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1)
시간의 여행(21)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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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칸디나비아
코펜하겐 시청사
코펜하겐 시청사

  1월부터 계속 아르바이트하고 과제물과 논문 작업하며 긴장하다 보니 온몸이 무기력해지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4월 15일이면 여름학기(SS 1971)가 시작된다. 그때도 지금처럼 긴장된 생활이 이어질 텐데, 이런 상태로 새 학기를 맞는다면 기대하는 만큼 학업에 충실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선 머리를 식히며 몸의 긴장을 풀어야겠기에 어딘가 가서 좀 쉬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칸디나비아 삼국을 여행하고, 라이프니츠-콜렉에서 친하게 지냈던 노르웨이 친구도 만나 볼 계획을 세웠다. 동행할 친구가 필요해서 나는 레나테에게 내 계획을 말했더니, 같이 가자고 해서 출발 일자를 정했다. 각자 유스호스텔 카드(Jugendherbergen Karte)도 만들었다. 돌아오는 날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도서관 아르바이트 시간은 다른 학생들이 분담해서 맡기로 해서 자유로웠다.
   3월 10일(수) 오전 8시 30분 튀빙겐을 출발해서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우선 유스호스텔에 숙소를 정하고 시내에 나가 거리 풍경을 보며 그날은 함부르크에서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코펜하겐으로 가서 하루를 그곳 명소를 찾아다니며 구경하고, 인어 동상에도 가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의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헬싱괴르에서 스웨덴 헬싱보리로 건너가서 저녁 기차로 오슬로로 떠났다.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의 국경을 넘는데, 이웃 마을 지나가듯 그냥 넘어가는 것이 참 이상했다.

오슬로

   오슬로는 그때까지 내가 다녀본 도시 가운데 너무 조용하여 도시 전체가 휴양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이 붐비며 복잡하게 지내고 있는 서울의 활기찬 도시 양상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이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분위기에 몇 시간 지나며 익숙해지니 몸과 마음이 평온해졌다. 북유럽 국가를 지상 낙원이라고 하는 말이 수식어로 붙여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조용함 속의 정취가 한층 더 멋있게 느껴졌다. 도시의 분위기는 독일에서의 도시풍과는 너무 달랐고, 노르웨이 전통가옥과 도시를 꾸며 놓은 디자인이나 거리 풍경, 풍물들도 독특했다. 나는 여행을 할 때마다, 그 도시의 인상과 사람, 그곳의 생활상에 관심이 있는데, 이곳은 그런 점에서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첫날 그곳에서 유스호스텔을 찾아 숙소 문제를 해결하고 시내로 나가서 거리 곳곳을 다니며 시내 관광을 했다. 그런데 겨울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유럽에서도 노르딕 삼국 관광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거리에서 관광객을 거의 볼 수 없었다.

   13일(토) 오전 10시 30분 외스타인(Øystein)과 약속한 시각에 그의 집에서 만났다. 1969년 여름에 헤어지고 이렇게 재회한 것이다. 레나테를 소개하고 서로 그동안 지냈던 이야기로 회포를 풀며 준비해 놓은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오슬로 시청은 10여 층 이상 될 듯한 붉은 벽돌 건물 두 동이 10층 정도의 중앙건물로 연결되어 진 건축 양식인데 참 독특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받은 인상일 수 있을 것이다. 시청이나 관공서라면 서울 시청 같은 건물 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 건물은 상업용 빌딩 같지도 않고, 학교 건물 같지도 않고 무언가 무척 특이하게 생겼다. 나는 내게 깊이 인상된 이 느낌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 앞 항구에는 유람선인듯한 크고 작은 배들과 여러 종류의 배가, 다른 한쪽에는 요트들이 가지런히 정박해 있었다.

시청사 옆 팔레스호텔(시청사와 동시에 건축)(좌) 인어 동상(가운데) 덴마크 마리 공주 동상(카스텔레에 있음)(우)
시청사 옆 팔레스호텔(시청사와 동시에 건축)(좌) 인어 동상(가운데) 덴마크 마리 공주 동상(카스텔레에 있음)(우)

