들과 함께 성만이는 무선 통신 장비를 들고 산능선을 따라 산정상에 있는 통신기지로 향한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딴다. 걸을 때마다 어깨에 맨 소총이 무선기에 부딪쳐 덜거덕거린다.

#씬79 (부대 상황실)
긴급 전문이 사령부로 부터 떨어진다. 전문을 받아 본 장교. 얼굴이 굳어진다.

#씬80 (연병장)
비상벨이 길게 울린다. 내무반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병들.

#씬81 (다시 상황실)
기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각 부대에 비상사태를 알리는 긴박한 목소리, 계속 두들겨대는 무선기 소음, 상황을 알리는 전문이 숨가쁘게 떨어진다.

#씬82 (내무반)
군장을 다 꾸린 사병들. 내무반 침상에 걸터 앉아 웅성거린다.

사병1=조용히 하거라! 이 짜식들아! 니들 지금 무슨 비상인지 알기나 하냐? 데프콘 투야.데프콘 투가 뭔지 아나? 지금 전방에선 적하고 교전 중이이라는 거야, 이 짜식들아! 우린 지금 지원 사단 따라 전투 현장으로 출동해야 한단 말이야.

(순간 조용해진다. 그 때 중대장이 선임하사와 함께 들어온다)

중대장=잘 들어라! 어제 북괴군이 판문점에서 작업중이던 미군을 습격,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미국과 우리 정부는 이를 북괴의 전쟁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현재 미군 항공모한이 원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현재 시각, 적군은 동부전선을 공격, 아군과 교전중이다. 우리 부대도 전투 사단 통신지원을 위해 함께 전방으로 출동한다. 지금 선임하사가 나눠주는 종이에 각자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편지를 쓰고 곧바로 차에 탑승한다 이상 끝.

(하얀 백지를 받아든 성만. 주위를 둘러본다. 모두 말없이 침상에 종이를 올려놓고 편지를 쓰는 볼펜 소리만 들린다)

#씬83 (연병장)
사병들이 빠른 동작으로 트럭에 탑승하고 전투부대는 벌써 정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성만이는 다른 사병들과 함께 통신장비를 트럭에 싣는 작업에 투입된다. 어수선한 연병장.

#씬84 (산길)
성만이는 통신 장비를 등에 매고 다른 사병들과 산능선을 따라 정상에 있는 통신기지로 이동하고 있다.

#씬85 (산 정상 통신기지)
통신시설을 설치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병들. 성만이는 멀리 첩첩 이어져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고추잠자리가 한가하게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고참 사병이 철모를 손에 들고 기지안에서 다가온다.

사병2=제기럴, 비상대기 하란다.

사병3=그럼, 벌써 전쟁이 끝났다나?

사병2=낸들 아냐, 아뭏든 비상대기라니까 우리 소대는 여기서 당분간 있을 예정이란다.

사병4=지기럴! 전쟁이 터질라몬 팍 터질쁘지, 지금 아들 데리고 장난하나.

#씬86 (무선통신실)
통신장비를 고치고 있는 성만.

사병5=임일병! 자대에서 전화다. 오병장 같은데 받아봐라.

성만=여보세요? 오병장님이세요? 어머니가 오셨다구요? 지금 비상중인데...그럼, 산 밑으로 내려가 기다릴께요.

사병5=이런 때에 면회오냐. 너 첫 면회 오는 거지? 드럽게 운이 없구나. 야, 빨리 가봐라. 야! 너 저녁에 들어 올거지?

#씬87 (산 밑 신작로)
잠시 후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다. 버스에서 내려오는 성만이 어머니와 누나 성숙. 누나는 배가 불러 있다. 어머니는 성만이를 껴안고 눈물을 글썽인다.

성숙=엄마! 울긴 왜 울어. 이렇게 잘있는데.

어머니=이런 첩첩 산중에서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냐. 산 하나씩 넘어 올 때마다 가심이 철렁철렁했다. 지금 비상중이라며?

성만=곧 풀릴 거예요.

어머니=면회가 안된다고 혀서 사정했다. 어디가서 이것 좀 먹거라.

(어머니는 길건너 논둑길을 따라 쉬말한 곳을 찾아간다)

#씬88 (논둑 나무 밑)

성만=누난 이런 몸으로 힘들었지?

성숙=엄마가 하도 졸라대서 어쩔 수 없이 왔다. 니 군대가고 날마다 니 생각 때문에 눈물로 세월 보낸단다.

(성만이는 어머니가 가져온 닭고기를 한점 손에 들고 먹는다. 어머니는 옆에서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더 먹일려고 계속 고기를 손에 쥐어준다. 벌써 산 위에 해가 걸려있다. 눈둑길에 핀 들국화가 바람에 흔들린다)

성만=어머니 어둡기 전에 들어가 봐야 돼요.

(어머니는 훌쩍이며 성만이 손을 붙잡고 놓질 안는다)

성숙=엄마! 지금 들어가야한대.

