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5)
시간의 여행(25)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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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남의 여운
① 라이프니츠-콜렉(Haus 2)에 있을 때 옆방 여학생의 생일 초대 ② 여학생과 남자 친구 ③ 초대된 기숙사생들 ④ 초대된 기숙사생들 ⑤ 비키

아름다운 사람들

   만남에는 항상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만남은 관계 형성에 있어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형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안에는 개성이라는 실체가 개재되어있다. 우리는 그 만남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 삶의 조건을 찾아가며 시간의 흐름에 얹혀 가는 것이다. 내 존재 속에서도 이 만남의 관계가 실체화되어 가고 있다. 나는 가족, 친지, 친구나, 예술작품, 학문의 대상 등에서도 그런 것을 감지하곤 한다. 독일에서 내가 절실하게 체험하며 느낀 것은 이 만남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인간 간의 사랑으로 창조되어 그 맛과 멋을 더욱더 깊게 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에겐 만남이란,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체적이기도 한 개념으로 다가오지만, 항상 내 존재를 성숙시켜왔던 실체였다. 내가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독일에 와서부터 늘 많은 만남과 관계를 통해 내 삶을 풍요롭고 폭넓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나는 내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여긴다. 뮌헨에서뿐만 아니라 튀빙겐에서도 내 주위에 나와 관계하고 있는 친구가 많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시도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런 것을 나는 내게 내려진 숙명, 혹은 운명이라고 여길 때도 있다. 이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사람들은 내가 힘들고 불편할 때마다 나에게 천사처럼 다가오곤 했던 수호신의 화신과 같은 존재였다. 내 주위에는 언제나 독일 친구 한두 명, 때로는 여러 명이 어울려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 나는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튀빙겐 근처 시골 마을이나 도시에 가서 구경하며 한 주일 동안 쌓인 피로감과 권태로움을 털어버리며 기분 전환을 하곤 했다. 주말은 이래서 필요한 것 같다. 가끔 친구들과 식사도 하며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했다. 다음 학기 수강할 과목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읽고, 철학 학술지를 읽으며, 새로운 논문을 통해 철학의 최근 흐름을 파악해가며 내 나름으로는 보람찬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사전에 학습하지 않고 개학을 맞게 되면 한 학기 내내 진땀을 흘려가며 지옥 길을 걷게 된다.

⑥ 크리스토프 ⑦ 크리스토프와 레나테 카야츠 ⑧ 칼 아킴과 넥카강에서
⑥ 크리스토프 ⑦ 크리스토프와 레나테 카야츠 ⑧ 칼 아킴과 넥카강에서

가을을 넘기며

   10월 15일 겨울학기(WS 1971/72)가 시작되었다. 나에겐 언제나 새 학기가 기대와 긴장감, 내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에 대한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현상이 때로는 내게 꿈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필연성처럼, 때로는 내게 던져진 개연성처럼 밀려오며 묘한 느낌으로 엄습해왔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꿈을 꾼다. 눈을 뜨고 꾸는 꿈속에서 나는 내일을 보기도 한다. 내 꿈은 언제나 미래로 도약하며 새로움을 추구하곤 한다. 이런 걸 꿈의 진화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적일 테지.

