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 (1)
시간의 여행 (1)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9.30 18: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만남의 접점에서

이름의 상징성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내 이름이 어렵다며 때로는 순홍, 승홍, 승헌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선생님들조차 가끔 틀리게 부르곤 했다. 높을 숭(崇)과 넓을 홍(弘) 자가 결합되어 발음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 내 이름에 불만을 가지 곤했는데, 후에는 오히려 이름을 지어 주신 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저서나 논문, 문예 작품 등을 발표해도 같은 이름이 없어 혼동될 위험도 없고, 또 생각해보면 지금 나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직업에 맞는다고 생각을 하며 이름에 만족한다.

나는 어릴 적에 보잘 없는 아이로 자랐지만, 불편함 속에서도 내 이상은 늘 높고 멀리 있었다. 좀 지나친 이야기 같지만 이미 내 운명은 내 이름에 게시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는 종종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결코 천박하거나 저속한 일이 아니다. 나는 높은(崇) 진리를 널리(弘) 전하는 사명이 내 이름에 상징화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 삶을 엮어가다, 지금 말년을 맞아가고 있다.

강계: 미인대경형

나는 1942년 음력 4월 8일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부처님 오신 석탄일과 일치하여 생년월일을 묻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부처님과 생일이 갔구나!”라며 말을 건넨다.

강계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 꺼리는 거의 없다. 발걸음을 띨 즈음에 소아마비로 집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바깥세상의 풍광이나 세시풍속 등에 대한 인상은 없다. 언젠가 겨울 소달구지 타고 부모님과 외가에 갔던 희미한 기억이 아물거리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떠오르는 영상이 없다. 집안 어른들 이야기로는 강계가 몹시 추운 곳이라고 한다. 기차로 1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만포를 거쳐 만주로 넘어간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江界誌』(강계 군민회, 1966)에 따르면 강계는 깊은 산이 둘려 처진 분지로 되어있어 몹시 춥다. 겨울이 길어 거의 반년 정도가 춥다고 한다. 어느 해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로 살눈섭이 얼어붙을 정도였다는 기록(1927년)이 있다. 산이 깊다 보니‘강계=포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사냥감이 풍부했다. 특히 꿩을 많이 잡는다고 한다. 좀 산다는 집이면 겨울에 꿩 수십 마리를 사서 광에 매달아 놓고 겨우내 동치미 막국수에 꿩으로 육수를 내고 고기를 고명으로 얹혀 먹는다.

강계는 미인의 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강계 사람들보다 오히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졌다. 친구들이나 동네 어르신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강계라고 하면 “아, 강계! 미인이 많은 곳... 그래서 너의 어머님이 미인이시구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풍수학설(風水學設)이 전하는 말을 이으면 강계의 산세(山勢)를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이라는 설도 있지만, 미인대경형(美人對鏡形) 즉 여자가 거울을 대하고 있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남산(南山)은 윗몸(上半身)이요, 좌우로 성벽이 쌓인 능선(稜線)은 두 팔이요, 바른편 인풍루(仁風樓)가 자리 잡은 우뚝 솟은 절벽은 바른쪽 무릎이요, 왼편 남장대(南章臺)가 자리 잡은 절벽은 왼쪽 무릎이요, 그 앞을 흐르는 독로강(禿魯江)의 옛날 나루터 넓은 수면은 거울이며, 지금 경찰서 앞 로오타리 앞에서부터 우무러지기 시작한 지점은 연인의 XX요, 거기서부터 하수(下水)가 개울 져 내리는 골을 여인의 다리 살이라 한다.”(위의 책, 289~290면)  

화석화된 피

난 가끔 강계가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생각해보곤 한다. 하지만 나에겐 뚜렷하게 어떤 지리적 조건이나 환경적 영향이 미쳐왔던 것은 없다. 다만 토박이 강계 태생의 부모님의 성격과 성향 같은 것에서 간접적으로 향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게 전부였다.

아버지(韓元福)는 애주가였으며 절주가 셨다. 조반상을 받으시면 먼저 주발 뚜껑에 약주를 부어서 한잔하시곤 수저를 드셨다. 과묵하시면서 조용히 시간 갖는 것을 즐기셨다. 전쟁 직후인데 독일제 로르드멘데(Nordmende) 전축과 유명 작곡가들의 클래식 음반 전집과 낱장 판들, 도넛 판도 수십 장 사오 셔서 들으시곤 하셨다. 하지만 전축은 내 방에 넣어 주셔서 실제로는 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친구들이 음악을 들으러 오곤 했다.