(그때서야 손을 놓고 발길을 옮긴다. 논둑길 위로 점점 멀어지는 어머니. 성만이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지켜본다. 멀리서 다가 오는 버스가 보이고 어머니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그날 내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치 들국화처럼 청초한 모습으로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찾아왔던 어머니는 가을, 이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식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암으로 드러누운 후 다음해 봄 4월, 한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디졸브-

#씬89 (방안)
잔득 화난 얼굴로 무릎꿇고 앉아 있는 병룡이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이젠, 니도 어린 얘가 아니다. 곧 장가갈 나이여! 근디 이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근본도 모르는 계집허고 싸다녀?

병룡=그게 아니고...

아버지=(언성을 높혀) 아니긴 뭐가 아녀? 니 동생 희숙이한테 들었다. 애비없이 홀어머니 밒에서 자랐다고 하드라. 아무리 내 자식이 못나기로서니, 애비없는 자식은 절대로 안된다. 긍께 이후론 다신 만나질 말거라!

#씬90 (교회)
아무도 없는 뜰. 벤취 위에 병룡이와 상숙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상숙=아버님한테 야단 맞았다면서요?

병룡=누가 그런 소릴혀?

상숙=(자리에서 일서며) 희숙이가 말해줬어요. 병룡씨와 안만나는 것이 좋다고.

병룡=괜한 소리여. 신경쓰지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상숙. 병룡이는 그녀에게 다가서서 손을 잡는다. 고개를 들고 병룡이를 바라보는 상숙이 눈빛. 눈망울이 맺혀있다)

#씬91 (산소 옆)
군복을 입은 성만. 어머니 산소 옆에 앉아 소주를 들이키고 있다.

#씬92 (다가공원)
멀리 전주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성만=어제 내가 많 취했지?

재명=니가 술취한 모습, 첨봤다.

성만=헛소리 안하든?

재명=그냥 꼬꾸라지더라. 언제 귀대하냐?

성만=내일. 병룡이는 자주 만나냐?

재명=안본지 오래됐다.

성만=왜? 요즘 교회에 안나가냐?

재명=모르겠다. 왠지 가기가 싫어.

성만=너 아직도 상숙이 생각하고 있냐?

재명=다른 여학생을 사귀어 보려해도 ...마음에 안들어온다.

성만=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그림자 처럼 따라다녀.

(성만이는 고개를 들어 멀리 마주 보이는 기린봉을 바라본다. 재명이는 몸을 앞으로 숙인채 전주시가만을 바라본다) -디졸브-

#씬93 (덕진공원 호수 앞 벤취)
상숙이는 말이없다. 고개를 떨구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병룡. 상숙이가 일어선다. 그리고 앞만 보고 발걸음을 옮긴다. 벌떡 일어나 그녀 앞을 가로막는 병룡. 상숙이는 몸을 비켜간다. 다시 가로 막는 병룡. 몇차례 반복한다. 끝내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상숙.

#씬94 (다방)
한쪽 구석. 병룡이가 앉아 있다. 계속 담배를 피워 물고 물끄러미 어항 고기를 바라본다. 얼마 후 문을 열고 재명이가 들어온다.

재명=여기서 웬 청승을 떨고 있어?

병룡=(천천히 고개를 들고) 언제 왔냐?

재명=방금. 대체 할 얘기가 뭐야.

병룡=(담배를 길게 내뿜으며) 나, 상숙이하고 결혼할란다.

재명=(어처구니 없다는 표정)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병룡=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다. 너한텐 정말 미안하지만.... 일이 그렇게 됐다.

재명=(뚫어지게 바라본다) 차근 차근 얘기 해봐.

병룡=언젠간 너에게 말할고 했는데, 갑자기 널 불러내 이런 얘기한다는게...부끄럽다.

재명=괜찮아, 상숙이 얘긴.

병룡=믿기지 않겠지만 나 역시 상숙일 좋아했다. 동욱이하고 사귀고 있는 것도 알았고. 또 너마저 상숙일 좋아혀서 난 그냥....가만히 있었지.

재명=둘이 만나는 것 알고 있었다. 교회에 안나가는 것도 니 둘이 불편해 할까봐 그랬다.

병룡=상숙인 오랫동안 괴로와 했다. 홀로 남게 된 상숙이가 늘 맘에 걸려서 용기를 내 마음을 털어놨다.

재명=나한텐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난 이미 잊은지 오래니까. 아직 졸업이 까마득한데 갑자기 결혼은?

병룡=집에서 상숙일 만나는 걸 반대하고 있어. 상숙이가 서로를 위해 헤어지제.

재명=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해?

병룡=나도 모르겠다. 그저 일을 저지르고 싶을 뿐이야.

(병룡이는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가만히 일어서는 재명) -디졸브-

#씬95 (골목길)
담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병룡. 날이 어두워 지자 상숙이가 멀리서 걸어온다. 상숙이는 병룡이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친다. 병룡이는 뒤에서 그녀 팔을 붙잡는다.

상숙=(몸을 획 돌리며) 대체 왜 그래요? 저 좀 제발 그냥 놔주요. 더 이상 못견디겠어요.

