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길 떠나 돋을볕 맞는데
너른 꽃 정원엔 빛줄기가 쏟아진다
굽이진 꽃길 옮겨가는 곳마다
고혹적인 향기에 가슴이 뛰누나
거친 숨결엔 미의 찬가 섞이고
꽃밭 음악회가 자연을 깨운다
벌은 꽃 보며 노래를 부르고
꽃 냄은 바람 타고 재를 넘는다
1
혜초 풀숲에 가녀린 물망초
올 임도 없거늘 목 빼 누굴 기다리나
꽃잎에 맺힌 눈물 애잔하기 그지없네
이젠 그만 홀사랑 미련일랑 내박치고
잊어야 하거늘, 잊어야 하거늘
2
미소 머금은 철쭉이 살갑게 다가와
내 맘을 홀리어, 보고 또 보는데
싹쓸바람 몰아치니 꽃보라만 날린다
철가지도 않았거늘 꽃은 간데없구나
바람은 알려나, 구름은 알려나
3
선사(禪寺) 해 아래 신성한 연꽃
살짝 벌린 입속의 신비론 입 내움
우아한 자태에 바람이 스친다
내 갈 길 멈추고 그윽함에 젖으니
맘은 부처로되 눈은 욕계에 머문다
네 몸에 날 담굴 수 만 있다면, 하지만
색욕계를 파한 몸, 이젠 놔주렴
4
혁혁(赫赫)한 속맘 드러내 보이며
여름내 가신님 기다렸건만
불꽃 이는 가슴엔 아픔만 안겨
애수의 밤, 서리에 사라져간 백일홍
네 슬픔이 내 맘에 메아리친다
5
순결한 백합화, 싱그러운 흰 몸살
꽃잎에 다가가 가향에 취하여
한참 머물다 갈 때도 놓쳤네
바다 건너 떠나는 내 맘속엔
하얀 꽃니슬이 쉼 없이 나리누나
6
장미 가시에 찔리곤 했건만
불타는 빨간 꽃잎에 마음 설레어
이젠 꽃줄기 가시마저 아름답구나
찔린 손에선 장미가 피어나네
7
애저녁 뒤안길 흙담 위에 핀 박꽃
외롬과 그리움 서린 고고한 자태
잠시 잠깐 머물다 가려 했건만
석별의 걸음을 차마 뗄 수 없구나
너 품고 은하수 건널 수만 있다면
8
제비꽃 수풀 진 호숫가 둘레길
수양버들 한 곁에 단아한 목련화
꽃잎엔 애련(哀戀)의 눈물이 고였네
아서라, 여름 가고 갈, 겨울도 지나면
나, 5월의 벌이 되어 너를 찾으리라
9
에리카, 황야의 바람도 잦아져
시냇물 소리만 적막을 깨는데
달콤한 꿀 향기 채워진 가슴엔
고독이 드리워 너를 섶게 하누나
슈타른베르크 호반에 놀질 때
내 가슴에 꽂혔던 너,
지금도 네 살 내움이 나를 새록인다
10
라일락 꽃향기 5월에 흐르고
젊은 날 네 두덩서 꽃잎 따먹다
때론 봄노래 돌려 부르며
나는 늘어진 네 가지 그늘에서
내일을 꿈꾸다 잠들곤 했었지
나, 이제 떠나면 다시 올 수 없어
너는 꿈의 꽃으로 내 품에 필 텐데
아아, 내 맘은 왜 이리도 슬픈가
11
마거릿 꽃잎으론 점을 쳤다지
진실한 사랑 그리는 연인의 전설
세월 유수라지만 반세기도 어제이오니
내 어이 너의 내음 잊을 수 있으랴
너와 내겐 우리만의 비밀도 숨겨있거늘
12
경숙한 동백꽃 양지 언덕 자락에서
눈서리 참아가며 일편단심 날 기다려
오늘에야 만나니 살며시 속맘 여네
나, 불꽃인 네 가슴에 안겨 노래치며
저 언덕 너머 꽃밭엔 아니 가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하며 밤을 새웠지
아아, 이게 너와 나의 숙명이었네
꽃 정원 굽잇길 다예한 꽃들
내 뜨락선 저들이 아직도 흐노니
벌이 날갯짓하며 내 영혼을 흔든다
아아, 저 색향미에 이 밤도 잠기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