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9)
시간의 여행(9)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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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삶의 전환점
대학원 1학년 때 경주행 버스에서
대학원 1학년 때 경주행 버스에서

신학석사 논문

   2학년이 되니 석사 논문 주제를 정하는 것과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5월 말까지 논문 지도교수와 논문 제목을 정해 대학원에 제출해야 한다. 조직신학으로 석사 논문을 쓰려는 학생은 이종성 교수와 서남동 교수 두 분 중에 정해야 한다.

  나는 학부 2학년 때부터 다섯 학기, 그리고 대학원에서도 두 학기 서남동 교수 과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관계 때문인지 1966년 4월 22일(금), 저녁 6시 30분, 서 교수님은 나를 댁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며 여러 말씀을 해 주셨다. 내가 석사 논문을 본인 밑에서 쓰리라고 확신하셨던 것 같다. 그 후 며칠간 나는 두 분 교수님에게서 배우던 과목들을 떠올리며 어느 분에게 무엇으로 논문을 쓸 것인지 어떤 선택이든 해야 했다. 나는 대학원 첫 학기부터 이종성 교수님 밑에서 논문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나는 5월 13일(금) 「평화에 집」에서 이종성 교수님께 논문에 관해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허락을 해 주셨다. 나는 신청서에 논문 제목과 목차, 연구 목적 및 방법, 참고문헌 목록 등을 적고, 지도교수 성명란에 이종성 교수 성함을 적어 제출했다. 논문 제목은 “파울 틸리히의 역사철학 연구”였다. 나 외에 이태우 군도 이 교수님 지도를 받으며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신청했다.

  서 교수님은 내가 본인 밑에서 논문을 쓰리라고 믿었다가 그 기대에 어긋나자 섭섭함을 비추셨다. 지도교수가 정해지고 얼마후 학교에서 오가며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한 군이 철학적 신학에 관해서 논문 쓰리라고 생각했는데...” 이 한마디 말씀만 하시곤 가버리셨다.

  논문 목차를 몇 번 고쳐가며 새로 만들고 참고문헌을 수집하며 1학기를 마쳤다. 여름방학에는 우편엽서만 한 카드에 틸리히 원서를 읽으며 번역해 정리했다. 학교 도서관에 있는 틸리히 원서들과 그의 신학과 관련된 서적들도 대출해서 읽고 정리한 후 반납하고, 역사철학과 관련된 여러 저자의 저서도 빌려와 읽으며 여름방학을 보냈다. 원서들을 정독하며 핵심만 간추려 압축한 카드가 200여 장 되었다. 틸리히의 저서를 모두 독파하고 그의 신학에 접하면서 역사철학을 규범, 구조, 방법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내 나름의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며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게 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틸리히에 관한 여러 학자의 저서를 읽으며 비판의 관점을 새겨 두어야 하는 데 그 당시 연대 중앙도서관에는 이와 관련된 자료가 한 권도 없었다. 연합신학대학원 내의 도서관은 1년 전에 개관했는데, 미국 TEF에서 기증한 해묵은 도서들이나 미국 신학교에서 폐기하거나 복본으로 분류된 낡은 도서들로 채워져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급한 대로 광화문에 있는 외국 도서 취급 서점에 가서 종교와 신학 서가를 뒤져보다 찾는 책이 없으면 항공 주문을 하여 받기도 했다.

  11월 16일(수)부터 목차에 따라 원고 작성을 했는데, 한 달 만에 200자 원고지 200여 장 분량의 초고를 완성했다. 12월 중순부터는 초고를 읽어가며 문장을 다듬고, 용어를 바꾸고, 어휘를 고쳐가며 원고를 완성했다. 영어로 초록도 작성해 붙여 제출 기간 첫날 사무실에 제출했다.