(담벽에 얼굴을 돌리고 울음을 터드린다. 그녀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 병룡)

병룡=난 너없인 살수 없어. 우리 아버진 완고한 성격이지만 결국 승락할꺼야. 그 때까지만 참아줘.

상숙=(고개를 들고) 전 이제 지쳤어요. 정말 아무도 만나고 싶지않단 말이예요.  병룡씨와 만난 것 후해안해요. 허지만 우린 서로를 위해 안만나는 것이 좋아요.

(그때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어머니=상숙이냐?

(상숙이는 얼른 눈물을 닦고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힘없이 발길을 돌리는 병룡)

#씬96 (대문 앞)
잔뜩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병룡. 대문에 기대 땅바닥에 쓰러진다. 온 집식구가 밖으로 뛰쳐나온다.

#씬97 (집 마당)
방문을 열고 막내 등에 엎혀 들어오는 병룡이를 바라보고 혀를 차는 아버지. 곧 문을 닫는 소리. 마루에 드러눕힌 병룡. 계속 헛소리를 한다.

병룡=어머니, 나 상숙이하고 결혼 할래요. 집안이 그렇게 중요해요?

어머니=(걱정스런 표정으로) 아이그, 이놈의 자식, 왜 이렇게 내 속을 뒤집어 놓는디야. 얘야, 어서 방에다 눕혀라.

#씬98 (방안)
깜깜한 어둠 속에 책상에 엎드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숙. 방문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지 그림자가 비친다. -디졸브-

#씬99 (겨울 눈내리는 산길)
함박눈이 쏱아지는 오후 구불구불한 산길에 군용트럭이 달리고 있다. 성만이는 호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낸다. 편지를 읽으며 점점 표정이 굳어가고 힘없이 편지를 떨어뜨린다. 고개를 들어 눈이 쏱아져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성만. 편지는 바람에 허공에 휘날려 멀리 사라진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상숙이는 그 해 늦가을 방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가 마직막 책상 위에 남긴 편지에는 자유롭고 싶다는 말과 우리 네명의 우정을 당부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재명이에게 미안하다는 글을 적어 놓았다. 학처럼 청순했던 그녀는 사랑의 갈등 속에서 늘 고뇌와 외로움에 젖어 그렇게 속절 없이 우리 네사람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디졸브-

#씬100 (11월 저녁 무렵 시골 아스팔트길)
버스가 멈추고 제대복을 입은 성만이가 내린다. 길거너 맞은 편에 넓은 저수지가 보이고 그 아래 길이 꺾어지는 곳에 마을이 보인다. 멀리서 성만이 막내 남동생이 달려와 껴안는다.

#씬101 (캠퍼스 건물 앞)
낙옆이 벤취 위에 수북히 쌓여있다. 성만이는 두 팔을 벤취 등받이 위에 올려놓고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한참 후 벨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재명이가 뛰어 온다.

재명=언제 제대했냐?

성만=보름쯤.

(재명이는 성만이 옆에 앉는다)

재명=병룡이는 만나봤냐?

성만=아니, 아직. 너가 보내 준 편지 잘 받아봤다.

재명=(말이 없다)

성만=병룡이는 어떻게 지내냐?

재명=휴학했단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못본지 오래 됐으니까.

성만=동욱이는?

재명=그 후로 동욱이는 꼬박 꼬박 토요일엔 내려와서 다음 날 예배드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성만=편지 받아보고 한동안 잠도 못잤다.

재명=상숙인  참 좋은 여자였는데... 그 때 이슬비 내리는 날, 편지를 주지 말아야 했어.

성만=후회돼냐? 후회는 잘못이 있다는 뜻이겠지.

재명=(천천히 고개를 들며 성만이 얼굴을 바라본다) 정말 그럴까? 난 영원히 다른 여잘 사랑하지 못할꺼야.

(두 사람 시선이 마주친다 성만이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는다) -디졸브-

#씬102 (교회 뜰)
나무 위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예배당에서 성가대 찬양소리가 울려 나온다.

#씬103 (예배당)
성가대 속에 동욱이와 성만. 그리고 재명이 모습이 보인다.

#씬104 (고등부 예배실)
벤취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사람.

#씬105 (밖)
눈 쌓인 벤취 위에 앉아있는 병룡. 수염을 깍지 않은 초췌한 얼굴. 동욱이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세사람의 화음이 흘러나온다.  병룡이는 몸을 일으켜 고등부실로 다가간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안쪽을 바라본다.

#씬106 (다방)
책을 펴들고 앉아 있는 성만.

해숙=어머, 오빠!

성만=(반가운 표정으로) 정말 오랬만이구나. 잘 지냈냐?

해숙=그동안 왜 소식 한번 없었어?

성만=바쁘게 사니까. 니 오빠는 잘 있냐?

해숙=요즘 연애하기 바빠. 누구 만나기로 한거야? 여자면 딴 곳에 갈께?

성만=아냐, 친구 만나기로 했어. 앉아도 돼.

(카운터에서 해숙이를 찾는다)

해숙=어머, 누구한테 전화 온거지?