   어쨌든 개연성에는 항상 가변성이 동반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 개연성을 구현하기 위해 투쟁적으로 삶을 추진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젊음의 용기라고 본다. 이번 학기도 나는 투쟁적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투쟁이며, 내가 실현하려고 하는 학문과의 투쟁이라 하겠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나 나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었다. 기숙사, 세미나, 아르바이트, 멘자, 그리고 친구들과 만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충격적이라 할 만한 상황이나 환경의 변화도 없었다. 방학 때 교수님이 면회시간에 하셨던 말씀이 내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이번 학기에는 짐멜에 관한 과제가 많았다. 나는 짐멜 철학의 초석이 되는 삶, 형식, 인생관, 초월성 등등 그의 철학의 주요 동인과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찾아 독파하며 나 나름대로 삶의 개념을 정립해 갔다. 삶이란 실재가 쇼펜하우어에게서는 의지의 표상에서, 니체에게서는 힘에의 의지에서, 베르그송에게서는 지속성에서, 딜타이에게서는 체험에 대한 표현을 이해하고 해석함에서 역동적으로 추진되는 에너지 같은 것인데 반해서, 짐멜에게서는 단계적으로 초월 되어가는, 다분히 종교적 양태로 비추어지는 현상이었다. 나는 저들의 저서를 읽어가며, 그 동인과 방법론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새로운 해석을 해보려는 욕망─나의 이런 행위를 오만함과 독선적인 괴기로 보는 이들도 있을 텐데─에 차 있었다. 대체로 이 철학자들은 삶을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나는 삶이란 만남에서 형성되어 가는 관계성, 사랑(Agape, Eros, Philos, Caritas 등)이라고 생각한다.

   11월 11일(목) 나는 볼노우 교수에게 독서 보고를 하고, 18일에는 짐멜 철학에 관한 요지를 발표했다. 참석자들에게는 짐멜이 사회학과도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생소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튀빙겐대학교 철학과에서 짐멜에 관하여 강의나 세미나를 열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낯설었을 테고 그래서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볼노우 교수조차도 짐멜의 저서 『인생관』(Lebensanschauung, 1918)에서 진술된 삶의 3단계 형식만을 자신의 『삶의 철학』에 도입했을 뿐 그 이상으로 짐멜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짐멜을 대표하는 사상의 축은 사회학적 구조론, 경제학적 가치체계론, 도덕적 인간관계론 등과 직결된 동인에 대한 철학함(Philosophieren)이다.

   볼노우 교수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나의 해석을 기존의 일반적이고 교과서적으로 진술되어있는 해석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매번 이런 관점의 차이는 나의 독창적인 학문의 열정과 새로움을 시도해보려는 의욕을 좌절시켜버렸다. 본인의 철학함으로 제자의 사고구조와 의식의 지평까지도 주형 하려는 도제식 교육방식이 나를 매우 난감하게 했다. 제자의 독창성을 인정하며, 비록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좀 키워졌으면 하는 미련이 늘 내 가슴에 섭섭함으로 사무쳤다.

⑨ 넥카강가의 휄더린탑 ⑩ 넥카섬에서  ⑪ 지그린데의 초대
⑨ 넥카강가의 휄더린탑 ⑩ 넥카섬에서 ⑪ 지그린데의 초대

감성의 빛깔

   가을로 넘어가며 튀빙겐은 여러 가지 감성의 빛깔로 뒤섞여갔다. 넥카강에는 가을의 낙조가 쓸쓸함을 서글픈 시상으로 떠올렸고, 휄더린이 시를 지으며 강에 자신의 시상을 띄웠던 물결은 유유히 흘러가며 가을을 점점 깊이 물들여갔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양옆으로 이어져 있는 넥카섬에서 석양 녘에 낙엽길 밟으며 걸음걸음마다 사색의 발자취를 남겼던 잊을 수 없는 데이트, 그리고 젊음의 풋풋함을 그 시간과 공간에 채워가며 잠시나마 망아(忘我)의 한 존재로서 고뇌와 번민이 없는 한순간에 빠져들었던 신비, 자연에 도취하며 비경을 헤매었던 황홀감, 그 자체가 예술에 묻히는 것이며 시원의 마음 바탕에 언어 이전의 언어로 쓰여가는 서정시였다. 나는 파란 하늘과 붉게 물들어가는 물결에 나의 투박한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만의 밀어를 써서 띄었다.

   튀빙겐의 가을은 항상 나의 감성을 자극했고, 때로는 나를 우울하게도 때로는 우수에 잠기게도 했다. 나는 벌이 꽃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봄에 태어나서 우수와 애수에 젖어 들며 가을에 빠지는 병 앓이를 하곤 했다.

