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4)
시간의 여행(4)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04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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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의 접점에서

시간과 공간

   나의 불행했던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내 맘에서는 흐름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새로운 강물이 대하를 이루며 청청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나의 세계관을 엮어가고 있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나를 성숙시켜갔다.

  우리 집에서 나는 두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이 층에 있는 6평 정도의 다다미방과 그 앞에 그 정도 크기의 베란다가 붙어있는 방이다. 이 층 계단을 올라와서 복도 왼쪽으로는 내 방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4평 정도 되는 여동생 방이 있다. 방마다 미닫이 벽장이 붙어있었다.

  어머니는 남대문에서 미제 병원용 철제 접이식 침대를 사 오셔서 내 방에 넣어 주셨다. 앉았다 일어나는 게 불편하고, 몸을 세우기도 하고 피곤한 다리를 올리기도 할 수 있어 내가 편하게 지내게 하려 신경 쓰신 것이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 라디오(Hitachi)도 사다 주셔서 나는 여유 시간에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기도 하고 눈을 감고 곡을 감상하며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곤 했다. 침대 스프링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며 철선 튕기는 소리를 냈지만 나는 그 소리마저도 나의 몸이 만드는 음악이란 생각을 하며 공간 내의 침대 위에서 내 시간을 차곡히 채워 나갔다.

  방학 때나 학교에 안 가는 날에는 주로 이 층에서 지냈는데, 거기서 자고 점심때가 되면 일하는 처녀애가 상 차려 가져와 거기서 먹으며 나만의 세상에서 나는 주인으로 삶을 즐겼다. 아래층 부모님 방은 일 층 뒤쪽에 있어 나는 아무런 조심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은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기도 하고, 라디오 채널을 돌려가며 음악, 명사들의 수상 등을 들으며 점점 나의 정신세계를 넓혀갔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내게 주어진 공간은 나의 시간이 채워져 가며 새롭게 창조되어가는 세계였고, 꿈이 잉태되어가는 자궁이었다. 내 시간을 채워가는 것은 시간 내에 존재하는 나만의 공간이었고, 거기서는 내가 나를 찾아가며 점점 나를 성숙시켜갔다. 여기서 나는 나의 공간을 찾았고, 나의 시간을 찾았다. 훗날 내가 시간을 거슬러 수천 년의 학문 세계를 한 줄에 꿰뚫어 엮을 수 있었던 것도, 동서양의 문화 공간을 넘나들며 나의 지평을 거기 한구석에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 싹터온 시간과 공간의 유희로 창조된 춤사위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침대 옆 벽 쪽으로는 커다란 책상과 네 칸으로 된 나무 책꽂이, 그리고 좌우 상하로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제도용 스탠드가 놓여있었다. 가끔 비 오는 날에는 커튼을 치고 스탠드 삿갓을 천정으로 돌려놓아 우울한 방 분위기를 아늑하게 하고 음악을 듣거나 글을 썼다. 편지와 잡글도 많이 썼는데 후에는 창피스럽고 너무 유치해서 찢어버리기도 했지만, 문학과 음악에 관한 관심은 내게서 떼어낼 수 없는 살과 피, 몸과 영혼을 만들어 갔다.

광나루 강가의 추억

  어느 여름날 어머니는 아침부터 내게 오늘 어디로 가자며 준비하라고 하셨다. 택시를 잡아타고 간 곳은 광나루 유원지였다. 지금은 워커힐 건너편이지만 1950년대에는 잡석과 모래가 섞인 강가 기슭이었다. 군데군데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채소밭과 옥수수 같은 것이 심겨 있었다. 그곳은 그때까지도 광주군에 속하는 시골이었다. 거기에 보드 대여하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배 앞머리에 어머니가 앉으셨다. 나는 노를 저으며 광나루 다리 밑 멀리까지 내려갔다 거슬러 올라왔는데 날씨도 덥고 거슬러 올라오는 데 힘도 들어 땀범벅이 되었다. 그늘막에서 군것질거리로 점심을 때우고 냉차와 빙과도 먹으며 어머니와 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가끔 왜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그날 거기에 갔을까? 여동생은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중학생인 남동생은 보이 스카우트 야영에 참여해서 떠나고 하는 등 이런 모습을 보며 방안에만 있는 내게 어머니가 나와 밖에서 하루를 보내주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훗날 사진을 보며 추측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그 속 맘을 헤아려 보지만, 어머니가 내게 전하려 했던 묵언에 담긴 뜻을 그 이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모습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며칠 후에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용 팔각형 대형 천막(일명 몽고 천막이라고 불리던)을 사 오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직원을 데리고 광나루 강기슭에 가서 천막을 치고, 사촌들까지 불러 여섯 명이 야영하게 했다. 그리고 이모와 함께 매일 식량과 부식 거리, 밑반찬들을 해오시고, 간식과 과일 등도 가져다주셨다. 우리 6명은 매일 밥을 해 먹으며 강에서 놀며 피서를 했다. 매년 여름마다 행사처럼 야영을 계속했는데,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부턴 한 번도 천막을 펴보지 않았다.
 

