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신학'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신학'
  • 크리스챤월드리뷰
  • 승인 2018.05.3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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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브 볼프 신학자 , 강연자료집

이번 -언더우드 국제 심포지엄은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를 모시고, 좌담회를 통해 <번영의 삶>에 대한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사회에는 신옥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통역으로는 차재승 교수(뉴브런스윅 신학교)가 함께 했다.

신옥수 교수: 볼프 교수님은 여러 저서들을 통해 지적 투쟁, 영적인 여정, 실존적인 체험과 다양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습니다. <배제와 포용>에서는 조국의 전쟁과 폭력의 상황 속에서 배제가 아닌 포용을 주장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랑과 치유의 삶을 지시하였고, <베풂과 용서>에서는 그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기 생존적인 사랑을 통한 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형성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종말>에서는 볼프 교수가 직접 경험한 1984년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 기억을 치유하는 울림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교수님께서는 예전에 하셨던 학문과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주제를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긍정신학이나 행복학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동향과 관계가 있습니까? 아니면 개인의 신앙 체험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볼프 교수: 제가 생각하기로는 “번영의 삶”이라는 주제는 이전 주제들과 다른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일관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적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적으로 모든 동기가 발견되기 때문이죠. 초기작에는 십자가에 대한 내용이 더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신앙적 내용과 믿음에 키워드(Key-word)라고 볼 수 있죠. 첫 번째는 비전이 어떻게 도달하게 되는가?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비전에 도달하는 데에 가는 여정을 언급하고 있다. 비전으로 가는 여정인 초기작에는 인간의 고난, 죄의 문제와 갈등을 다루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비전에 관한 글을 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번영신학”을 언급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신학이라고 볼 수 있겠다.

번영의 삶의 장르는 행복학과 유사하다는 질문이 있지만, 사실은 그런 외부의 영향보단 복음성이 강하고 기쁨의 메시지가 더 강합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이라는 큰 기쁨으로 시작하고 끝도 제자들의 큰 기쁨으로 맺게 되어있습니다. 번영이라는 것은 복음서의 처음과 중간과 끝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면, 어렸을 때 키워주셨던 보모가 있었는데 그녀는 한번도 화낸 적이 없고 일을 하면서, 남편을 잃으며 가진 마음의 슬픔과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항상 기쁨가운데 찬양을 부르며 사셨습니다. 그 분의 모습을 보고 산 것이 오늘날 “번영의 삶”이라는 주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의 박사논문을 부모님보다 먼저 그 분께 헌정을 했었습니다.)

신옥수 교수: 볼프 교수께서 제안하는 “번영의 삶”, 번영 복음 신학은 오해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번영복음이 성공, 건강, 장수,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을 말해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번영과의 차이점이 있다고 봅니다. 소유의 삶이 우선인 번영(Prosperity)과는 다르게 볼프의 번영(Flourishing)은 관계성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닌가요? 자신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성을 누리는 것, 즉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구현되는 삶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대서 개인의 사회와 문화가 관계성에 놓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이웃사랑이 관계될 때 번영의 삶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볼프 교수: 네, 맞습니다. 번영의 삶(Flourishing life)을 세 단어로 요약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의 righteousness”, ”화평 peace”, ”기쁨 joy”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번영신학과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치적인 유혹과 번영의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유혹은 정치적인 이념을 신뢰하고 그것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번영에 대한 온전치 못한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번영의 삶(Flourishing life)은 이 두 가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번영의 삶은 좀 더 고차원적으로 복음이 제시하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신옥수 교수: 예수님의 삶이 먼저 번영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볼 수 있겠습니다. 깔뱅신학에도 언급이 되어있지만, 결국 번영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에는 고난이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일반적인 번영신학에서 고난은 회피해야 될 대상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신자들의 삶은 고난과 역경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 나아가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추구하는 자원하는 고난이 있어
야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는 원치 않는 고난, 불의한 고난, 까닭 없는 고난, 끝나지 않을 거 같은 고난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겪는 신자들에게 말하는 번영의 삶은 좀 낯설지 않을까요?
    
볼프 교수: 성경에서는 죄를 짓지 않는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에서는 욥을 볼 수 있겠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발적 고난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수반되는 고난들이 있고,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늘 생기는 일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욥의 고난은 이해하기도, 그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또한 어렵다. 그런 고난은 왜 오는 것일까? 깔뱅보단 루터를 더 잘 아는 입장에서 루
터가 다루는 고난을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고난을 통해 자기 스스로 인간의 약함을 깊게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신앙에서 중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까닭 없는 고난은 우리가 설명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같이 짊어지심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극복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듯 “해방되는 것”이고, 신약에서의 극복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자세히 설명하시기 보다는 고
난을 극복하게끔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고난에 대한 반응은 또 다른 번영의 삶이라 볼 수 있다.

