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7)
시간의 여행(27)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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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남의 여운
① 왼쪽부터 차봉희, 경숙, 리키 친지, 리키 ② 피사의 사탑 앞에서 경숙 ③ 부활절 미사 전 바티칸 광장 ④ 미사 직전
① 왼쪽부터 차봉희, 경숙, 리키 친지, 리키 ② 피사의 사탑 앞에서 경숙 ③ 부활절 미사 전 바티칸 광장 ④ 미사 직전

철학의 철학함  

   이번 겨울학기(WS 1972/73)는 튀빙겐대학교에서 8번째 맞는 학기다. 나는 방학 중에 박사학위에 필요한 조건을 하나씩 점검하며 빠졌거나 미비한 것을 채워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내가 ‘철학의 철학함’(Philosophieren der Philosophie)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기존의 철학 사조에 순응해가며 흐름 따라가는 게 박사학위를 받는 왕도일 수도 있을 텐데, 그것에 도전하며 저항하려는 행위가 나를 이방인화 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젠 거의 상식화되어 있고, 석양 노을에 얹혀 가고 있는 지식 정도로 철학사에서나 다루어지고 있는 그런 부류의 범주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건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함의 역동성을 새롭게 정비하며 주제에 접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나 스스로 뭐 대단하다거나, 서양철학을 꿰뚫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100년 가까이 담론화되어 왔고, 화두로 대두하곤 했던 주제에서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당시 튀빙겐 철학은 삶의 철학, 인간학, 해석학, 일반 논리학(수리논리학이나, 기호학 같은 것은 전혀 들을 수 없음), 철학사, 이데올로기, 블로흐 철학, 미학, 언어철학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런 강의와 세미나가 반복되고 있어 현대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접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흐름에서 철학함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 학기 반복되는 강의는 점점 더 나를 이 범주에서 탈출하도록 자극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최근의 철학 학술지들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 읽어가며 나의 안목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차봉희

  내가 1년 전에 옮겨 온 기숙사(Mohlstr. 44, Annette-Kade Heim)) 바로 옆방에는 얼마 후에 차봉희가 들어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어울리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내가 뮌헨에 있을 때 차봉희도 거기 있었으나 나와는 만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녀의 학문 방식과 전문 지식이 좀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서울 문리대 및 동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는데, 어느 수준까지 연마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화 중에 그녀의 안목이 넓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독문학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문학 전공자들과는 다르게 철학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자기 자신의 관점을 역설해 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호흡이 맞았고, 우리는 가끔 식사도 하며 밤늦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초저녁에 시작한 대화는 자정을 넘기는 때도 있었다.

  그녀는 문학을 작품 해석이나 비평의 경지에서 탈피해서 문학과 철학, 문학과 미학의 지평으로 이동시키며 굴착 했다. 나로서는 문학 이론을 자기 나름대로 정립하기 위해 시도하는 그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철학에도 관심이 많다는 점은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1973년 여름 튀빙겐을 떠나며 우리는 헤어졌기에, 그 후에 그녀의 연구가 어느 방향으로 정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봉희는 박사학위를 받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과에서 교수했는데, 그 제자 중의 한 명이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여 나를 연구실로 찾아와 인사하며 차 박사의 문안을 전했다. 1983년 7월 광주광역시에서 문교부 주관 전국대학교수협의회에 참석했을 때 연락하고 만났었는데, 차 박사는 예향의 도시 곳곳과 1980년 5월 피 흘렸던 거리를 안내하며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어느 다방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광주에서도 유명한 문인, 화가 등이 모이는 문예 공간이라고 했다. 일반 다방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다양한 화풍의 작품들이 좌석 벽을 장식하고 있어 작은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풍겨주었다. 손님 중 여러 명의 행색에서는 예술가의 어떤 묘한 멋이 배어 나왔다. 이곳에 전시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일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 후 차 박사는 한신대 인문대학 독어독문과로 옮겨와서 저술, 번역, 소설 창작, 학술 활동 등을 활발하게 하다 은퇴했다.