(잠시 후 )

성만=이 곳에 까지 널 찾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재미 좋은가 보구나.

해숙=은행에 다니는 친구야. 집에서 없다고 하길래 혹시나 하고 이곳에 전화한거래. 오빠. 여자 친구 있어?

성만=그건 왜 물어?

해숙=내 친구 소개시켜 줄려고.

성만=고맙다. 신경써줘서.

해숙=괜찮은 애야.

(성만이는 시계를 보며 출입구를 바라본다)

해숙=만나기로 한 사람이 누구야?

성만=의대 다니는 친구.

해숙=병룡이 오빠?

성만=그래. 이 짜식, 지금 시간이 몇시데 여태 안와.

(해숙이 뒤에 검은 외투를 입고 회색 목도리를 걸친 여자가 다가온다. 성만이를 힐끗 바라보며)

은숙=해숙아! 나 왔다.

해숙=어머, 이 기집애 이 근처에 있었던거야?

은숙=응, 바로 길건너 꽃집.(다시 성만이를 바라보며) 데이트 중이구나. 그냥 갈께.

해숙=(손을 잡아 끌며) 오빠친구야. 여기서 우연히 만났어. 여기 앉아. 괜찮아.

(마지못해 해숙이 옆자리에 앉는다)

해숙=오빠, 여기 좀 봐. 아까 말한 은행에 다니는 내친구, 김은숙.

(얼굴을 붉히며 가볍게 목례를 한다)

은숙=너, 내 얘기 했어?

해숙=응, 너 소개시켜줄려구.

(문앞에서 한 남자가 해숙이를 향해 손을 들어보인다. 해숙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숙=은숙아! 얘기 잘나눠.

은숙=(당황스러운 표정) 어머, 그냥 가면 어떡해!

(해숙이는 그 남자와 밖으로 나가버린다. 은숙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성만=해숙이 하곤 친한가 보죠?

은숙=(고개를 들고) 고등학교 동창이예요. 근데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나 보죠?

성만=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여태 안나타나는군요.

은숙=(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성만=언제 올지 모르는 친구예요.

은숙=(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럼, 친구 분 올 때까지만 앉아 있을께요.

성만=연말이라 바쁘지 않으세요?

은숙=조금요. 친구 분이 약속을 잘 안지키는가 보죠?

성만=글세요. 이따 집에 전화해보죠.

은숙=(시계를 드려다 본다) 전 이만 가볼께요.

성만=저도 같이 일어나지요.

#씬107 (밖깥)
조금씩 눈가루가 내린다. 둘은 말없이 가로등 불빛 따라 인도로 걷는다.

성만=눈이 많이 올것 같지요?

은숙=올해는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아요.

성만=눈을 좋아하세요?

은숙=추위를 많이 타서 싫어해요. 이젠 돌아가보세요.

성만=처음이지만, 괜찮다면 집까지 바래다 드릴께요.

은숙=여기서 조금 멀어요.

성만=모처럼 데이트데 함께 걷죠.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 점점 많아진다.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이르자 은숙이는 걸음을 멈춘다)

은숙=다 왔어요. (과수원쪽을 가르키며) 제집은 저기 과수원 안에 있어요.

성만=과수원 하나보죠?

은숙=지금은 다른 사람이 주인이예요. 그럼 조심해서 잘가요.

(인사를 마치고 막 돌아서는 은숙. 성만이는 그녀 뒤에 대고 큰소리로 말한다)

성만=어디서 근무하죠?

은숙=(뒤를 돌아서서) 전북은행 덕진지점이예요.

(어둠 속에 사라지는 은숙. 성만이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사라질 때가지 서있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그 날 난 처음 그녀에게 내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난 늦은 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나는 운명같은 사랑을 그녀의 마음으로 부터 훔쳐가는 기분이었다.-디졸브-

#씬108 (군산 앞바다)
장항으로 향하는 여객선. 갑판 위에 찬바람을 맞으며 황색 물살을 바라보고 있는 네사람. 병룡이는 바닥에 주저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다.

성만=(재명이 옆에 다가서서) 예전에 니가 나에게 한 말 기억하냐?

재명=무슨 얘기?

성만=진실을 더럽힌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고 말이야.

재명=난, 그 것을 지키기 위해 대학 4년을 외롭게 보냈어. 상숙인 그런 나 때문에 늘 괴로워 했던거야.

#씬109 (바닷가 저녁 무렵)
바다 위에 붉게 물든 저녁 노을. 방파제 위에 걸터 앉아 무심코 먼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씬110 (어둔 해변가)
술취한 병룡이는 동욱이 부축을 받으며 앞서 걸어간다. 재명이는 발목까지 물에 잠기는 곳까지 걸어들어가 검푸른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다. 성만이는 재명이 팔을 잡아 끈다.

재명=난 여기서 술좀 깨면 들어갈께.

성만=그래, 그래, 바람이 차니까 금방 들어와라.

