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0)
시간의 여행(20)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0.2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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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뮌헨-튀빙겐-아헨의 합류
수도원 교회가 보이는 쯔비팔텐 전경(1971년 교회 요람에서)
수도원 교회가 보이는 쯔비팔텐 전경(1971년 교회 요람에서)

새 아침을 열며

   1971년 1월 1일, 나는 새해를 맞으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독일 학생들은 연말 연초를 집에 가서 지내기도 하고 스키 여행을 떠나기도 하여, 기숙사에는 나만 남아있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 유리창 밖의 설경을 보며 새해 계획을 한 가지씩 세워봤다. 우선 앞으로 탐구할 주제를 찾기 위해서 신간 도서, 철학 학술지 등을 차근차근 찾아 읽어갈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해가다 보면 어떤 구상이 구체화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은 기이하게도 일본과 한국에서만 20세기 철학의 주류처럼 인식되어 다뤄지고 있었지만, 독일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세계철학계에서도 중심에서 벗어난 철학이 되어가고 있어, 그것에 매달리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다루겠다는 구상도 없어 올해에는 집중적으로 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찾아 탐험의 길을 가려고 한다.

   나의 관심은 철학의 일상적인 한계선을 넘어서려는 것이다. 이것의 성공 가능성은 철학을 고정관념, 철학에 대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의식의 우상을 파괴하고, 모험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대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철학이란 배우는 과정에서 방법론을 익히고 나면 그 후에는 스스로 만들어가며 자기의 철학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구상의 성공 가능성은 사고의 틀을 철저히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하여 초극(超克)의 상태에 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구상이 만일 그저 계획으로 끝난다면, 마무리가 없고 실체를 남길 수 없는 것으로 끝난다며, 그것은 꿈속의 이상향과 같을 것이다.

   이런 구상을 하며 나는 올해도 열심히 공부하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인간애의 풋풋함을 삶의 원소로 채워가는 멋진 해가 되기를 기원했다. 내게는 인간이 자산이고, 재물보다 귀한 보배다. 그것은 나 스스로 사람들에 의해 나를 형성해가고 있기도 하고, 사람과 만남으로 인해 나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점점 깊어가고 있어 나를 보다 성숙한 나로 만들어간다는 의미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이 나에게선 사람을 사귀며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눈에는 보이지는 않아도 가슴으로는 뜨겁게 느껴져 오는 인간애의 순수함이며 거룩함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다 보면 나는 나를 넘어서는 새로운 나로 될 것이고, 그렇게 나를 만들어 간 과정은 그 어느 것보다 진지한 삶의 형식으로 표출될 것이다. 나는 늘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왔고, 저들의 도움으로 나를 성숙시켜왔으며, 그런 관계를 이어가며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런 인간관이 나의 인간 이해라 하겠다. 나는 나와 호흡이 맞고 이야기를 섞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통하는, 진선미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과 사귀며 나의 세계를 넓혀가려고 한다.  

   올해에도 도서관에서 일하기로 했다. 1월에는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이틀만 일하기로 했다. 여름방학 때부터는 사무실에서 타자 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커다란 카트에 책을 가져다 놓고 가면 색깔별로 도서카드 5장에 책 정보(저자명, 저서명, 페이지 수, 분류번호 등등)를 타자하는 일인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미제 로열 타자기를 사주셔서 치곤 하다 대학교 때부터는 펜팔 하면서, 영어 편지나 작품을 쓰면서 타자기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비교적 빨리 칠 수 있게 되었다. 배워두었던 게 우연한 기회에 이런 기회로 이어질 수 있는 게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둔다. 도서관 아르바이트 중에 타자 치는 일이 시간당 임금을 가장 많이 받는다.

   1월 26일부터 두 달 동안 튀빙겐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헤렌베르크 종합병원에서 며칠 전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 12명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유학생학생처에서 그곳으로부터 독일어를 가르칠 한국 유학생을 소개해 달라는 공문을 받고, 나를 소개해 주었다. 한 주일에 두 번씩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과 오후 집중적으로 수업하는데, 우선 병원에서 간단한 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쯔비팔텐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쯔비팔텐

쯔비팔텐 - 숲속의 동화 나라

   1월 3일은 주일이었는데, 아침에 쯔비팔텐의 경숙 양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송년회 때 좋은 말씀 감사하다며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 후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어 독일어로 서류를 작성하는 일도 많을 텐데 어려움이 많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전화를 받고 언제고 시간 될 때 전화하라고 했다. 전화의 여운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맴돌다 어느 순간부턴가 1월 1일 첫 시간에 눈을 밟으며 보냈던 그녀와의 추억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힘이 되어 주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힘이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 동생 같다는 느낌이 뭉클 스쳐 갔다.

