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기
나는 특별히 임승기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조용하고 성실한 성품과 순수한 면이 소년 같은 깨끗한 인격자였다. 음악을 좋아하고 문학을 즐긴다. 옥토버페스트에도 두 번인가 같이 갔고, 뮌헨 과학박물관에도 그리고 영국 정원에도 같이 갔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빈 소년합창단 공연도 같이 갔었다.
1969년 독일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새해, 뮌헨은 눈에 묻힌 겨울의 도시로 변했다. 거리에는 자동차 지붕에 스키를 올려 묶고 오가는 차들, 두터운 털 코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 하여튼 도시 정경은 퍽 가라앉아 있었으며 차분했다. 1월 3일 임승기와 나는 기차로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 가서 케이블카(Seilbahn)로 슈네페른하우스(Schneefernerhaus)에 올라가 설경을 감상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내가 튀빙겐으로 떠나고 나서도 임승기와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곤 했는데 1970년 2월 21(토), 『Von Hegel zu Nietzsche』(Karl Löwith)라는 책과 편지가 동봉된 소포를 보내주었다. 내가 보냈던 편지에서 니체에 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책을 보내준 듯하다.
나는 가끔 멘자에서 점심을 먹고 영국정원(Englischer Garten)에 가서 산책하며 지내곤 하는데, 3월 10일 한국 유학생 여러 명이 어울려 와서 나도 합류하게 되었다. 이덕호, 이인웅, 임승기와 통성명을 했는데 지금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몇 명, 그리고 마인츠에서 간호사로 있는 여자분도 있었다. 송영자라며 자기 이름을 소개했다. 그 여자는 남독으로 여행 중에 뮌헨에 들렸다 우연히 한국 학생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저녁 기차로 올라가는 데 가서 사진을 보내주겠다며 각 사람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지고 중국 탑 근처, 모노톱리스까지 걸으며 가을로 접어든 뮌헨의 공기에 취했다. 그날은 모처럼 날씨가 화창했고 높새바람(Foehn)도 없었다.
브리기테 볼만
3월 말경 나는 뮌헨을 떠나 튀빙겐으로 옮겨왔다. 브리기테 볼만(Brigitte Bollmann)이 겨울 방학이 되어 코블렌츠(Koblenz) 집에 가는데 나를 튀빙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브리기테도 같은 기숙사에 살았는데, 한국 남자 친구 때문에 한글을 배우겠다고 해서 내가 한 주일에 두 시간씩 가르쳐 주곤 해서 나와도 친해졌다. 뮌헨 떠나기 전에 좋은 곳을 드라이브시켜준다며 에탈수도원(Benedictiner-Abtei Ettal), 린더호프궁전(Königsschloss Linderhof)에도 데려갔다. 눈이 와서 눈에 덮인 겨울 궁전을 본 셈이다. 며칠 후 나는 뮌헨 생활을 접고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많이 담고 튀빙겐으로 떠났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 어떤 것, 아름다운 경치나 환경보다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알게 되고 사귀며 가슴에 와닿는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 간의 만남보다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을까.
튀빙겐
뮌헨에 있을 때 튀빙겐 대학교에 기숙사 신청을 했다. 그런데 4월 15일에 라이프니츠-콜렉(Brunnenstrasse 34)에 들어갈 수 있다며 그때까지 머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있는 기숙학사 주소를 보내주어 그곳에 도착했다. 내게 배정된 방은 1층이었는데, 브리기테는 짐을 넣어 주고 행운을 빈다며 작별인사를 하곤 떠나갔다. 북쪽으로 몇 시간을 올라가야 하므로 밤에나 도착할 텐데, 나 때문에 몇 시간이 늦어졌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생각이 스쳤다. 한국어를 가르쳐주며 친하게 지냈던 인연이 내게 예상치 못한 호의로 이어진 것이다.
학사 1층에는 공동 세면실과 샤워실, 작은 취사장이 있다. 샤워하려면 수전 옆에 붙어있는 철제 통에 50페니히 동전 하나를 넣고 수전 꼭질 틀면 5분 동안 물이 나온다. 물이 더 필요하면 동전을 또 넣어야 한다. 건물은 낡았지만, 실내 구조와 분위기는 매우 아늑하고 옛 정취가 그대로 느껴져 집에 있는 것 같았다. 뒷마당은 잔디와 일광욕할 수 있는 접이식 의자들과 빨랫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개학일이 다가올수록 나는 독일 대학교에서는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럴 때는 그 근처 숲으로 산책을 하거나 라운지에서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뮌헨에 있을 때 튀빙겐에 도착하면 거주신고를 하고 서류원본을 제출하라는 편지를 받았기에, 주말을 지나고 월요일에 학교 유학생학생처(Akademisches Auslandsamt)에 가서 거주신고를 하고, 요구하는 서류들(어학증명서, 학사학위증, 석사학위증, 대학과 대학원 성적증명서, 여권, 뮌헨 대학에서 지정한 병원에 가서 받은 건강 검진 서류 등)을 제출하니, 확인하곤 즉석에서 복사해 확인 공증인을 찍은 후 원본을 돌려주었다.
라이프니츠-콜렉
개학하는 날 라이프니츠-콜렉(1948년 설립)에 가서 사감(Dr. Henning Siedentopf)을 만났는데, 내방으로 안내를 해주고 짐을 넣어 주었다. 이번 학기(SS 1969)에 남녀학생 57명이 들어온다며 나에 관해서 몇 가지 묻고는 기숙사 생긴 내력과 규칙이 적힌 안내서를 건네주었다. 이 기숙사는 숙식이 제공되며, 2인 1실을 쓰게 되어있는데, 내게는 대학원까지 마치고 온 시니어라며 독방을 내주었다. 외국 학생은 7명이었다. 개학일이 아직 멀었는데 벌써 몇 명씩 들어오고 있었다. 기숙사 목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전공 학과를 결정하지 못한 학생들을 정선(精選)하여 튀빙겐 대학교 내의 여러 학과에 가서 강의를 들어보고 교수들을 만나 학과 안내도 받고 조언도 들으면서 학과 결정을 해 대학 생활에 실패하지 않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선발 학생은 독일 학생만이 아니고 여러 나라에서 선발되어 오는데, 경쟁이 심하였다. 나는 이 학생들처럼 몇 과정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예비 대학생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