(재명이는 모래 위에 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문다. 멀리 해변가 여관 간판 불빛이 보이는 곳.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세사람을 바라본다. 검푸른 바닷물이 벌써 앉아 있는 곳까지 밀려온다. 재명이는 호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든다. 그리고 한 모금씩 들이키고, 빈병을 멀리 바다물 속으로 던진다. 잠시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발 한발 검푸른 바닷물 속으로 걸어 간다. 점점 높아지는 파도가 그의 몸을 뒤덮고, 어둠 속에 사라져 간다)

#씬111 (여관 방)
잠에서 깨어난 성만. 물주전을 찾아 물을 들이키고 방안을 둘러본다. 재명이가 보이지않는다. 성만이는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본다. 멀리 불켜진 어선이 보인다. 찬바람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동욱.

동욱=야! 잠안자고 뭐해?

성만=재명이가 안보여!

동욱=같이 안들어 왔어?

성만=바람 좀 쐬고 들어온다고 했는데, 지금 몇시야?

동욱=4시가 조금 넘었다.

성만=(급히 웃옷을 걸치고) 병룡이 깨워, 나먼저 나갈 볼테니까 둘이서 찾아봐.

#씬112 (바닷가)
재명이를 부르는 목소리.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파도소리에 묻혀간다. 얼마 후 지친 세사람, 모래 위에 주저 앉고, 해변가에 횃불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굴을 두다리 위에 파묻고 앉아있는 성만. 병룡이는 모래 위에 드러누워 있고 동욱이는 검푸른 바닷물만 바라보고 있다.

#씬113 (먼동 튼 바닷가)
동욱이가 성만이를 흔든다.

동욱=저쪽에 사람들이 몰려있어!

(그가 손으로 가르키는 곳에 경찰도 눈에 띈다. 달려가는 세사람. 삥둘러 있는 사람들 사이, 거적으로 덮여있는 재명)

#씬114 (기차안)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병룡. 그 옆에 침울한 표정으로 구슬픈 노래가락을 흥얼거린다. 열차 맨 끝에 서서 뒤로 멀어져가는 철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 재명이는 그날 밤, 끝내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뒀던 상숙이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친구의 우정을 생각하며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야 했던 그의 젊은 시절. 허망하게 마감한 짧은 생애는 남아 있는 세사람에게 오랫토록 긴 슬픔을 남겨주었다. -디졸브-

#씬115 (80년 봄 서울 캠퍼스)
매일 열리는 시위집회로 어수선한 분위다. 도서관 건물을 나서는 성만. 시위대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최영미가 미소를 띠고 서있다.

영미=다시 보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성만=여긴... 어인 일로 왔어요?

영미=졸업하고 2년 쉬었다가. 지금 대학원 다니고 있어. 내년 쯤 유학갈려구.

성만=만나서 반가와요. 영찬이 형 소식이 궁금한데요?

영미=제적됐어. 지금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강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린다)

성만=강의 시간이예요. 들어가 볼께요.

(영미는 성만이가 보이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디졸브-

#씬116 (전주 중심가 거리 오후)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가로수에 등을 기대 담배를 피워문다. 잠시 후 맞은 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은숙.

은숙=많이 기다렸어? 나 배고파, 우리 맛있는 것 먹자.

성만=아직 저녁이 될려면 멀었잖아.

은숙=나, 자기 만날려구 점심도 안먹고 일했단 말이야.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걷는다)

#씬117 (밤거리)
나란히 걷는 성만이와 은숙.

은숙=서울 학생들은 맨날 데모만 하나보지?

성만=시국이 어수선하니까.

은숙=친구 병룡씨가 시위 주동했다고 잡혀갔대.

성만=알고 있어.

은숙=그런 일엔 끼어들지마.

(성만이는 아무 말없이 발길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본다)

#씬118 (가을 아침 보험회사)
문을 빠곰히 열고 얼굴을 내미는 은숙. 한 여직원에게 다가간다.

은숙=이 대리님이 어떤 분이세요?

여직원=아직 출근 안했어요. 저기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오실거예요.

(은숙은 이 대리 책상 옆에 놓인 소파에 다소곳이 앉는다. 책상 위에 이상철이란 명패를 바라본다. 그 때 뒤에서 묵직한 남자목소리. 은숙은 깜짝 놀란다)

은숙=어머, 이대리님이세요?

이상철=(시선을 떼지않고 자리에 앉으며) 그렇습니다만...

은숙=(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며) 어머니가 몸이 좀 안좋아서 제가 대신 가져왔어요.

이상철=어머님 성함이...

은숙=윤흥순씨예요.

이상철=아, 윤여사님 따님이시군요. 뵙고보니 정말 자랑하실만 하네요.

은숙=(얼굴을 붉히며) 그럼, 이만.

이상철=아, 잠깐, 커피라도 드시고 가셔야지요.

은숙=아, 아녜요. 출근 시간이 늦었어요.

이상철=참, 전북은행 덕진지점에 다니신다죠?

(은숙이는 대꾸도 안하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상철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은숙이 모습을 지켜본다)

#씬119 (카페)
은숙이와 해숙이가 커피를 마시며 마주앉아 있다. 은숙이 표정이 밝지않다.