신옥수 교수: 교수님의 번영의 삶의 핵심대상은 하나님 집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육신하신 것처럼 임마누엘 집,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세계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 되는데, 이것은 죽음 이후에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이라던가, 죽음 이후 영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번영의 삶이 아니라 이 땅 한복판에서, 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이분법이라던가 교회와 세상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온전한 구원의 삶들을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볼프 교수께서 제시하고 있는 에덴 동산의 번영의 이미지와 계시록에 나와있는 새 예루살렘의 번영의 이미지, 매우 선명하지만,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집으로서의 세상이 깨어지고 불의하고 왜곡되고 있다. 번영을 추구하는 지구화 시대에 오히려 가난과 질병, 전쟁과 폭력, 세상은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있다. 물론 우리는 부분적, 단편적으로 번영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에 동의합니다만, 새 예루살렘이라는 종말론적 이미지로 가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세계로 가는 길에 반드시 제화가 우리의 심판적 구속이 포함되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에 진적인 변화가 필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종말론 적 질문인데 볼프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볼프 교수: 그녀가 말한 (신옥수 교수) 질문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웃음)

신옥수 교수: 교수님은 삶의 표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각 다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온전한 삶, 참된 삶, 번영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즉흥연주”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무조건적인 삶, 희생적인 삶, 고난 당하는 삶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부와 평화를 맺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 안에 있는 삶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삶이고, 또 성령 충만한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님과 우리가 굉장히 역동적인 관계성을 지니고 있는데, 일찍이 볼프 교수님께서는 관계성을 수동적 능동성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시지만, 성령과 인간이 손을 맞잡고 이야기하는 “파트너십”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볼프 교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존재나 구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receptive)”이기 때문이다.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 또한 하나님께 받은 선물인데, 그것이 왜 능동적이라 설명되는가 한다면, 캐치볼을 비유로 한다면 우리가 받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공을 받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공을 받긴 하지만, 그 안에는 능동적 행동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받는 것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이들은 자녀를 위한 부모님의 헌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는데,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부모의 헌신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부모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듯이, 하나님의 관계도 올바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동일한 세계지만,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는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물건을 사는 것과 누구에게 선물 받는 것은 가치와 소중함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계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이해할 때,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됩니다  

신옥수 교수: 번영의 삶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개인의 내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제와 포용>에서도 볼프 교수님은 사회구조의 개혁보다는 사회적 행위자에 변화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고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미국의 교회상황에서는 이러한 것이 상당히 영향력이 있겠지만, 정치적 억압과 불평등 등 문화적, 정치적으로 고통 받는 나라의 정치 체계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아프리카 아이, 청년 실업, 비정규직 문제, 성차별, 각종차별주의 사회 문제들을 가진 나라의 경우, 개인의 내면의 변화와 삶의 방향성을 사회의 개혁과 함께 갈 수 없는 건가요?

볼프 교수:  사회의 구조도, 개인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현재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회구조에 살아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둘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가진 문제는 주어진 환경을 잘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얼마나 잘 사용할까에 대한 능력이 사회구조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신옥수 교수: 전통적인 신앙은 죄와 구속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지만 볼프 교수의 말씀을 따르면, 세계 행복과 번영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종말론적 새 창조의 번영이며, 죄로부터의 구원 악의 세력부터 해방,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웃사랑 참된 삶을 누리는 삶이 번영의 삶이라 하셨고, 신학의 갱신이 필요하다 주장하셨습니다. 어두웠던 신앙이 밝아지는 반면, 죄책감과 구속보단 자유와 해방을 말씀하시면서, 성화의 과정을 덜 강조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볼프 교수: 네, 동의합니다. 구속의 신앙과, 번영의 신앙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구원 없는 번영의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부수적이며, 하나의 수단이라 생각된다.

신옥수 교수: 보편주의에 관한 청중의 질문이 있었는데, 저의 생각을 보태어 질문드리겠습니다. 교수님은 번영의 삶을 추구하면서 모든 종교가 공동선을 추구하고, 각자 지역, 언어, 문화의 특수 보편주의를 구현하며 서로 선의 경쟁과 존중을 통해 평화를 지향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보편주의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요? 이 주장은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주장이 아닙니까? 서로 충돌과 갈등이 있을 때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볼프 교수: 보편주의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아닙니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결국 똑같은 것이다라는 주장이지요? 저는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다원주의는 결국, 각 종교가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서로 나눌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치적인 다원주의는 받아들입니다. 본인의 신앙고백 당연히 그리스도가 키(Key)이고,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보기에 현재 국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주장하고자 한다.  

신옥수 교수: 현재까지는 강의에 대한 질문이었고, 지금 이 질문은 시기 적절한 질문이라 봅니다. 남한과 북한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1차 정상회담을 이뤄졌고, 어제는 2차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회담의 주제는 평화와 번영이다. 볼프 교수의 저서들이 제시하는 타자의 포용, 차별이 아닌 존중과 화해는 남북통일에 매우 중요한 이념과 방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남북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볼프 교수: 네, 남북과의 관계와 통일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남북간의 화해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화해는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화해라는 것은 정의 구현과 용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기독교 인들은 남북간에 화해의 문제에 앞장서야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음으로 고침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침 받은 자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고쳐가야 되는지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자세가 우리의 삶과 남북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신옥수 교수: 마지막 질문으로 신앙인으로서, 신학자로서, 교수님이 체험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앙고백을 딱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신다면, 아니면, 볼프 교수님의 좋아하시거나, 교수님의 신앙 고백이 담긴 찬양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볼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Great is my faithfulness> 오 신실하신 주 입니다. 나에게 있어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잘 요약되어 있는 거 같다. 가사를 보면 <God is love>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의미는 무슨 일이 있든지 오직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고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늘 항상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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