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11)
시간의 여행(11)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14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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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뮌헨-튀빙겐-아헨의 합류
에리카 방(사진 왼쪽)   에리카 방에서 본 집 주변(사진 오른쪽)
에리카 방(왼쪽사진)              에리카 방에서 본 집 주변(오른쪽사진)

어학 과정

   대학에 입학하려는 외국 학생은 누구나 어학시험을 보고 그 결과에 따라 결정된 과정에서 독일어를 배우게 된다. 나는 3등급에 해당하는 「중급 2」(Mittelstufe II) 과정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5단계로 등급이 나뉘는 데 「중급 2」 과정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독일 내 어느 대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고, 그 이하면 입학 가능 등급에 합격할 때까지 계속 어학 과정에 다녀야 한다. 10월 15일(화)부터 어학 과정이 시작됐다. 각 나라에서 온 학생 20여 명이 함께 공부했는데,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온 학생들은 매우 낙천적이고 놀기를 좋아했다. 15분씩 쉬는 시간에도 손가락으로 마찰음을 딱딱 내거나 책상을 두드리며 노래하기도 하고 스페인어로 시끌벅적하게 떠들기도 하며 재미있게 지낸다.  
   3개월 독어일 과정(한 학기)을 마치고 입학자격시험에 응시했다. 문법, 작문, 듣기, 한 페이지 정도 되는 글을 읽고 요약하는 등의 시험을 몇 시간 보았다. 며칠 후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에리카 보르네

   10월 말경에 학교를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빨간 차 한 대가 지나가다 옆에 서며 어디로 가는지 묻고 같은 방향이니 타고 가겠느냐고 하여 동승했다. 젊은 여자였는데, 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나에게 어디서 와서 무엇하냐고 묻곤 자기는 교사인데,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기 이름은 에리카 보르네(Erika Borne) 라며 기숙사에 내려 줄 때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떠나갔다.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성격의 여자였다. 그녀가 떠나고 저 선생 반 아이들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며 나눴던 이야기를 되새겨 보았다.

  며칠 후 기숙사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녀는 이번 주 토요일 오후에 시간이 되냐며,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와서 나를 태우고 집에 갔는데, 여자 방이라 그런지 퍽 깨끗하다. 좌우 벽과 침대 벽에는 그림 4점이 걸려있고, 침대 머리 벽에 붙여놓은 작은 책꽂이, 책상과 2단 책장이 있는 방이었다. 현관문 오른쪽으로는 간이부엌(kochnisch)과 화장실이 있는 방이었다.

  다음 해 4월에 튀빙겐(Tübingen)으로 떠날 때까지 자주 만났다. 나의 제한된 생활을 알고 뮌헨 텔레비전 탑에도 데려가고, 알프스의 추크슈피체로 드라이브도 하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웃에 사는 에리카 반 학생들(왼쪽사진)  뮌헨 TV 탑(Olympiaturm)(오른쪽사진)
이웃에 사는 에리카 반 학생들(왼쪽사진) 뮌헨 TV 탑(Olympiaturm)(오른쪽사진)

  나는 뮌헨을 떠나며 그녀에게 그 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튀빙겐에서 얼마 후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에 원망과 서운함, 외로움과 고독이 서린 편지가 왔다. 명랑하고 성격이 개방적이며 서글서글한 그녀의 마음에서 무언가 나를 울게 하는 것이 묻어 나왔다. 우리는 많은 편지를 교환하며 서로의 생활과 이상과 미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5월의 편지에서 에리카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요즘 점점 우울하고 서글퍼져. 너무 외롭고, 너무 슬퍼.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아아,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해, 나는 울어야 해, 초침이 계속 달려가는 시계를 보며 기다려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잠을 청해야 해. …(중략)…. 너에게 이렇게 몇 줄 적다 보니 마음이 차츰 진정되어가며 슬픔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구나. …(중략)…. 뮌헨에서, 너의 에리카”(1969년 5월 2일).

  에리카는 나를 많이 생각하며 친구로 다가왔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이렇게 지내던 아름다운 추억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내가 튀빙겐에서 한 참 공부하고 있을 때 1970년 가을 결혼한다며 청첩장에 편지를 넣어 꼭 오라고 초대했다. 결혼식에 양가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이 참석할 텐데 이방인 남자가 하객으로 참석하면 누구냐고 수군거릴 텐데 옛 남자 친구를 초대하다니,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에리카가 신랑에게 무어라고 말할지도 궁금하고.

  나는 음반을 사서 결혼 축하 카드와 함께 보내주었다. “사랑하는 에리카에게, 너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유감스럽게도 결혼식에 뮌헨에 갈 수 없구나. 하지만 내가 언젠가 뮌헨에 가게 되면, 그땐 신랑(W. Pintgen)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겠지. 아름다운 결혼식,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진심으로 인사를 전하며, 너의 숭홍”(1970년 7월 16일).

  에리카가 내 나이 정도 되니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지낼 텐데, 주소를 알면 편지라도 띄우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에리카의 편지 한 구절이 지금도 내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다. “나는 너와의 우정을 결코 잃고 싶지 않아. 내가 너를 늘 생각하고 있다는 고백은 거짓말이 아니야! 뮌헨에서 에리카.”
   나는 첫 시집에서 에리카와의 추억을 애절한 그리움으로 노래했다.

에리카와 뮌헨 TV 탑 위에서(왼쪽 사진)   에리카(오른쪽 사진)
에리카와 뮌헨 TV 탑 위에서(왼쪽 사진)                             에리카(오른쪽 사진)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그날이 언제였던가
아름다운 시간에 마음 떨리던
가을의 어는 맑은 날
많은 세월이 지나고 또 흘러가
아, 이제는 날짜도 잊었다네

그대의 빨간 자동차로
뮌헨 교외로 떠났던 즐거운 오후
내 어찌 그곳에서의 하루
우리만의 아름다운 시간을 잊을 수 있으랴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대의 눈과 입술과 목소리만은 잊을 수 없을 터
아니 내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대를 잊을 수 없다네

그날이 언제였던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
그대와 첫 데이트로
사랑을 전했던 아름다운 때
그때를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그 아름다운 시간을 잊을 수 있으리오
아, 시간은 벌써 우리에게 조종(弔鐘)의 때
영원한 안식이 가까웠음을 전하는 듯
몸도 마음도 지쳐가건만
문득 그대 생각이 이 밤을 지새우게 한다오

아직도 그대는 뮌헨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있나요
이제는 소식도 알 수 없어 만날 순 없겠지만
함께 지냈던 시간의 추억도
이젠 현실 같은 떨림으로 다가오네요
내일에는 내일의 해와 달과 별을 보며
우리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겠죠
             
(한숭홍 시집 1, 『나무에게 배우다』,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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