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9)
시간의 여행(29)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2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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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질과 현상
① 튀빙겐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② 옛 아헨시(인그레이빙)
① 튀빙겐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② 옛 아헨시(인그레이빙)

새로운 둥지

   8월 1일 입주 가능한 아파트(Hohenstaufenallee 27)를 얻었다. 아내는 아헨대학병원에 서류신청을 할 때 이비인후과에서 근무하겠다고 명시했는데, 그렇게 결정되었다. 나는 대학본부에 가서 도착 신고를 하고, 그곳에서 모든 증서 원본을 요구하여 서류를 모두 챙겨 갖고 갔다. 행정 직원은 서류를 일일이 대조하여 복사한 다음, 복사본에 공증 스탬프를 찍고 원본을 돌려주었다. 체류허가(Aufenthaltserlaubnis)와 숙소 문제도 해결되었다.
   우리는 9층 아파트 왼쪽에 이어진 3층 건물 1층에 살았다. 아파트 출입문을 들어와서 양옆으로 3세대가 살았는데, 집 앞마당에는 주민들을 위한 주차장이 있었고 그 앞으로는 가로수가 이어져 있는 거리가 있었지만, 차들은 별로 많이 다니지 않아 조용했다.
  거실은 20㎡ 정도 되는데 간이부엌(Kochnishe)이 한쪽 벽에 있어 그 앞에 식탁을 놓고 식사를 했다. 커다란 찬장과 소파도 들여놓았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Diele) 왼쪽에는 욕실이 있는데 욕조와 세면대, 세탁기를 놓고도 넉넉한 공간이었다. 욕실 건너편에는 식품 보관용 높고 긴 선반이 벽에 붙어있었는데 허드레 물건도 넣어 둘 수 있는 창고(Abstellraum)였다.    
   안방도 20㎡ 정도 되는데 내 공부방이기도 했다. 거기에 부부용 침대와 옷장, 한쪽 벽에는 책장, 창가 정면으로는 책상을 놔두고 공부했다. 방앞에는 큰 발코니가 있는데 빨래를 널거나 종종 나가서 햇볕을 쬐며 망중한을 즐기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다듬기도 했다.
   아내는 이 집을 얻고 너무 좋아하며 건축상에 가서 실내용 수성 페인트 몇 통과 배합용 물감, 크고 작은 롤러와 붓 몇 자루를 사서 색을 배합해 집 안 전체를 이틀에 걸쳐 직접 칠했다. 등을 새로 달고 가구를 모두 배치해 놓으니 집이 새집으로 꾸며졌다. 며칠 후 아내는 집안이 다 들여다보인다며 재봉틀(동독제로 서독제의 반값도 안 됨)과 커튼 기지를 사 와 박음질하여 응접실과 안방에 걸었다. 이렇게 새로운 둥지를 꾸미고 나니 튀빙겐에서 각각 따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신혼 때와는 기분도 달랐고 분위기도 달랐다. 여기에서 사실상 우리의 신혼살림은 시작되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항에바이어(Hangeweiher) 라는 작은 호수가 있어 주말에는 가끔 가서 산책하며 휴식의 시간을 갖곤 했다. 대학병원도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출퇴근도 편했다. 우리 집은 작은 아파트였지만 매우 쓸모 있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 행복했고, 아이들이 태어나며 이 공간은 낙원이 되었다.

③ 우리 아파트(Hohenstaufenallee 27)  ④ 아파트 출입문 ⑤ 아파트 건너편 거리
③ 우리 아파트(Hohenstaufenallee 27) ④ 아파트 출입문 ⑤ 아파트 건너편 거리

황무지에서 찾으려는 과일나무

   환경이 바뀔 때 겪게 되는 것은 하루 이틀 여행하며 관광지의 새로운 풍물에 접할 때 느끼는 감상이나 기분과는 전혀 다르다. 더욱이 대학교를 옮겨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며 새 영역을 다루려 할 때는 그 난감함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우선 대학 도서관에서 라부스(Georg Leonhard Rabus)의 자료를 찾아보았다. 라부스의 저서는 물론, 그에 관한 책이나 논문 등도 한편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라부스에 관해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 첫 번째 연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상황은 황무지 저 너머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감만으로 과일나무를 찾아 나선 꼴이 되었는데 한마디로 이것은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건 도박이며 모험이다.
  나는 튀빙겐에 9학기 있는 동안에 고서점을 자주 갔었는데, 거기에는 매년 독일 내 고서목록이 수록된 100쪽 정도의 책자들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새로 나온 고서목록을 얻어 모아두곤 했는데, 아헨에서 우선 그 책자들을 보며, 철학 분야에서 라부스의 저서와 그에 관한 도서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의 주저 한 권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했다. 라부스는 신학자이기도 하여 신학과 종교학 분야에서도 샅샅이 찾아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 내 대학 도서관에서도 라부스 자료를 찾았는데 몇 곳에서 복사해서 보내주었다. 원격 대출 형식이지만 희귀본이라 복사해서 보내주었다. 주요 자료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철학사 책의 ‘찾아보기’에서도 라부스 이름을 찾았으나 대다수 책에서는 이름조차 없었다. 틸 교수에게 자료 수집의 어려움을 이야기했는데, 그는 프랑켄 지방 향토연감에 라부스에 관해 자신이 소개한 짧은 기사 한 편을 복사해 주었다. [Thiel, Christian: Georg Leonhard Rabus(1835-1916). Jahrbuch für fränkische Landesforschung 24(1964), pp. 401-410.]

