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행 5
영국 기행 5
  • 유양업 (전선교사 시인 수필가 시조시인)
  • 승인 2019.06.2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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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슬비는 땅이 젖을 정도로 촉촉이 내리고 있다. 옥스퍼드에서 8일간 마크 목사님과 보람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웨일즈 카디프(Wales Cardiff)를 가기 위해 헤어져야만 했다. 출입문을 열고 나오는데 참새 닮은 새 두 마리가 보슬비를 맞으며 종종걸음으로와 우리를 보며 눈을 깜박이고 뾰족한 입을 위 아래로 움직여 이별의 인사인 양 날개를 흔들었다. 마크 목사님은 기차 플랫폼에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고 여행 중 간식하라며 예쁜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목사님의 다정하고 친절한 손사레를 받으며 우리 내외는 옥스퍼드에서 기차로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로 향했다. 1시간 30분 후에 카디프 역에 도착했다. 이미 예약해 놓은 숙소로 가야 해서 택시를 타고 저렴한 기숙방(ML Lodge)을 찾아갔다. 가져간 짐을 정리하고 마크 목사님이 주신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정성들여 싸 주신 샌드위치, 요구르트, 쥬스, 과일, 접시, 스푼 ㅤㅅㅔㅌ, 티슈 등 자상한 배려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정성과 사랑을 가슴에 담은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호텔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진열대에 놓여 있는 음식 중에 토스트, 오렌지 쥬스, 요구르트, 과일칵테일 등을 접시에 담고 자리에 앉아 먹으려고 할 때 웨이트리스가 메뉴판을 들고 우리 앞에 왔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우리는 의아했다. 의례히 호텔 비용에 아침식사가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식사는 따로 시켜야한다고 했다
  “호텔 예약에 아침식사가 포함 되어 있지 않나요?”
  그녀는 확인을 다시 하고 와서, 아니라고 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주문하면 아침식사 값은 얼마지요?”
  “각각 다르지만 보통은 65파운드 입니다.”

우리 돈으로 약 7만5천원 정도 되었다. 잠시 머뭇거리니 가져다 놓은 그 음식 먹 으라고 하며 더 필요한 것 없느냐 물었다. 우리는 더 요구할 처지도 아니고 감사할 따름이라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에서 주인 할머니 룻(Ruth)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이 친절은 잊지 못할 것이라며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내 관광을 위해 10시에 출발하는 투어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한 번 표를 사면 하루 종일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었다. 1인당 11파운드 되는 표를 22파운드를 주고 2장을 샀다. 시내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1층에 앉아 있을까 하다 시내를 더 잘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 앞자리에 앉았다. 우뚝 우뚝 뾰족하게 솟아 있는 건물들도 시야에 들어오고 두둥실 떠있는 뭉게구름은 창공에 그림을 펼치고, 어여쁜 새들의 날아다닌 모습들도 환히 잘 보였다.

60대 정도의 건장한 남자 가이드는 하얀 와이셔츠에 빨강 넥타이를 매고 상의 오른쪽 가슴에는 노랑 수선화 꽃 한 송이를 달았다. 왼쪽가슴과 등에는 City sightseeing이라 쓰여 있는 그들의 정복을 입고, 왼쪽 앞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들고 출발과 동시 시내 광경을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그 설명들을 다 알아 들을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도로변 나무들은 아직도 앙상한 가지들이 잎을 쏟아 내기에 바쁘고 시내를 끼고 흐르는 길고 넓은 만(Bay)은 굽이굽이 넘실대어 더욱 아름답고 운치가 있었다. 도시는 깨끗하고 하얀 교회당 건물, 시청, 뮤지엄도 사철나무들이 파랗게 넘보여 조화의 어울림이 무게를 이루어 보였다. 수선화, 목련, 췌리꽃들은 여전히 유럽풍의 건물과 잘 어울렸다. 옥스퍼드엔 붉은 벽돌의 집이 많았는데 이곳 웨일즈는 하얀 색깔의 건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30분이 지났을 때 초등학생으로 보인 50여 명의 학생들의 재잘거린 소리와 함께 버스 2층으로 올라 왔다. 옆에 있는 가이드에게 물었다.
  “저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인가요?”
  “좀 떨어진 지역에서 관광하러 온 학생들인가 봅니다.”   새파란 두 기둥을 뒤로하고 분수가 위를 향해 치솟을 때, 건물 위를 빙빙 돌고 있는 새 무리는 마치 강강수월래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공중 쇼를 하는 듯 보였다. 이때 아이들은 함께 ‘와~!’ 하고 느끼는 대로 소리치며 환호했다,   비비시(BBC) 방송국 건물은 하얗게 기둥이 둥글고, 우체국 건물도 3층으로 조각상이 아름다웠다. 박물관 건물 앞에서 학생들은 내려야 하는지 갑자기 재잘거리는 소리는 소음처럼 들리다가 마침 내가 사는 사직 공원의 숲속에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변하여 아름답게 들렸다. 어느새 어린 학생들은 모두 내려 조용했다.  1시간이 걸려 투어버스는 시내 한 바퀴 돌고 가이드는 카티프 성城(Cardiff Castle)앞에 도착하여 다음 관광할 손님들을 기다렸다.