   때때로 나는 책에서 깨달은 진리보다 꽃의 색향(色香)에 취하여 삶의 진수를 찾아내었을 때 느끼는 행복감에서 진리의 참을 터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곱게 물든 낙엽에 내 마음을 담아 책갈피에 고이 꽂아놓으며 나는 가을과의 석별에서도 내일을 맞는 시간 선상의 진리를 배워가곤 했다. 어떤 책보다도 자연에 쓰여있는 모든 게 진리의 참이기에 거기에서 얻는 기쁨과 감격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책을 놓고 이런 명상에 잠기다 보면 진리를 탐구하려는 욕구가 더욱 상승하는 것을 나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리키와 클라우스는 항상 한 주일에 한 번 이상은 만났고, 지그린데, 레나테, 경숙도 자주 만나며 우리 친구들은 늘 만남의 기쁨을 우정으로 이어갔다. 지그린데는 우리와 함께하는 걸 좋아했고, 우리를 태우고 자주 교외로 드라이브하거나 초대하여 식사도 하며 어울렸다. 생일이 되면 서로 집에 초대하여 식사하며 우정의 시간을 갖곤 했는데, 사실 학생들의 식사라는 게 빵과 몇 가지 부르스트와 치즈, 과일, 맥주 정도였다. 생일 축하로 모인다지만 실상은 돌아가며 만남의 자리를 만들어 우정을 이어가려는 묵계의 일환이었다.

   11월 말이 되어오며,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 교수님들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냈다. 도심의 상가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지고, 튀빙겐 시청 앞 광장에는 해가 질 무렵부터 크리스마스 마켓(Weihnachtsmarkt)이 열렸다. 백열등이 가설되어있는 간이 천막 가게에서는 가정에서 구워온 크리스마스 과자(Stollen, Lebkuchen), 시골 정육점에서 직접 만들어 온 부르스트와 유제품, 글뤼바인, 과일 등등 여러 가지 먹거리를 팔았다. 크리스마스트리와 꽃, 목제 말구유와 슈필우어(Spieluher), 다양한 크리스마스 장식품은 정겨움과 저물어가는 연말의 미묘한 허무감, 영원히 사라져 가는 작별의 애상, 옷깃을 스미며 밀려오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에 가벼운 흥분을 안겨주었다.

가슴의 아림

   작년 송년회에서 만났던 튀빙겐 간호사들은 병원 행정실이나 기관에서 서류가 오면 대체로 나를 찾아온다. 이즈음엔 한국 유학생이 20명 가까이 있었는데도 내게 부탁하곤 하는 것이 짜증 날 법도 한데, 나는 이분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부탁할만한 데가 없으면 내게 찾아왔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도와주곤 했다.

   어느 주말 숙용이라는 나이 많은 간호사가 에쎈 병원에서 근무하는 친구(박 간호사)가 튀빙겐으로 옮겨오려고 하는 데 도와달라며 찾아왔다.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들을 훑어보았더니 자녀가 3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렇게 외국에서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가족 생각이 많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해야 할 과제도 많고 도서관 일도 해야 했지만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그분은 몇 번이나 고맙다며 인사하곤 돌아갔다. 그분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갓 스물 넘은 나이에 온 간호사들은 외국에 와서 일하며 휴가 때면 서로 어울려 여행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하며 차츰 이곳 생활에 적응해 가며 지내고 있는데, 가족을 두고 온 아주머니들은 얼마나 애들이 보고 싶고 가족이 그리울까 이런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다.

   직장을 옮길 때 새 직장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쪽 병원에서 동의서도 받아와야 하고, 이곳에서 노동허가도 새로 신청해야 한다. 1971년 10월에 박 간호사는 튀빙겐 대학병원으로 옮겨와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래, 친한 친구와 같이 있으면 서로 외로울 때 의지도 되고 잠시만이라도 집 생각을 덜 하게 되겠지.’ 잠시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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