   라부스는 1835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 1916년 에를랑겐에서 사망했는데, 철학, 신학, 자연 과학, 인간학, 신지학, 심리학 등에 관해서 많은 공부를 했다. 그가 집착했던 일생의 과업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관계를 과학의 틀 안에서 정립해 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논리학의 역사를 체계화했고 논리학개혁 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틸 교수는 이런 점에서 라부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틸 교수는 철학, 사회학, 미학, 수학 등을 폭넓게 전공했다. 특히 프레게에 대한 전문가로서 그의 저서들이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다. 그는 텍사스대학교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교수하기도 했는데 아헨 공과대학교에 초빙되어 과학철학 분야를 교수하고 있었다.
   아헨 공과대학교는 1870년 설립 당시 공과대학으로 출발했으며, 독일 산업화와 공업 기술발달의 견인차였다. 하지만 지금은 인문학부도 포함한 종합대학교로 인재 양성과 독일 과학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⑥ 서재에서 원고 정리 도와줌 ⑦ 아헨에서 첫 크리스마스  ⑧ 항에바이어 호숫가에서 ⑨ 분유 먹고 있는 첫아이
⑥ 서재에서 원고 정리 도와줌 ⑦ 아헨에서 첫 크리스마스 ⑧ 항에바이어 호숫가에서 ⑨ 분유 먹고 있는 첫아이 ⑩ 엄마 품에 안겨 자는 첫아이

아헨 공과대학교에서 첫 학기

   첫 학기(WS 1973/74) 등록을 마치고, 멘자에 갔는데 그곳에서 한국 유학생 몇 명을 만났다. 서로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날 만난 학생들은 모두 이공계열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몇 명은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하며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얼마 후에 알게 되었다. 아헨 공과대학교의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으며 좀 무겁게 느껴졌다. 뮌헨이나 튀빙겐에서처럼 생동성과 발랄함, 자유분방한 활력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저들의 차분하고 무뚝뚝한 듯한 표정 이면에서 눈빛의 예리함을 보며 장래 한국에서 크게 쓰일 재목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기원전 5세기 서양철학을 이끌었던 그리스 자연철학을 배우면서 자연 과학자들도 연구실이나 실험실에서 밤새 연구에 몰두하며 과제에 전념하는 열정만큼이나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류의 삶에 직결된 유용성임을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깊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과학자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분야의 절대가치를 궁구하기 위해서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문학, 예술, 종교, 사회, 사상 등등 다양한 지·정·의의 복합체인 철학이라는 모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근한 예로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하여 많은 과학자는 전공 분야만의 대가가 아니었다. 이 위인들은 본인이 연구한 결과가 인류의 삶, 즉 인간의 생활에서 어떻게 문화화, 문명화되어가고 있는가에 관하여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방향과 목적을 추진함으로써 자연 과학이 인문·사회 과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역설하곤 했다. 하이젠베르크 같은 과학자는 물리학을 철학으로 규정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를 그 근원에서 탐구하였다. 현상만을 분석하며 탐구해가기보다는 현상이 가능할 수 있도록 존재하는 본질―플라톤의 개념을 빌리면 이데아―까지도 천착해가며 과학의 지평을 넓혀가는 게 과학의 원초성이라는 점을 과학도들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⑪ 스잔느 품에서 ⑫ 유치원에서 카니발 때  ⑬ 과테말라 친구 비비안과 말 타고 숲으로 ⑭ 인형분수에서 스잔느와 세 이이를 데리고
⑪ 스잔느 품에서 ⑫ 유치원에서 카니발 때 ⑬ 과테말라 친구 비비안과 말 타고 숲으로 ⑭ 인형분수에서 스잔느와 세 이이를 데리고

어느 날 세미나를 마치고 멘자에 들어서는데 누가 어깨를 툭 치면서 “나 김인오요.”라며 이상우 처 작은 삼촌이라고 했다. 나보다 몇 살 정도 위로 보였다. 나에 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몇 번 만나다 보니 그는 무엇이든지 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바로 내뱉는 매우 직선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아헨에는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내 첫째 남동생과 서울고등학교 동기 동창생으로, 보이스카우트도 같이하며 친하게 지냈다는 학생이었다.
   아헨에 정착하며 나는 과학과 기술이 중추를 이루고 있는 분위기에서 인문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의 문화화와 정신세계의 과학화를 조화·융합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해보았다. 사실 이런 발상은 나만의 공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헨 공과대학교(RWTH Aachen)가 미국의 MIT를 모본(模本)으로 틀을 바꿔가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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