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4)
시간의 여행(24)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12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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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남의 여운
① 쉐퍼 의원 면담(공문 1970.9.21.) ② 장학 통지서(공문 1970.12.14.) ③ 공문 든 서류봉투 ④ 확약서와 코헬 세미나 참석 카드
① 쉐퍼 의원 면담(공문 1970.9.21.) ② 장학 통지서(공문 1970.12.14.) ③ 공문 든 서류봉투 ④ 확약서와 코헬 세미나 참석 카드 ⑤ 1971.2.28 튀빙겐-코헬 기차표

프리드리히-에버트 장학금

   1970년 7월 18일 나는 프리드리히-에버트 장학재단(FES, Friedrich-Ebert-Stiftung)에 학술장학금 신청을 했다. 튀빙겐에서 3학기 마친 학업성적으로 장학금을 신청하는 것 자체가 모험일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과정과 결과에 자신감을 가지고 신청했다.
   장학금이란 학예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에게 전문성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지급하는 돈이므로 선발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영예로운 것이라는 게 그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내가 유학길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학예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대학 수석 합격자에게 수석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등 성적과 결과 위주로 장학생을 선발하는 게 상례였다. 나는 그런 예를 지상을 통해 접하곤 하면서 나도 꼭 저런 영예로운 장학생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상복도 없고 장학금을 받을 능력도 없었던지 한 번도 그런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모처럼 대학원 수석 합격으로 받은 장학금마저도 타의로 양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나에겐 자신감을 북돋우어준 동인이 되었다. 장학금은 실력에 따라간다는 것이었다.

   FES에 장학금 신청서를 보내기 전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런 재단의 장학금은 거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신청자 중 엄선된 극소수에게만 지급될 것이라는 추측성 말들 때문이었다. 나는 3학기 공부한 성적만으로 신청한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우체국을 찾았다.

⑥ 코헬 호숫가 FES 폴마르아카데미 ⑦ 로텐부흐 성모 마리아 탄생성당⑧ 장학생들과 홀로나(털 코트) ⑨ 식당 앞에 모인 장학생들
⑥ 코헬 호숫가 FES 폴마르아카데미 ⑦ 로텐부흐 성모 마리아 탄생성당 ⑧ 장학생들과 홀로나(털 코트) ⑨ 식당 앞에 모인 장학생들

9월 21일 홀로나(Maria Holona) 여사의 편지를 받았는데 본에 가서 국회의원(MdB) 쉐퍼(Prof. Dr. Schäfer)를 만나라며 왕복 교통비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결정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추기 몇 줄도 덧붙였다. 여기에는 내가 제출한 신청서와 증빙자료가 1차 관문은 통과되었지만 쉐퍼 의원과 인터뷰(사실상 면접고사) 결과가 장학생 선발에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가 암시되어있었다. 쉐퍼 의원을 만나고 두 달쯤 되어오던 11월 9일 홀로나로부터 장학금 신청서류가 모두 다 통과되었으며 11월 24일 장학위원회에서 선발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데 기다리라는 편지를 받았다.

   1970년 12월 14일 FES 사무총장 그룬발트(Dr. Günter Grunwald)가 보낸 등기 우편을 받았는데(서류봉투에 우체국 소인은 12월 21일로 찍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며 축하한다는 내용과 1971년 3월 1일부터 매월 DM 500(장학금 450+도서대금 50)씩 방학 때도 지급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외에 동봉된 우편물 중에는 ‘어떤 장학기관에서도 장학금을 받고 있지 않다’는 확약서에 서명하여 보내라는 것과 1971년 2월 28일부터 3월 6일까지 외국 장학생을 위해 FES에서 마련한 코헬 세미나에 참석 여부를 체크하여 보내라는 두 가지 공문도 들어있었다. 나는 1월 11일 타 기관 장학금을 받고 있지 않으며,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2월 28일(일) 튀빙겐에서 뮌헨을 거쳐 오후에 소집장소인 코헬 호숫가 폴마르아카데미(Georg von Vollmar Akademie, Kochel am See)에 도착하니 젊은 직원이 등록 데스크로 안내하였다. 그곳 직원은 1주일 동안 진행하게 될 시간표와 재단 관련 책자, 유인물 등이 들어있는 두툼한 서류봉투와 명찰을 건네주며 저녁 식사 후에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의 시간(Vorstellungsabend)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16개 국가에서 온 장학생 34명의 명단이 들어있었다.

   3월 1일(월)에는 아침 식사 후 홀로나가 참석자들에게 몇 가지 안내사항과 자세한 일정에 관해 설명한 후 곧이어 FES 장학부서 책임자 뮐러(Egon Erwin Müller)가 FES가 외국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취지가 무엇인지 설명했다. 이어서 사정관 한 명이 배당된 칠팔 명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질문 하나하나는 즉답하기에는 아주 예리한 것들이었다. 유머러스하게 웃으며 묻는데, 우물쭈물하고 당황해하면 “좋다 그러면…”이라고 안정을 주는 듯하며 또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각자에게 묻는 것도 달라서 옆에서 들으며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주어지는 질문은 미처 준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⑩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1) ⑪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2)⑫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3) ⑬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4)
⑩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1) ⑪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2)⑫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3) ⑬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4)