겨울 나그네  

  겨울이 되면 나는 아래층 내 방으로 내려간다. 6평 정도 온돌방인데, 우리 6형제 자매들의 삶의 공간이다. 마당 쪽으로는 40cm 정도 내밀려진 난간이 있는데 바깥쪽으론 투명한 여닫이 유리문이, 방안 쪽으론 불투명한 유리문이 있는 방이다. 방안 벽 쪽에 옷장과 이불장이, 그리고 그 한쪽 벽에는 LP 40장 정도 세워 꽂게 된 장이 붙어있는 독일제 전축이 있었다. 단파 라디오를 돌리면 이상한 외국어 방송도 잡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신호음도 잡혔다. 하지만 우리는 주로 클래식 음반이 돌아가며 흘려보내는 노래를 감상하거나 라디오 청취를 하며 지냈다.

  10월부터 3월까지 반년 동안 우리는 숙제도 하고 점심 후에는 노래를 부르며 놀았는데, 나는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고, 때로는 동생들과 세계 민요를 부르며 지냈다. 이 층과는 다르게 이 공간은 나를 공동체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겨울을 보내며 가끔 내 시간을 가질 때마다 나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곤 했다.

  눈이 쌓여가며 눈보라 치는 소리가 유리창을 흔들곤 하는 겨울의 쓸쓸함과 고적함은 나의 미래를 꿈꾸는 데 많은 시간, 깊은 생각을 이끌어 갔다. 나로서는 뚜렷이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겠다는 어떤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생각이 바뀌고, 그럴 때마다 때로는 실현 불가능성을 생각하며 실망하곤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을 새워가며 생각해 봐도 내겐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이 공간은 잠자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6남매의 삶의 자리로서 항상 우리의 관계가 쉼 없이 이어지며 우리의 삶이 영글어가는 공간이었다. 여름 동안 나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겨울이면 다시 함께 살을 비비며 호흡하며 지낸다는 것은 일 년의 두 가지 삶의 체험에서 나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 공간은 여름 공간과는 느낌부터 달랐다. 공간의 질적 차이는 물론, 시간의 질적 차이도 내게는 두 세계를 경험하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귀한 곳이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뚜렷이 달라진 것이 없는 듯이 보이는 곳이지만 그곳은 천진난만한 어린 영혼의 순결한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긴 겨울 방학 동안 나는 독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싫으나 좋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것이 최상이었다. 바로 밑 여동생은 친구들과 스케이트 타러 동대문 운동장으로 가기도 하고 친구들 집에 가거나 나가서 친구들과 놀다 들어오곤 하지만, 내게는 이 공간에서의 생활이 나의 삶으로 굳혀져 갔다. 어머니는 외출하셨다 오실 때마다 호떡이나 붕어빵, 군고구마, 과자 등 군것질거리를 사오서 우리 방에 넣어 주셨다.  

  11월 말이나 12월 초가 되면 오장동 중부시장 앞 공터에 김장 시장이 서는데 어머니는 직접 가셔서 배추와 무를 골라 큰 리어커 두 대에 가득 실어 와서 마당에 내려놓고 송씨 부인과 박씨 부인, 피난 와서 어렵게 사는 친척 아주머니들을 불러 며칠씩 김장을 했다. 나는 가을에 사서 말려두었던 고추와 마늘을 쇠 절구에 빻는 일을 도왔다. 아주머니들은 할머니 방에서 숙식을 같이하며 김장을 도와주고 갈 때는 큰 양은 대야에 김장김치를 가득 담아 택시를 잡아 태워 보냈다. 송씨 집과 박씨 집에도 나눠주고, 둘째 큰아버지 집에는 겨우내 먹을 수 있게 많이 보냈다.

  우리 집은 종류별로 김장을 한다. 소뼈를 박아넣은 김치, 동태를 토막 내 포기 사이사이에 넣은 김치, 아주 실한 조선무를 엄지손가락 굵기만큼 둥글게 썰어 원반 그대로 넣은 김치, 몇 가지 재료를 더 넣은 보쌈김치 등등. 우리 집은 동치미를 많이 담갔다.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사이다처럼 쩌릿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국수는 우리 집의 겨울 별미였다. 특히 아버지가 국수를 좋아하셔서 늦은 밤에도 동치미 국수를 밤참으로 드셨다. 어느 날 밤에는 어머니가 메밀묵 장사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일하는 처녀에게 사오게 하여 메밀묵을 채 썰어 동치미 국물에 말아 아버지께 드리거나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참깨와 참기름으로 양념을 하여 비벼드렸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같이 드셨고 어머니는 내 그릇을 상 옆에 놓아두곤 하셨다.

  할머니는 이가 좋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김장 때면 할머니를 위해 삶은 무김치를 해드렸다. 강계에서 자주 해 드시던 김치라고 했다. 아삭하지는 않아도 속까지 쩌릿하며 쉽게 씹혔다. 할머니는 친척 어른들이 오시며 양과자나 과일 같은 것을 사 오셔서 드리면, 남기셨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주셨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의 그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리곤 하면서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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