해숙=성만이 오빠한테 아직 소식없어?

은숙=(힘없이) 응.

해숙=어쩌다 그렇게 힘든 사랑에 빠졌냐. 근데 오늘 왜 청승이야?

은숙=(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무 것도 아냐. 나 이만 가볼께.

해숙=어머, 얘좀 봐라.

#씬120 (과수원 입구)
핸드백을 길게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군채 힘없이 걸어오는 은숙. 남자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이상철=이제 오시는군요. 오늘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 할줄 알고 집에 왔다가 하도 안오실길래 지금 막 가는 중입니다.

은숙=(어처구니 없다는표정) 좀 더 늦게올걸 그랬네요.

(은숙이는 그 앞을  빨른 걸음으로 비켜간다. 그의 뒷모습을 야릇한 미소를 띠며 바라보는 이상철) -디졸브-

#씬121 (서울 하숙집 저녁 무렵)
양옥집 이층 베란다 앞. 멀리 점점 어두어 지고있는 관악산을 바라보며 은숙이는 성만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다.

은숙=나, 요즘 힘들어 죽겠어.

성만=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거야?

은숙=아니, 자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너무 외롭단 말이야.

성만=그래도 자주 은행으로 전화하잖아.

은숙=(한숨을 내쉬며) 어머니 다니는 회사 사람이 자꾸 치근거려서 미치겠어.

성만=그냥 무시하면 되잖어.

은숙=우리 엄마까지 거들고 있단말이야.

성만=내가 시간내서 너희 엄마 찾아뵐까?

은숙=벌써 알고 있어. 내가 말했줬어.

(침묵이 흐른다. 성만이는 팔을 들어 은숙이를 어깨을 감싸안는다. 어둠이 가리고 시가지 불빛이 보인다)

#씬122 (은행 퇴근시간)
은숙이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핸드백을 챙겨든다

은숙=(옆 동료에게 귀에 대고) 미숙아, 나 먼저 갈께.

미숙=얘, 오늘 전직원 회식있다는거 잊었어?

은숙=오늘 일찍 집에 가봐야돼. 그러니 니가 차장님에게 잘 말씀드려라.

미숙=집이 아니라 애인만나러 가는 거겠지?

#씬123 (도로)
은숙이는 시계를 보며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어 보인다. 퇴근 시간. 택시는 좀처럼 서지 않는다. 초조해지는 은숙. 그 때 검은 승용차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문이 열리고 이상철이가 모습을 나타낸다. 은숙이는 황급히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달려간다. 승용차는 다시 그녀 앞에 멈추며 이상철이 손이 그녀 팔을 억세게 움켜 잡는다.

은숙=데체 왜그래요. 이손 놓지 못해요?

이상철=왜 그러십니까? 제가 집까지 잘 모셔 드리겠습니다. 타시죠.

은숙=전 약속있어요.

이상철=(앞을 가로 막으며) 지금 애인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더더욱 안되지요.

(이상철은 말대구도 않고 돌아서가는 은숙이 팔을 붙잡고 강제로 차에 태운다. 은행 문을 나선 미숙, 멀어져 가는 승용차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씬124 (카페)
시간이 자꾸 흘러간다. 창문 밖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성만.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가고, 이내 혼자 남는다. 여점원은 문 닫을 준비를 하며 힐끗 그를 쳐다본다.

여점원=문닫을 시간이예요.

#씬125 (밖)
가로등 불빛만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 이따금 자동차가 빠른 속력으로 질주한다.

#씬126 (은행)
맨 앞창구에서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은숙. 옆에 있는 미숙이가 전화를 건네준다.

은숙=누구야?

미숙=받아봐. 서울 그 대학생 같은데?

은숙=(수화기를 받아들고 말이 없다)

성만=여보세요? 은숙이, 왜 말이 없어?

은숙=(딱딱한 목소리로) 거기 어디야?

성만=고속버스 터미널이야. 도데체 어제 어떻게 된거야?

은숙=(머뭇거리며) 미안해. 갑자기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밤샘했어. 오늘 그냥 서울로가. 내가 나중에 하숙집으로 전화 할께.

미숙=너 웬일이냐? 그 사람만 오면 빨리 못만나서 안달하더니.

#씬127 (고속버스 공중전화 박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성만.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발길을 돌려 버스에 오른다.
                                                                 

#씬128 (과수원 입구)
시내버스가 멈춰 서고 은숙이가 내린다. 활짝 핀 복사꽃.

#씬129 (집안)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은숙. 마루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는 이상철, 은숙이를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자리에 우둑 선 은숙. 그 때 부엌에서 어머니가 음식을 들고 나온다.

이상철=(웃음을 띠며) 이제 오시는 군요. 한참 기다렸습니다. 모처럼 어머님 초대로 염치불구하고 찾아 왔습니다.

(은숙이는 대꾸도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곧 뒤따라 들어온 어머니)

#씬130 (방안)
화장대 앞에  허탈한 표정으로 털석 주저 앉는 은숙. 어머니가 옆에 와 다가와 앉는다.