   1월 23일 에바 차로 크리스토프, 레나테 카야츠(Renate Kayatz), 영근이랑 쯔비팔텐에 가서 송년회 때 만난 간호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독일 생활에 적응하는데 어려움도 들으며 환담하다 저녁에 돌아왔다. 기숙사 1층에는 한국 간호사들, 2층에는 독일 간호사들의 방이 있는데, 모두 독방을 쓰고 있었다. 공동 취사장과 라운지가 층마다 따로 있어 서로 문화적 차이로 인한 불편이나 어려움은 없는 듯했다. 병원 측에서 그렇게 배려했던 것 같다.

   첫눈에 보니, 쯔비팔텐은 숲속의 동화 나라 같았다. 길은 좁고, 11세기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 교회가 있고, 정신병원이 있는데, 거기서 한국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마을 광장에는 조그마한 우체국, 식당을 겸한 여인숙(Gaststätte), 그리고 식료품 가게 하나와 몇 개의 가게가 있는 아주 작은 시골이다. 신작로를 따라 산에서 내려오는 도랑물이 흐르고 있는데, 맑은 물에 송어들이 헤엄치고 다니며 운치를 더해 주었다. 병원 뒤로는 공동묘지가 있고, 기숙사에서 숲속으로 올라가서 수영장이 있다는데, 그곳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을 보며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다. 첫인상이 그랬다는 것이다. 후에 다시 그곳에 갔을 땐 여행 중에 잠시 들려 지내기는 좋겠지만, 그곳에서 사는 것은 단조로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곳은 조용하고 쾌적하여 휴양지 같은 곳이다.

콜로퀴움

  1월도 내게는 바쁜 달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헤렌베르크에 가서 독일어도 가르쳐야 하고, 그런데 과목마다 해내야 할 과제들을 정리하는 것은 너무 힘에 겨웠다. 목요일 4시까지 도서관에서 일하고 멘자에서 저녁을 먹고 밤 8시에서 10시까지 볼노우 교수 콜로퀴움에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때로는 너무 벅찼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크레빌 박사의 리바이어던(Leviathan) 세미나에서 내게 주어진 과제는 6장을 해석(解釋)하며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한 작품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이해와 그에 대한 확실한 관점이 세워져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에 나는 읽고 또 읽으면서 아주 오랫동안 그 문제에 몰입하였다.

   매주 목요일 밤마다 두 시간씩 볼노우 교수 콜로퀴움도 심리적 부담이 컸다. 나는 그 당시 발표할 단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하여 수업의 진행 과정을 배워가고 있었는데, 가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는 것이 교수님에게 성의 없는 태도로 비추어질까 늘 긴장하며 지냈다. 발표자(대다수 석·박사 과정 학생)가 본인이 써가고 있는 논문 중의 한 장을 발표하면 참여자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논평하거나 토론하고, 교수의 최종 평가로 끝마치곤 한다. 나는 발표 논문을 집중해서 들으며 발표자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대강의 틀만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느 날 콜로퀴움을 마치고 나오는데, 눈이 많이 쌓였고, 계속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새로 옮긴 기숙사(Mohlstr. 44)까지 늘 큰길로 오갔었는데, 그날은 옛 식물원 산책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식물원 안의 주변으로는 가꾸지 않은 잡목들과 나무들, 군데군데 수풀이 우거져있어 밤에는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슴푸레한 낡은 가로등이 두세 군데 있어 산책길 전체는 매우 어두웠다. 이 길을 질러가면 기숙사까지 조금 빨리 갈 수 있어 나는 이날 밤 이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눈이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밤, 늦은 시간에 오가는 사람은 없고 차들만 간간이 지나가는 대로변을 혼자 걸어갈 때 지나가는 차들에서 내 모습을 보는 사람들―아마 저들 중에는 나와 친구는 아니어도 나를 아는 사람도 있을 텐데―의 눈총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비치는 게 내게는 부담이었다. 나는 한 시간이 넘게 눈밭을 헤쳐가다 몇 번씩 넘어지며 기숙사에 돌아왔는데 손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눈이 쌓여가는 밤의 한적한 숲속! 요즘도 함박눈이 하늘을 가리며 쏟아지는 날에는 튀빙겐 옛 식물원에서 느꼈던, 경외(敬畏)의 마음에 스며들던 밤의 두려움 같은 것이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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