어머니(金雲植)는 인정이 많고 점잖은 분이다. 성격은 다소곳한 편이지만 매우 강하시다. 외유내강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난 나 자신이 부모님의 이런 성격을 섞어 받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런 걸 실감하기도 한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다가도 불같은 성질이 불끈불끈 솟아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참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새삼 느끼곤 한다.

요즘에야 이북 사람들이 70여 년 지나며 많이 개조되어 인간의 기질과 본능이 변했겠지만, 원래 평안도 사람은 급한 성격과 불같은 성깔, 그리고 서로 옥신각신 다투고 싸워도 뒤끝 없이 깨끗이 잊고 새로 시작하는 화끈한 면이 있다. 나는 조용하고 절도를 지키며 강인한, 말하자면 내성적이고 감성적이며 겨울이 긴 밤을 즐기는 성향으로 됐다. 내가 강계 출신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도 이런 풍토적 기질이 몸을 형성한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것 때문이다.

가을밤의 나룻배

1947년 봄 어느 날 아버지는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가족 여섯 명과 둘째 형님네 가족 다섯 명을 데리고 평양, 사리원, 원산, 철원 등지에서 몇 달을 보내며 월남 안내원을 수소문하여 사서 가을 어느 그믐날 밤에 나룻배로 임진강을 건넜다. 이렇게 우리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창신동 셋집 큰딸 해선이는 어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따랐는데, 얼마 후 어머니와 의자매를 맺고 손목 안쪽에 좁쌀만 한 먹물문신을 했다. 그 밑으로 해월이, 화자, 계자가 있었는데 화자는 나와 나이가 같아서 소꿉친구로 지내곤 했다. 맏이는 오빠였는데 늘 아침 일찍 나가서 본 기억이 없다. 집주인 노인 두 분은 별로 말이 없으신 점잖으신 분이었다. 양반으로 사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년 정도 그곳에서 살고, 방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에는 홀아비 영감 한 분만 있었는데, 자녀들이 모두 다른데 사신다고 했단다. 어머니는 식사 때마다 영감님 안쓰럽다며 식사를 차려 갖다 드렸고 빨래도 하여 모시옷 풀 먹여 다려 드리곤 했다. 영감님은 아들뻘 되는 아버지에게 “한 선생님”이라 부르곤 하셨고, 아버지도 늘 공손히 대해주셨다. 집에서 할머니나 아버지 생신에 별식을 할 때는 할머니께서 영감님 먼저 챙겨드리라고 채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집 대문을 나가면 담에 붙여 지어진 집이 있다. 이 집에는 박동수라는 남자아이와 진자라는 여자아이, 이렇게 오누이가 있는데, 우리와 나이가 비슷해서 같이 놀곤 했다. 그 건너편 집에는 이충곤이라는 귀가 좀 먹은 아이가 살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다섯이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자주 동대문 교회 옆 허물어진 낙산 성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낙산으로 가서 놀기도 하며 재미있게 지냈다.

3개월의 지옥 생활   

부모님은 남한에 정착하며 양복점을 하셨다. 이렇게 1년이 지나고 1949년 나는 여동생과 창신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같은 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한글과 숫자는 어머니가 미리 가르쳐주셨고, 쓰고 외우며 익혔기에 학교에 입학해서는 어려움 없이 즐겁게 1년을 마쳤다. 2학년이 되어 여름 무더위가 이어지던 때 6·25 전쟁이 났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어머니가 와서 어떻게 할 것인지 피난을 이야기하여, 어머니가 모든 준비를 할 테니 다음 날 와서 함께 남쪽으로 피난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가지고 갈 것을 챙겨 놓고 다음 날 큰집 가족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큰집에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전날 저녁으로 바로 서울을 떠나 공주에서 과수원 하시는 큰 누님(우리에겐 큰고모)댁으로 내려간 것이다. 큰집 기다리다 피난 못 간 우리 가족은 9·28 서울 수복 때까지 두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 신관 201-2호
  • 대표전화 : 02-3673-0123
  • 팩스 : 02-3673-01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종권
  • 명칭 : 크리스챤월드리뷰
  • 제호 : 크리스챤월드리뷰
  • 등록번호 : 서울 아 04832
  • 등록일 : 2017-11-11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임종권
  • 편집인 : 임종권
  • 크리스챤월드리뷰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크리스챤월드리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