어머니=얘야, 오늘 토요일이라 내가 초대했다. 나한테 여간 잘해주지 않했냐. 여러 소리말고 나가서 같이 저녁이나 먹자.

은숙=저한테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요. 이렇게 불쑥 불러드리면 어떡해!

(두손을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은숙. 밖에서 이상철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는 얼른 일어나 문을열고 나간다. 고개를 들고 거울을 드려다 보는 은숙. 두빰에 눈물 자욱이 보인다)

#씬131 (은행 앞 저녁무렵)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성만. 잠시 후 은행 뒷문이 열리고 은숙이가 직원들과  함께 나온다.

미숙=어머, 저 사람, 그 서울 대학생 아니냐?

은숙=너 먼저 가.

(은숙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는 성만)

성만=계속 전화를 안받길래, 궁금해서 내려왔다.

은숙=(시선을 피하며 차갑게) 일부러 안받은거야.

성만=이유가 뭐지?

은숙=이젠 우리 그만 만나.

(돌아서는 은숙. 성만이가 막 그녀를 부르는 순간,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버린다)

#씬132 (과수원 입구 늦은 밤)
버스정류장을 바라보며 서성이는 성만. 발아래 담배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시계를 바라본 후 가로등 불빛 아래 복사꽃을 바라본다. 잠시 후 검은 승용차가 버스정류장에 멈춰서고, 은숙이가 내린다. 승용차 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은숙. 돌아서서 과수원 입구에 이르자 성만이를 바라보고 깜짝 놀란다.

성만=아까 그 사람 누구야?

은숙=(냉냉하게)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

성만=(언성을 높이며) 그걸 말이라고 해?

은숙=우리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했잖아. 왜 서울로 안올라 가고 여기서 얼쩡거리는거야?

성만=(은숙이를 쏘아보며) 그 남자, 이대리라는 자식이지?

은숙=그 사람하고 성만씨하고 무슨 상관이야? 더 묻지마. 그냥 돌아가줘.

(은숙이는 성만이 앞을 비켜간다. 팔을 붙잡는 성만)

은숙=(손을 뿌리치며) 대체, 왜 그래?

성만=얘기 좀 하자.

은숙=무슨 얘기 하자는거야?

성만=왜 그렇게 변했어? 이유가 뭐야?

은숙=(돌아서서) 이유 없어. 정 듣고 싶으면 내일 카페에서 만나. 퇴근하고 갈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거기 은숙이 왔냐?

은숙=(달려가며) 녜, 어머니 지금 들어가요.

(어둠 속에 사라져간 은숙. 곧이어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자 복사꽃이 얼굴을 스쳐간다)

#씬133 (카페)
창가에 앉아 초췌한 얼굴로 담배를 밖을 바라보고 있는 성만. 해숙이가 다가온다)

해숙=오빠!

성만=여긴 왜 온거냐?

해숙=은숙이 부탁으로 대신 왔어.

성만=은숙인?

해숙=어디 있는지 나도 몰라. 오빠! 너무 상심하지마. 은숙이...곧 결혼해.

성만=(기막힌 표정) 결혼?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해숙=농담 하는거 아냐. 은숙이가 차마 오빠한테 말할 수 없나봐. 미안해. 은숙이를 위해서 그냥 서울로 올라가.

성만=(떨리는 음성으로) 남자가... 보.. 보험회사.... 이대리라는 자냐?

해숙=(고개를 끄덕인다)

성만=그래서 그냥 서울로 떠나라는 거냐? 나, 이대로 떠날 수 없어. 어떻게 지금까지 말한마디 없이 결혼한다는 거야? 난 그 이유를 듣기전엔 절대로 안가!

(힐끗 힐끗 바라보는 주위 사람. 성만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붙잡으려다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 앉는 해숙, 난감한 표정이다)

#씬134 (거리)
사람이 붐비는 중심가. 인파 사이를 헤치며 무작정 걷는 성만.

#씬135 (은숙이 집 대문 앞)
성만이는 벽에 기대어 복사꽂을 바라보고 있다.

#씬136 (과수원 입구)
이상철이와 팔짱을 끼고 다정스럽게 걸어오는 은숙.

#씬137 (대문 앞)
성만이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고 있다. 그자리에 우둑 멈추는 은숙. 살며시 팔을 뺀다.

은숙=(차갑게) 여긴 왜왔어?

(이상철은 담배를 피워 물고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성만이는 그의 앞을 지나 은숙이에게 다가선다)

성만=(은숙이 팔을 잡아끌며) 우리 얘기좀 하자.

은숙=(손을 뿌리치며) 여기서 해.

성만=결혼한다고?

은숙=(시선을 피하며 말이 없다)

성만=우리 관계부터 정리하고 결혼하는게 순서아냐?

은숙=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해숙이한테 얘기 다들었잖아?

성만=너하고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어.

은숙=난,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제발 그냥 돌아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 은숙이 어머니가 얼굴을 내민다)

어머니=거기, 누가 왔냐?

은숙=아... 아니예요. 어머니.