⑤ 여행에 동행했던 일행 ⑥ 콜로세움 앞 잔디에서 쉬며 ⑦ 폼페이에서 ⑧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⑤ 여행에 동행했던 일행 ⑥ 콜로세움 앞 잔디에서 쉬며 ⑦ 폼페이에서 ⑧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나는 바티칸에 있었다

   “1973년 부활절, 나는 바티칸에 있었다. 튀빙겐대학교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2주 동안 함께 여행하기로 하고 스위스를 거쳐 로마에 도착한 다음 날 부활절을 맞이한 것이다. 정해져 있는 지정석으로 한국 수녀가 안내해 주었는데, 추기경들 뒤에 앉게 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모습이 발코니에 등장하자 미사에 참석한 군중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눌러 되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잠잠해지고 미사가 시작되었다. 수십만 명이 모인 성 베드로 광장에는 교황의 부활절 강복 메시지(Urbi et Orbi)가 스피커를 타고 낭랑히 퍼져나갔다. 그 분위기에 나는 압도되었고, 경건한 신비를 몸으로 느꼈다. 우리 부부는 부활절 때면 가끔 그날의 부활절을 이야기하곤 한다.”(Christian World Review, 2015. 4. 1.)  

  우리는 4월 16일 튀빙겐을 출발해서 바젤-베른-취리히-루체른-밀라노-피사-피렌체를 관광하고, 로마에 도착하여 다음 날 아침 바티칸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렸다. 예수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신앙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예배에 참석해야 할 터인데, 많은 사람은 부활절 예배를 구경하는 자세로 계속 사진을 찍고, 무비카메라를 돌리며 부산을 떨었다.
   어느 종교에서든지 간에 예배는 영적 차원과 성스러움에 대한 상징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예배 자체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예배는 타성적인 반복 행위가 아니라 인간과 창조주, 나와 초월자, 시간과 영원의 만남에서 초월성에 접하려는 인간의 영성이 지향하는 힘이다. 이것을 신앙이라고도 하고 철학에서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지향이라고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신을 체험하는, 다시 말해서 신과 만나는 행위이다. 좀 폭넓게 해석해 본다면, 니체는 “힘에로의 의지”(Wille zur Macht), 틸리히는 “존재에로의 용기”(Courage to be)로 표현했는데, 어쨌든 예배와 영적 차원의 관계는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제에서 자아를 초월하게 된다는 점이다.

  종교는 초월적 존재와 교접(交接)하며 신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는 현상이다. 간단히 그리고 아주 단편적으로 말하면, 예배는 기도, 묵상, 요가, 구도 등등 여러 형식으로 순간적으로나마 초월적 존재와 하나 되게 하는 감성의 상징이다.
   나는 부활절 아침 바티칸에서 예배를 드리며 한순간만이라도 영험의 경지를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기독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하는 성령 체험 같은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성령의 임재,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한 창조주의 생령 같은 것을(창세기 2장 7절). 어느 한순간 나는 군중 집회의 열기와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로마 여행을 마치고 나폴리-폼페이-소렌토-베네치아를 비교적 여유 있게 관광하고 14일째 되는 날 베네치아에서 곤돌라 관광을 하곤 다음날 인스브루크-로젠하임을 거쳐 튀빙겐에 도착했다. 여행은 무사하게 마쳤다. 나는 여행의 목적에 따라 관광지의 풍광을 보고 즐기는, 문자 그대로 관광(Sightseeing)에 중점을 두기도 하고, 문화 여행이나 역사 탐방 같은 경우에는 그곳의 생활 양식과 문화, 그리고 그 당시 사회 상황 등을 보고 음미하고 배워가는 데 의미를 두기도 한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다양한 예술 양식을 보며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문화의 양태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로마 제국이 위대했고 지금도 그 문화는 생명력을 유지하며 호흡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바티칸이라는 이 화려한 예술작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역과 희생, 원성과 아픔이 결정(結晶)되어 있을까.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해괴하고 기상천외한 면죄부판매(속량전)가 유럽을 휩쓸며 가톨릭의 타락을 촉진했는데, 그리고 그게 도화선이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어쨌거나 이렇게 건축된 초호화 신전에서 드리는 미사를 과연 신이 기쁘게 받으시려나라는 생각을 하며 아름다움 그 이면의 추한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셋째,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혀버린 폼페이의 삶의 현장과 문화, 일상생활의 모습을 보며 삶의 양식에는 진화가 없다는 점, 오늘의 현상은 이미 삶의 원초적 시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잠시 나의 머리에 맴돌았다. 비록 이 위대했던 역사의 마당을 과객의 한 사람으로 잠시 둘러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오랫동안 깊은 여운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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