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6)
시간의 여행(6)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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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의 접점에서

생성과 형성

 

  나는 첫 학기가 퍽 궁금하기도 하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두렵기도 했다. 「종교와 기독교」(문상희), 「현대 영어」(이선애), 「영어강독」(배동호) 「사람과 사회」(김명희), 「사람과 사상」(김태길), 「사람과 우주」, 「독일어」(정경석) 같은 교양과목 시간에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학자들의 이름과 저서들이 나열되었다. 강의 내용도 거의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강의에 대한 두려움은 차츰 사라져 갔지만,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 대한 무지함은 나를 더욱 옥죄었다. 나는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없기에, 맨몸으로 수업에 참석하곤 저녁에 집에 와서 오늘 강의 시간에 배운 부분을 읽어가며 교과서적 지식을 넓혀갔다.

 

  전교생 4천 명이 둘로 나뉘어 매주 2번씩 채플에 참석해야 했다. 조교들이 이 층에서 지정 좌석(내 좌석은 E-14)의 출결을 체크 했다. 4년간 채플에 드나들며 많은 얼굴들이 익혀졌다. 물론 서로 통성명은 안 했지만, 좌석을 보면 어느 학과 학생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연고전 준비로 학교는 북적거렸다. 노천극장에서 응원가를 배우고 구호를 외치며 며칠 동안 연습을 하곤, 축구, 야구, 농구 등이 열리는 경기장마다 참석했다. 반짝이 붙은 화려한 응원복을 입은 남녀 응원단 학생들과 악대, 응원단장이 무대에서 응원단을 이끌며 열기를 더해갔다. 그때 응원단장은 요즘 말을 빌리면 우상이고 스타였다. 신입생들에게는 애교심과 공동체 의식, 대학생의 긍지를 북돋아 주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차츰 나는 대학 생활에 적응해 가며 교과서와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책이나 잡지(『사상계』, 『기독교사상』, 『신학논단』 등을 비롯한 학술지)의 기사들이 나의 세계관을 넓혀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당시 독서가 훗날 나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분야에서 나를 성숙시켜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대학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물론 추상적 공간 개념에서도 나는 내가 그곳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지체며, 거기서 나를 형성해 간다는 의식을 해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공간이 나를 구속하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빚어가며 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유해 본다면 신대륙에서 미개척지를 찾아가며 영역을 넓혀가는 개척자의 모험심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겨나며 나는 나의 앞길에 대한 비전을 조심스레 그려가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나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61년 6월 29일(목) “슬픈 음성”이라는 창작 시 제목이 내 학생수첩에 적혀있는데, 그 원고는 찾지 못했다. 시상이 번뜩일 때마다 시를 썼다. 행정학과 3학년 선배(최연홍)가 등단한 시인이었는데, 그 형과 가까이 지내며 시작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절의 변화나 감정의 감성 기폭에 따른 시들이 많았다. 『연세춘추』에도 3번 발표했다. 국문과 교수가 주간이셨는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힌 작품만을 게재했다. 오혜령은 단편소설을, 마종기와 최연홍은 시를 자주 발표를 했다.

  1963년 연대에서 영어신문(「The Yonsei Annals」)을 창간했는데, 창간호에는 각계의 축하 글로 채워졌다. 나는 영어로 시를 지어 기고했는데, 제2호에 실렸다. 연세 영어신문 창간 후에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나의 시(「A Song of Lamentation」. January 21, 1963, p. 4.)가 실린 것이다. 그해 10월에도 영시 한편을 발표했다. 영어로 단편소설도 한 편 썼는데, 영어 문학지가 없어 발표하지 못하고 원고만 지금 갖고 있다. 연합신학대학원 때는 단편소설 「깃발」을 써서 『참빛』잡지에 세 번에 걸쳐 발표했다. [『참빛』 제2권(1966), 6~8호.]

  1963년 12월 5일 젠센홀에서 이대와 연대가 공동으로 「연이 문학의 밤」 행사를 했다. 이대에서는 이영은, 한경자 등 육칠 명이 참석했고, 연대에서도 그 정도 참석해서 각자 시 한두 편씩 발표했고, 발표 후엔 다과를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어머니와 복덩이 이모(어머나 6촌 동생)가 참석했다. 그 당시 문학의 밤이나 시화전 같은 것이 대학 교정에서 봄 개교기념 축제 때나 가을에, 때로는 초겨울 정취가 마음을 헤집고 아리게 스며들 즈음에 시내 지성인이 모이는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문학 공간 같은 곳에서 자주 열렸다. 이런 곳은 대학생들의 사랑과 자유, 낭만의 해방공간이기도 했다. 때로는 거기서 문예의 감상주의가 꽃피기도 했고 아방가르드와 에로티시즘의 한계 설정으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학에 관한 관심은 가끔 작가가 되려는 욕망으로 내 몸속에서 꿈틀거렸다. 20세 초반의 나이에 미래의 자아를 설계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언제나 가변적이었다. 신학과 교수님 중에 강의를 잘하시며, 인격자이신 분의 강의를 들으면 신학자가 되고 싶고, 철학과에서 선택과목을 들을 때는 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대학 생활은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졸업 때는 그 환경이 고향 같은 포근함으로 다가왔다. 신학의 학문성에 중독된 듯이 매료되어가면서 신학을 좀 더 깊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학에 대한 표피적 이해가 더 알아가려는 욕망을 자극한 것이라 하겠다.  