(은숙이는 재빨리 어머니를 안으로 밀며 들어가버린다)

상철=우리 얘기 좀 합시다.

성만=당신, 나한테 말할 자격 없어.

상철=어차피 우린 결혼해. 우리 남자답게 깨끗히 결말 짓자구.

성만=남자답게? 당신 같은 남자로서 이럴 수  있는거야?

상철=그건 당사자 맘이지.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한 것은 아니지. 은숙씬 지금 결혼 할 나이고 당신은 아직 학생 신분이잖소. 당연한 선택이지.

성만=(화난 음성. 그의 멱살을 잡는다) 야, 임마! 돈이면 다 인줄 알아?

상철=이게 왜이래? 당신 지금 나한테 실수하는거야. 남자가 여잘 뺏겼으면 곱게 물러설 줄 알아야지.

(큰소리로 다투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온 은숙. 상철이 앞을 가로 막고 서서)

은숙=제발 부탁이야. 그만 돌아가줘. 응?

(울먹이는 은숙. 성만이는 물끄러미 은숙이를 바라보고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은숙은 상철이 팔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씬138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성만. 슬픈 표정으로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디졸브-

#씬139 (은행)
핼쓱한 얼굴. 은행안을 두리번 거리는 성만. 은숙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

성만=김은숙씨 뵈로 왔는데요.

미숙=어머, 그만 두었는데... 어떡허죠? 곧 결혼할 거라고 그러던데.

성만=지금 혹시 어디있는지 아세요?

미숙=글쎄요. 결혼할 남자 아파트에 자주 갔었는데...

성만=그 곳을 알 수 있을까요?

미숙=(난감한 표정) 저도 몰라요.

(성만이는 힘없이 발길을 돌이킨다)

#씬140 (밖 버스 정류장)
성만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긴 함숨을 쉰다. 저만치 시내버스가 다가온다. 버스가 멈추고 막 올라타려는 순간, 뒤에서 성만이를 부르는 여자목소리가 들린다. 근무복을 입은채로 다가오는 미숙.

미숙=서울서 오셨죠?

성만=절 알고 있나요?

미숙=전화 자주 했잖아요. 목소릴 기억해요.

성만=근무 시간일텐데...하실 얘기라도?

미숙=(머뭇거리며) 은숙인 늘 괴로와 했어요. 약속해 줄래요?

성만=무슨 약속을 하자는거죠?

미숙=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된 이유를 말이예요. 말씀 드리면 그냥 서울로 가시겠어요?

성만=약속하죠.

미숙=이런 얘기해야 될 지 모르겠네요. 허지만, 은숙이 진심을 알기 위해선 알아야 할거예요. 은숙인 그 남자에게 강제로 끌려 갔었어요. 은숙이 어머니와 사전에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예요. 은숙인... 정말 울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참담한 표정을 짓는 성만. 가로수에 몸을 기댄다. 몸을 돌려 돌아가던 미숙은 다시뒤돌아 성만이를 바라본다)

#씬141 (밤, 중심가 거리)
맞은 편 환한 네온사인 불빛이 보이는 제과점. 앞 성만이는 가로수에 등을 기대고 제과점을 바라보며 서있다. 한참 후 상철이와 은숙이가 다정스럽게 제과점에서 나온다. 길을 건넌 두사람은 성만이를 바라보고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은숙이는 상철이 팔을 끌고 그 앞을 비켜가 버린다.

#씬142 (과수원 길)
초췌한 모습으로 과수원 길로 걸어들어 오는 성만. 멀리서 교회 종소리가 들리고.

#씬 143 (은숙이 방)
화장대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빗고 있다. 거울에 비친 표정. 슬픔에 잠겨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 남동생이 들어온다.

남동생=그 형이 왔어. 잠시만 얘기하고 간데.

(성만이가 들어오자 빗질하는 손을 멈춘다. 거울에 성만이 모습이 비친다. 은숙이는 잠시 빗질을 멈추고움직이지 않고 거울만 바라본다)

성만=(떨리는 목소리로) 나,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왜 내 곁을 떠날려고 하는지 마직막으로 듣고 싶다.

은숙=(거울만 바라보며 차가운 표정을 짓는다)성만씨가 가난하기 때문이예요. 그것 뿐이예요.

(성만이는 거울에 비친 은숙이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나가며)

성만=결혼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럼...

#씬144 (밖, 과수원 길)
활작 핀 복사꽃이 바람에 흩날리며 성만이 얼굴을 스쳐간다.

#씬145 (방안)
창문에 다가선 은숙. 성만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두 빰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씬146 (과수원 입구)
시내버스가 멈춰서고 성만이가 차에 오른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하고 과수원 길에는 복
사꽃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이 화면 위에
성만=(나레이션)그 이후 난 전주를 다시 찾아 오지 않았다. 젊은 시절 나의 첫사랑과 친구들의 그 애듯한 사랑은 모두 슬프게 각자 가슴 깊은 곳에 지을 수 없는 상처만 안겨주었다. 내가 전주를 다시 찾아온 것은 그 후로 15년이 지난 중년의 모습으로 였다. < F.O.>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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