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있어서의 온정주의의 많은 얼굴들(2)
선교에 있어서의 온정주의의 많은 얼굴들(2)
  • Chuck Van Engen (전 풀러신학교 명예교수)문전섭역 (전 대전장로회 신학교학장)
  • 승인 2018.10.1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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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립 증후순
     
a. 이것은 수혜자들의 자율성을 확언하기를 원하는 음흉한 이중-생각인데, 그러나 고립적인 관점으로부터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자녀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결코 충고나 안내나 혹은 또한 제안들을 주지 않는 부모들과 같은 것이다. 이런 증후군에 사로잡혀진 사람들은 그들의 수혜자들과 별개로 그들이 관하여 말할 저들 영역들과 그들이 홀로  독립적으로 또한 고립적으로 남아 있을 선교와 사역의 저들 영역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수혜자들이 어떤 문제들에 대해 상의하기를 원할 때일지라도, 그 고립 증후군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포기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이 증후군은 “자치”가 규약 적으로 상호 협력을 제가하며 또한  수여자의 편에서의 공동 참여에 있어서의 협력적인 노력들은 자동적으로 온정주의적이 될 것이라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으로 “온정주의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이 증후군은 수혜자들과 별개로 수혜자들에게 중요할 수 도 있는 문제들과 의제들에 있어서의 수혜자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수여자에게 중요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혹은   b. 이 증후군의 이 증후군의 경박한 면은 “선택적인” 증후군이다. 고립주의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이 증후군은 수혜자들로 하여금 공동 위원회에 있는 수수여자들과 참여하도록 초청하며-그러나 가장 기본적이며 영향 있는 결정들은 그 공동의 위원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들은 그 그룹이 모인 후에 선택 이전이든가 혹은 향하여지든 가인 것이다. 그래서 수혜자들은 “선택적이든가”이며,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이 말 되어진 모임에서 현재적이며, 의견을 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최종적인 분석에서 그 프로젝트들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수여자 조직이 협상될 수 없는 사역의 맥락의 밖에서 결정된 “정책들”을 갖는다면, 고립주의자 증후군의 어느 면이든 효과를 가질 경향이 있을 것이다. 만약 참석자들 그 자신들이 의제들을 미리 결정하였든가 혹은 공동의 결정들을 투사하려고 하며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하려고 한다면, 이 증후군의 어느 면이든 발생할 것이다.

6.  큰 치스 (The Big Cheese) 증후군

 a. 어떤 것을 하지 않도록 결정하기 (그것이 지금 중요하다고 할지라도)“그들이 결코 그것을 이행할 수 없거나 그것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가 한 건물의 경우에서) 우리가 가버렸을 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b. 우리의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귀중함으로 우리는 다만 정치적인 옹호와 자금들의 경영과 인사 행정과 같은 크고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있는데, 정원들에서 시청 홀에서 설교하면서, 걸으면서, 위쪽의도시의 교회를 교단적인 최고법원들과, 구제 기관들에 관계시키면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수혜자들이 인도에 있는 사람들을 취급하는 것이며, 아픈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않아 있는, 술 취하는 자들과 아편 중독자들과 매춘부들과 뚜장이들을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혜자들이 증거를 하는 것이며, 신앙을 나누는 것이며, 그들의 백성들의 울부짖음 들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수혜자들이 설교와, 개인의 돌봄과, 치유와 또한 일반적인 사역을 하는 것인데- “큰 치스”는 작은 사람들을 위해 시간이 없는 것이다.

7. 왕자-그리고-빈자 증후군

a. 지금까지 사람들의 표준 이상으로 살면서, 우리는 우리기 정말로 결코 그들이 산 것과 같은 삶을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b. 우리의 신분을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위하여 가지는 모든 것은 건강하게 머물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기로 선택한 그 환경들을 살아남그런 가난한 환경들에서 삶으로서그것을 숨기려고 너무 열심히 애쓰는 것이다.

8. “전문적인” 성향

우리가 수혜자들의 삶에 “개인적으로 참여함”이 없이 본질적으로 비인격적인 모양으로 수혜자들에게 일거리들을 준다는 생각. 일단 일거리들이 제공되어왔다면, 우리는 완전히 우리가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삶과는 절연될 수 도 있는 (때때로 반대로) 우리의 자신의 삶의 공간과과 또한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들에로 뇌각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성육신적인 선교는 (구약에서의 판관들과 예언자들의 바로 그 개인적인 관여) 우리에게 비인격적인 “{전문적인” 봉사들은 기독교적인 사역의 방법의 본질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발하는 것이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온유와 선함은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소통될 수 없는 것이다.