머리가 하얀 노인 한 분이 양손에 커피를 조심스럽게 들고 와서 내 옆에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한 컵을 건네주었다. 정다운 그들의 모습이 길가에 피어 있는 수선화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미국 택사스 주에서 왔어요.”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앞에 있는 카디프 성안으로 들어갔다. 카디프 성은 영국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건물들 중 하나였다. 많은 관광객들이 높은 성벽의 아름다운 광경을 향해 사진들을 찍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중요한 관광 명소이구나 싶었다. 로마의 침입 시대로 돌아가 펼쳐지는 긴 역사와 더불어,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자리는 곧 재건된 로마의 요세이며, 인상적인 노르만(Norman) 성이며, 또한 예외적으로 특별한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의 환상적인 궁전으로, 세계의 가장 부자들 중의 한 사람인 빅토리아를 위해 19세기 William Budges에 의해 옛 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과 또한 그것의 마술적인 변형이 이뤄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중에 젝(Jack)이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젝은 본인도 크리스쳔이라고 하면서 웨일즈의 부흥 운동을 얘기했다.
  나는 18세기에 영국에서 존 웨슬리 운동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19세기에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영국은 물론 세계 각지와 특히 한국에도 1907년 평양을 시발로 하여 전국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대충 알고 있어서, 나는 흥미를 갖고 질문을 했다.
  “웨일즈 부흥 운동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일어났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오 예쓰,’ 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은 이반 로버츠(Ivan Roberts 1878-1951)라는 무명의 청년에 의해 시작됐어요. 그 진원지 역시 웨일즈의 한적한 시골에 있던 모리아 교회라는 작은 교회였지요. 웨일즈 부흥 운동의 주역인 이반 로버츠는 웨일즈 지방 글레모건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했어요.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14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나 교구학교에서 공부했지요. 그는 12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힘든 일을 했으며, 한때는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도 했어요.”

키가 큰 젝은 앞 탁자 위에 놓여있는 커피 잔을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26세 때(1904) 칼뱅파 감리교회 목회 후보자로 선발되어 뉴캐슬 에믈린에 있는 대학 예비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는 강한 영적 욕망을 가지고 자랐지요. 남달리 기도에 전념하고 밤새워 성경을 연구하며 성령의 도우 심을 구하면서 자주 시대적인 환상을 보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지요. 로버츠를 비롯한 기도용사들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기도해오던 중 그해 10월 30일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답니다.”  

젝은 체크무늬 셔츠를 매만지고 한손에 힘을 주며 계속 말했다.
  “다음날 지체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모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기도 집회를 시작했지요. 그날이 공교롭게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어요. 성령에 사로잡힌 로버츠는 모리아 교회 담임목사 다니엘 존스에게서 자신이 체험한 비전을 얘기하고 설교할 기회를 얻은 로버츠는 외쳤어요.
  “성령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나가도 좋습니다.”

그 결과 그의 첫 집회는 남아 있던 17명, 그중에는 로버츠의 동생과 세 자매도 포함되는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고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첫 집회 이후 30일 만에 3만7천 명이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놀랍게도 5개월 만에 웨일즈 전역에서 10만 명이 교회를 찾게 됐지요.”
  열심히 설명하는 순간 나도 그 말에 흡수되어 그의 큰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
  “젝 선생님, 그 말을 들으니 제 자신도 마음이 뜨거워지네요.”
  젝 자신도 성령체험을 한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체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닦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으로 사람들은 로버츠에게 ‘웨일즈의 죤 웨슬리’라고 불렀어요. 성령 집회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거 참석했는데 그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훔쳐온 연장을 돌려 주거나 함부로 다룬 당나귀를 껴안고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고요. 웨일즈의 부흥 운동은 사회정화 운동을 가져와 술집과 당구장이 텅텅  비고 형무소 죄수들에게까지 전도 운동이 일어났지요.”

열심히 청종하고 있던 남편 문전섭 박사도 한마디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처럼 뜨겁고도 강력한 웨일즈 부흥 운동은 유명한 신문기자들, 종교지도자들, 영국 전역과, 미국, 캐나다, 인도, 미얀마, 아프리카, 남미,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그것이 바로 ‘1907년 대 부흥 운동, 한국의 오순절’이라는 사실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저명한 목사 존스턴 박사가 직접 웨일즈를 방문하여 로버츠의 부흥회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 이반 로버츠 목사에게 부흥의 비결을 자세히 물어보기도 했지요.”

남편은 하얗게 변해진 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계속했다.
  “그 후 존스턴 박사는 중국의 여러 곳에서 웨일즈의 부흥 운동을 증거하다가 1906년 9월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그 무렵 마침 장로회연합회가 개최되었고 존스턴 박사는 그곳에서 웨일즈 부흥 운동을 간증했지요. 그때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큰 감동과 도전을 받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갈망하게 되었어요. 특히 당시 한국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길선주(당시 장로) 목사도 큰 은혜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와 영적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지요. 참으로 시공을 초월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였지요.”
  얘기하는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임을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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