  우선 연합신학대학원(UGST)에 진학할 결심을 하고, 4학년 2학기부터 시험 과목에 해당하는 학과를 차근하게 점검해 갔다. 연합신학대학원의 신학전공 시험 과목은 성서신학(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 역사신학(한국교회사, 서양 교회사), 기독교 교육학이었다. 영어와 제2외국어 시험은 인문·사회, 이공계 학과와 상관없이 대학원 응시자가 모두 똑같은 문제로 시험을 치렀다. 첫날에는 오전에 세 과목, 오후에 세 과목, 이렇게 전공 필기시험을 치렀다. 둘째 날에는 영어와 제2외국어(나는 독일어를 선택), 면접고사를 치렀다. 면접 담당 교수님은 전공을 선택한 이유, 졸업 후 무엇을 하려는지 등등 몇 가지를 물으셨다.

  1주일 정도 후에 합격자 발표를 했다. 나는 친구들이 연락해 주어 합격 소식을 알고, 학교에 등록금 입학금 고지서를 받으러 갔다. 학교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오시던 이규호 교수님을 만났는데, 내가 이번에 연대 전체 독일어 시험에서 일등 했다며 칭찬해주셨다. 이 교수는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른 대학에 잠깐 계시다가 연대 철학과 교수로 오셨다. 나는 4학년 1학기에 이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현대철학의 이해」(3학점)라는 과목을 수강했는데,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연합신학대학원 사무실에 들어서니 사무원이 원장님 방으로 가보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원장님이 나를 반가이 맞으시며 연합신학대학원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다며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몇 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더니, 작년에 입학해서 병으로 휴학하고 이번에 등록하는 시골 학생이 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렵고 하니 한 군에게 나오는 수석장학금(입학금과 등록금)을 이 학생에게 양보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를 부르신 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원장님의 말씀이고 하여 주저 없이 원장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했다. 원장님은 바로 옆방 사무원을 부르시더니 그렇게 조처하라고 지시하시곤 내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시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다.

만남

  입학식이 끝나고 사무실에서 수업시간표와 학생수첩(53006)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나는 그 자리에서 기숙사 입주신청을 했다. 건물은 1층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원장실과 사무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숙직실과 세미나실이 몇 개 있다. 지하에는 작은 예배당과 도서관, 샤워실과 보일러실이 있다. 2층에는 방 20개 정도가 있는데, 각 방에는 양쪽 벽으로 침대와 책상이 있었다. 정면으로는 학교를 내려다보게 되어있어 전망이 좋았다. 건물 밖 잔디밭을 지나 왼쪽에 「평화의 집」이라는 간판이 붙여진 식당이 있다. 학기 중에는 주말만 쉬곤 늘 식사를 할 수 있으며, 기숙사생은 식권을 제출하고 음식을 가져다 먹는다.

  연합신학대학원 건물은 언덕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건물을 둘러싸고 숲이 우거져 여름학기 더운 오후에는 숲에서 책을 읽거나 방문 온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방이 배정되었다. 연합신학대학원은 1964년 국제선교협회(IMC)의 신학교육기금(TEF=Theological Education Fund)으로 설립되었다. TEF 재단의 방침은 신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된 목사님을 단기재교육과정(한 학기) 연구생으로 선발하여 대학원생과 한방을 쓰게 하라는 것이었다. 목사님들에게는 급변해가는 신학의 흐름을 배우고, 학생들에게는 목회 현장의 이야기와 경험 같은 것을 들으며 배우라는 취지였다. 목사님들에게는 학비와 기숙사비, 식비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나는 울산에서 목회하시는 윤응오 목사님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목사님은 나보다 10여 년 위신 데, 늘 싱글거리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셨다. 저녁 식사 후 방에 오시면 현대신학 흐름이나 최근에 화두로 회자 되는 신학 문제 등에 관해서 꼬치꼬치 물으시고 설명해드리면 바로 비판하시며 퍽 진지하셨다.

  그 당시 “신 죽음의 신학(The Death of God Theology)”, “세속화 신학”, “토착화신학”, “과정 신학” 등등 다양한 신학이 세계신학의 한 축을 흔들었다. 하비 콕스(Harvey Cox), 바하니안, 토마스 알타이저, 로빈슨, 본회퍼 등등 신세대 신학자들의 논문이나 관련된 글이 신학 잡지의 지면을 채우곤 했다. 한국 신학계에서는 토착화신학에 관한 논쟁으로 신학자들(윤성범, 이종성, 한철하, 유동식, 박봉랑 등등) 간에 감정이 상하는 일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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