재일교포 김신환 목사님과 여행 중에
재일교포 김신환 목사님과 여행 중에(왼쪽사진)                                                  경주에서 박선자와(오른쪽 사진)

미국이냐 독일이냐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연말을 보내며 졸업 후를 설계하고 있었는데, 1월 초 어느 날 이종성 교수님이 집으로 부르셨다. 와서 논문을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연희동 교수님 댁을 찾아갔는데, 사모님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다. 식사를 마치자 교수님은 사모님이 타 오신 차를 권하며, 논문을 내주시곤 “아주 잘 썼다, 바로 논문제본소에 넘겨도 된다.”고 하시며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시곤 졸업 후에 무엇 하려는가 물으셨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미국에 유학 가라며, 본인이 졸업한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가면, 장학금도 받도록 해 주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독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규호 교수는 내게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 가서 볼노우(Otto Friedrich Bollnow) 교수 밑에서 철학 공부를 하라며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이 교수는 볼노우의 가르침을 받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집에 와서 논문을 넘겨보니 빨간 볼펜으로 토씨와 띄어쓰기 몇 군데, 불필요한 한자 몇 자를 삭제하였을 뿐 깨끗했다.
   1967년 1월 16일(월) 학교 제출용 논문(양장본) 8부를 사무실에 제출했다. 이 교수는 학교 보관용 제출 본에 A를, 서남동 교수와 한태동 교수는 B를 적고 날인 했다.

김용화와 필자(왼쪽사진)   재일교포 유학생 이태우와 필자(오른쪽 사진)
김용화와 필자(왼쪽사진)                                                                      재일교포 유학생 이태우와 필자(오른쪽 사진)

전환점

나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여러 인물과 만나고 접촉하며, 삶의 폭과 의식의 세계를 넓혀나갔다. 비유적으로 말해본다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하늘의 극히 일부만을 보다가 그곳을 벗어나 무한한 세계에 던져지면서 내 삶에는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내게는 모든 것이 열려있었고, 내가 숨겨진 나를 찾았다는 자아발견의 환희에 나의 나날은 기쁨이 넘쳤다.

  연세대학교는 내게 삶의 세계였으며 내 인생관을 형성해가는 수련의 장이었다. 여기에서 6년 지내며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변했다. 우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영적 깊이를 간파할 수 있었고, 그 깊이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좀 추상적 이야기 같은 데, 풀이해보면 내가 만난 사람은 한결같이 친구가 되고,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 가까워지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관계성을 형성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말하자면 인간의 삶이 환상적 실체로 꾸며진 것이 아니고 그 핵심에는 사랑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어떤 관계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서로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겠지만 나는 이 개념을 인간관계의 순수성 같은 것이라고 확신하며 사용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친구 간에도, 가족 간에도, 초월적 존재인 신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그 관계성을 사랑이라고 쓴다. 학자에게는 학문에 대한 열정 같은 것, 예술가에게는 미학적 에로티시즘을 영혼으로 창작하는 예술혼 같은 것, 이런 다양한 이해를 동반하는 이 개념을 찾았다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어느 날 내가 형성되어 왔던 과정을 뒤돌아보며 나는 자신감이 나를 형성해 온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그 농도가 달라진다. 나는 여러 면에서 부족했지만, 연세대학교에서의 6년간 공부하며 실력이 딸려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거나 좌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학부 때 교수님들은 내가 교과서나 노트도 없이 수업에 참석해 앉아있곤 했으니 공부할 자세가 안 된 불량한 학생으로 여겼을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교과서를 펴놓고 줄을 쳐가며, 강의 요점을 노트에 적어가며 수업을 받는데, 그저 칠판만 보고 앉아있으니. 게다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결석을 하곤 했으니, 성적도 좋지 않았다. 교수님들 눈 밖에 난 학생이었다.

  내가 신학과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연세춘추에 시도 몇 차례 발표하고, 영어신문에도 연거푸 영시를 발표하자 교수님들은 복도에서 만나면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학원에 수석합격을 하면서 신과대학 교수님들의 나에 대한 편견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1기 입학시험 때는 타 신학교 출신이 수석을 해서 신과대학 교수님들 체면이 서지 안았는데, 2기 때 내가 수석을 하니 모두 축하하며 너무 기뻐하셨다. 특히 김찬국 교수님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곡간에 식량을 차곡히 채워 놓아 춘궁기에 남들이 식량을 얻으러 오면 나눠줄 정도가 되어야 자신감이 생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삶의 순간순간이 창조적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된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순간 그것을 채워가기 위해 노력할 용기가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용기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나에게 주어진 6년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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