9. 고착 (Fix-it) 증후군

너무 자주 선교와 사역에 있어서, 만약 우리가 전적으로 관심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오래 동안 생각함이 없이 과학적인 난제들을 생각함이 없이 일들에 너무 빨리 고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고착시키려고”추구하는 바로 그 문제들을 영속화시키려는 그 치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그 사실. 60년대 후반의 도시 선교의 너무 많은 것들이 이런 형태의 일이였는데-- 또한 그 결과들은 매우 긍정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국제 선교와 사역은 수여자와 수혜자가 선교지 주인 문화에서의 선교적 사역에서 함께 새로운 문화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0. “재생산ㅇ하는 우리 자신들” 증후군

A. 이 사고의 양태는 압도적으로 북 아메아카의 선교적인 노력들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 곳에서 특정한 교파적인 정체와 신학과 또한 조망 (신학적인 교육의 내용과 스타일을 포함하여) 단순히 수혜자 문화에서 재생되어진 것이다. 국제 선교는 불행이도 또한 그들 자신들, 그들의 기관들, 그들의 구조들, 또한 그들의 방법론들을 재생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때때로 그들의 이름들까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Latin American Mission Churches"와 African Inland Churches"를 보는데, 그곳에서 선교 구조는 단순히 선교지 국가 교회 구조들에도 넘겨졌던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의제가 지역 자율성에 대한 잘 정의된 목표 날자들을 가진 ㅤㅁㅗㄷ적에 의한 경영에 기초된 농업이라면, 그 전체의 구조는 수용자 문화에서 재 생산되어질 경향이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수여자는 우리가 고국에서 간 것처럼 선교지 주인 문화에서 “민주주의”를 창안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수여자들을 수여자들이 양육되어졌던 자들처럼 가족 구조들을 만들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부다처제는 문제 밖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수여자들이 서구인이라면, 그들은 수직 구조의 선교지의 주인 문화들의 한복판에서일지라도 (아시아 나라들에서 압도적으로 있는 저들처럼)민주적인 수평적으로 상호적이며 동등한 사회적인 관계들을 육성시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혹은  b. 이런 증후군의 빈궁한 면은 모든 문화들은 매우 특이해서 (여기에서 어떤 공통의 인류문제들은 ㅤㄹㅓㅄ다), 전자의 문화의 어떤 것도 적용할 수 것이다. 수여자 기관의 모든 정체와 정책들과 방법론들과  목표들은 “낮설은” 것이며 그래서 부적합한 것이며, 수용자들에게 유용하지 않고 또한 아마도 해로운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토착적인 교회들이 “단지 성경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래서 그들의 자신의 정체와 신학과 또한 협동적인 삶을 창안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역사의 20세기들은 그리하여 부적합하며, 또한 그리하여 새로운 토착적인 교회들은 그들 자신의 “지역적인 신학들”{또한 본질적으로 그 바퀴를 재-발명하는 ㅤㄱㅓㄳ이다. 신학적인 교육은 추동하는 지역적인 반영이 되는 것이다. 농업은 토착민들과 나란히 도랑들을 파면서 비-기술적인 자조가 되는 것이다. (초기 평화 봉사단들 처럼). 치유는 지역 점쟁이들을 기독교화 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문제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종족과 국가에 관계해서 수혜자들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 또한 “낮설은”{ 선교 수여자들에 의한 토론에 열려있지 않은 것이다.

혹은  c. 이런 증후군의 어느 면이든 지도력에 대한 그들의 내용과 스타일과 또한 방법에 있어서 양자가 토착적인 지도자들의 발전을 늦추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 자신의 문화에 채택된 새로운 방향들과 통찰들을 끌어들임에서의 변혁적인 것. 위의“a"의 글자는 지도자들을 매우 급속하게 산출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에 매우 ”낮은 ㅤㄱㅓㄳ“임으로 결국은 그 선교지 주인 문화는 그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며 또한 그래서 지도력 발전에 있어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 맥시코 타바소코에서의 장로교회--Cf David Bennet, Tinder in Tabasco)  "b" 글자는 여러 십년 동안 적합한 모델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는 경향인 것이며, 항상 ”낮설은“ 어떤 것으로부터 빌려오는 것 같은 어떤 것을 배격하면서 말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한 모델이 마침내 취하여졌는데, ”토착적인 것으로“ 세례를 받고 또한 무비판적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예: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에 대한 그 강한 유럽의 신학적인 뿌리들은 주의 깊게 숨겨져서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으로 될 수 있다고 사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으로부터 빌려지게 된  것의 그 기초적인 가정들은 그것들이 응당 받을만한 주의 깊은 비평 없이 효용 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용이하게 온정주의는 선교와 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대개 우리가 교리적인 모양으로 어떤 입장을 고수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취하는 때, 환경들과, 의견들과, 지혜와, 혹은 사람들의 감정들과 상관없이 우리는 섬기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온정주의를 피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러한 덫들 (traps) 을 아는 것이다. 각각의 결정에서, 각각의 환경에서, 각각의 프로그램의 시작에서, 각각의 새로운 사람의 훈련에서, 우리는 지혜와 감수성을 많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또한 그래서 부주의하게 우리의 생각과 가치들과 또한 그  그리스도의 선교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결국에, 우리는 한 영과 한 몸과 또한 한 소망과 또한 한 부르심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함께, 한 교회의 다-문화적인 구성원들로서, 상호적인 동역 자들로서 함께 일하기를 추구하면서, 우리는 특정한 장소와 특수한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 이라는 정신성 (mentalaty)이 없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거기에 있을 수가 없다.왜냐하면 모두 함께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한 주님께 복종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수여자들과 수혜자들이 함께 그들의 비전들과 그들의 목표들과 그들의 전략들과 또한 그들의 일을 성숙하며, 동등하며, 적극적으로 협력적이며 상호적으로 책임적인 동역들을 나누는 때, 위에 개관된 함정들의 대부분은 피하여질 것이고 또한 건전하며 사랑하며 환상적이며 창조적인 선교는 떠맡아질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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