점심 후 2시까지 자유시간이었는데, 2시부터 5시까지 새로운 사정관이 들어와서 전혀 다른 주제를 갖고 질의·응답식 대화방식으로 각 사람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매 식사때마다 각 식탁에 FES 관계자 한두 명씩이 함께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 예컨대 오늘 날씨라든가, 무엇 공부하고 있느냐, 왜 그런 분야를 전공하게 되었느냐 등등 물으며 중구난방식으로 대화하는데 사실 그것은 인성과 의식, 세계관과 사회성, FES가 표상하고 있는 인재인가를 캐내려고 변두리를 돌아가며 묻는 심사방식이었다. 모두 긴장하고 있어 분위기는 냉랭했다. 세미나의 조별 모임이라지만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3월 2일(화)에는 10시 15분 버스로 코헬을 출발하여 무르나우(Murnau)와 로텐부흐(Rottenbuch) 성모 마리아 탄생성당(Mariä Geburt Kirche) 관광을 하고 비스(Wies)에서 점심(Gasthof Moser) 후 에탈 수도원(Benedictiner-Abtei Ettal)을 둘러보고 반크(Wank)에서 잠시 커피 시간을 가졌다. 오늘 하루의 여행은 시간을 쪼개가며 이어가는 듯한 강행군이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정상에 올라가 눈길을 걸으며 설경에 묻혀 자연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신성함 그 자체였다. 하산하여 마을 전통 음식점(Bräustüberl Garmisch)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10시가 넘어 코헬로 돌아왔다. 에탈 수도원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은 뮌헨에 있을 때 갔었던 곳인데 다시 와서 보며 느끼는 감상은 또 다른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다.

   삼 일째 되는 날에는 아침 식사 후에 코헬과 그 주변 명소 몇 곳을 관광시켜주었고 코헬 호숫가에 있는 600년 된 전통 음식점(Gasthof zur Post)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시간을 갖고 휴식을 취했다. 몇 명은 밖에 나가 눈길을 걸으며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는데 나는 잠시 산책하곤 들어와서 쉬고 있었다. 저녁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여흥의 시간이었다. 아시아계 학생들과 체코에서 온 학생 몇 명은 비교적 조용했는데, 라틴계 학생들은 노는 게 몸에 배어있었다.
  

⑭ 코헬 호숫가 전통음식점 ⑮ 인도네시아 학생과 체코 출신 Nada
⑭ 코헬 호숫가 전통음식점 ⑮ 인도네시아 학생과 체코 출신 Nada

4일(목)에는 점심시간까지 다른 사정관이 조별 모임을 인도했는데, 한결같이 수법도 다르고 방식도 다르며 질문 양상도 종잡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2시부터 프란츠(Fritz Franz) 박사가 외국인 법에 관해 발제하고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설명도 해 주었다. 주로 외국 학생이 아르바이트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 준수해야 할 노동관계 법령 같은 것이었는데 내게는 해당하는 내용이 없었다.

   5일(금) 일정은 매우 벅차게 짜여있었다. 오전에는 인권에 관한 특강이 있었고 점심 후 3시까지는 대화의 시간, 3시 이후부터는 자유시간이었다. 사정관들 방문에는 상담 시간표가 붙어있지만 나는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다. 특별히 상담할 내용이 없기에 매일 일정에 따라 움직였다. 자유시간에는 같은 조에 속해있던 학생들과 환담을 하며 지냈는데, 인도네시아 학생(화교)과 체코에서 온 나다(동양학 전공)와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6일(토) 아침 10시 15분 기차로 코헬을 출발해 뮌헨을 거쳐 튀빙겐으로 돌아왔다. 참 피곤하고 긴장된 한 주일이었기에 기숙사에 도착해서는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9월 4일(토) FES 홀로나로부터 학업 보고서(Semesterbericht)를 보내라는 공문을 받았다. FES 장학생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학업 보고서를 제출해서 다시 심사를 받아야 한다. 나는 내가 그동안 참여한 강의와 세미나, 콜로퀴움 등에 관한 학업 보고서를 관련 자료와 함께 제출했는데, 9월 말경에 장학금을 계속 받게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업 결과에 따라 장학금이 중단될 수도 있으므로 매우 긴장됐던 순간이었다.
   1973년 1월 9일 FES 장학부서 책임자 뮐러의 편지를 받았는데 1972년 10월부터 소급하여 1973년 3월까지 장학금을 인상하여 월 DM 570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FES는 장학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회원들에게 소식지를 보내주며 관계를 이어갔다. FES의 특징이며 장점은 한번 맺은 관계(사실상 한 주일간의 MT)를 '연대성'(Solidarität), 동지애로 포용하는 것이다.

  

⑯ 장학금 인상지급 통지서(공문 1973.1.9.) ⑰ 유대성 이어가자는 공문
⑯ 장학금 인상지급 통지서(공문 1973.1.9.) ⑰ 유대성 이어가자는 공문

 

FES 장학금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에서 외국 유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금인데, 크게 두 가지를 본다. 첫째, 정당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인 만큼, 외국 유학생이 학업에 성공하고 본국에 돌아가서 정치, 경제, 사회 등 제 분야에서 지도자급으로 역할 할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이 있는가, 둘째, 본국의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로 학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탁월한 인재인가를 심사의 제일 조건으로 한다. 그 재단에서 제공하는 책자에 이점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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