뭉크 미술관

   외스타인은 우리를 뭉크 미술관으로 안내했다. 오슬로 관광에서 뭉크 미술관은 거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있어 관광객으로 그곳을 놓치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 전시 기간에 체코 화가의 작품도 전시되어있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행운이 겹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뭉크의 작품에 대하여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솔직히 내 수주에서는 무리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하다. 대체로 뭉크를 자연주의를 탈피하려 했던, 표현주의에 작품성을 실었던 화가로 현대 미술 평론가들이 평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옳은지 다른 가능성이 작품 이면에 내재 되어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받은 인상은 퍽 괴기스럽고 외경스럽고 초월성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혼합되어있는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의 고뇌와 번민, 사랑과 증오, 피와 죽음 등등 다양한 주제가 내겐 종교적 인간학의 주제로 함축되곤 하였다. 내가 신학을 바탕으로 학문에 입문하면서 점진적으로 구축해 온 기독교적 경건주의와 전이해가 뭉크의 작품을 감상하며 해석함에 이런 인상으로 각인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뭉크는 참 독특한 화가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 세계를 미학의 한 장르로 규정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무모함과 모호함을 동시에 감내할 수 있는 지경에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모험일 수도 있고 만용일 수도 있으리라고 나는 그림 앞에서 강하게 느꼈다. 그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도 그렸는데,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표제어로 함축될 수 있는 철학자로서 비극의 탄생과 초인의 도래를 거의 신앙처럼 역설하며 시간의 순환을 영원회귀의 사상으로 압축한 본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뭉크는 니체와 철학과 사상, 세계관과 인간 이해에 있어서 유사할 뿐만 아니라 솔직히 표현하면 사상의 일치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뭉크의 작품에는 실존주의 영향이 수면 밑에 깔려있다고 나는 느꼈다.

   그날 관람객이 별로 없었는데, 나오면서 기념품 가계에서 그의 작품 포스트 카드 몇 장을 샀다. 내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것은 「절규」였다. 그게 유명한 작품이라는 명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그림에서 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뭉크의 의식에 잠재된 절규는 내가 받은 인상과는 다를 수도 있고, 나의 감상 수준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현대인의 삶의 과정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외스타인과 헤어지고 시내 관광을 하다 어느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며 레나테도 나도 말이 없었다. 초저녁인데도 어둠이 나리기 시작하며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늘의 강행군으로 우리 몸은 피곤하고, 허기도 져서, 카페를 나와 어느 식당(노르웨이어로 쓰여있어 식당 이름을 읽을 수 없음)에서 식사하며 내일 일정에 관해 의논했다. 오슬로에서 둘째 날을 보내는 것이다.

오슬로 삼위일체 교회 원경(함머스보로에 있음)(좌), 오슬로 건너편 해안(우)
오슬로 삼위일체 교회 원경(함머스보로에 있음)(좌), 오슬로 건너편 해안(우)

바이킹 박물관과 콘티키 박물관

   14일 11시 30분 바이킹 박물관에 도착했다. 노르웨이라는 개념이 표출하는 상징성은 바이킹 아닐까? 박물관 자체는 단순한 구조물로 건축된 자그마한 건물이었다. 전시물은 바이킹 배 3척과 유물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배는 밑단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배 자체가 예술품 같기도 하고, 외형적인 상태도 깨끗했다. 나는 이 배를 타고 거친 대양을 누비고 다녔을 모습을 상상하며 파도와 풍랑을 뚫고 나가야 하는 배의 특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왜 그리 크지도 않은 배가 거친 파도와 풍랑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

   어느 배는 바이킹의 부장품으로 매장되어있었는데, 발굴되어 복원했다고 한다. 통나무 바퀴로 된 마차와 썰매, 가죽신과 그릇 등등 일용품도 전시되어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전시품 중에 동물 머리 조각상은 단순하면서 투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지리적·생태적 조건과 연관해보면 바로 그런 모습이 그 당시 이곳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표현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념품 가계에서 바이킹 배 팸플릿을 사고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그곳에서 나왔다.

   콘티키 박물관 역시 개인 집이나 자그마한 연구소 같은 건물인데, 그 안에는 갈대로 엮은 배 한 척이 전시되어있다. 그런데 그 배에 관한 역사를 읽으며 모험의 위대성은 인간의 탐구심을 자극하여 북돋아 줄 수 있는 마력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 박물관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이 종족 이동과 문화 전파 과정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했던 인류학적 관심의 실증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으며, 그걸 실행하기 위하여 제작한 갈대로 엮은 배로 항해했던 역사적 증거자료의 전시실이라 하겠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폴리네시아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증명하겠다는 의지로 이 배로 동료 5명과 탐험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이런 배로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저들의 모험심과 용기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목숨을 건 도전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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