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0)
시간의 여행(30)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2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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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질과 현상
① 1975년 김포공항에서(외쪽부터 제 여동생, 아다, 아버님, 어머니, 이승우, 모친, 여동생, 시모네) ② 1983년 우리 집에서 ③ 아헨 공과대학교 총장과 이승우 박사 ④ 북악산 서울성곽 둘레길 카페에서
① 1975년 김포공항에서(외쪽부터 제 여동생, 아다, 아버님, 어머니, 이승우, 모친, 여동생, 시모네) ② 1983년 우리 집에서 ③ 아헨 공과대학교 총장과 이승우 박사 ④ 북악산 서울성곽 둘레길 카페에서

이승우와의 우정의 고리

   나는 우연스럽게 만난 사람―그 만남이 인연인지 운명인지 알 순은 없지만―과도 서로 간에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나 감성이 공유되는 감이 가슴에 느껴질 때는 깊고 진지한 관계를 이어가며 우정을 지속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인간의 관계성이고 사회성일 수도 일을 텐데, 내겐 그런 만남이 숙명처럼 이어지며 나를 폭넓은 나로 만들어가곤 한다.
   1971년 6월 10일(목) 오전에 김정양 선배 일정에 맞추어 슈투트가르트 몇 군데를 다니고 점심때가 되어 슈투트가르트 공대(HFT) 멘자에서 식사하고 있었는데 한국 사람 몇 분과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초면인 분들이었다. 인사만 나누고 서로 일행끼리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는데 남자 두 분과 여자 한 분 중에 이승우 씨도 있었다. 나는 그와 연락할 사이도 아니고, 만날 일도 없었기에 그날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973년 아헨으로 옮겨와서 몇 달 안 된 어느 날 저녁 이승우 박사가 퇴근길에 나를 찾아왔다. 슈투트가르트 공대 멘자에서 우연히 한 식탁에서 한번 식사한 게 전부였고, 그 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기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는 식사하며 자기가 김정양과 4촌 동서지간이라고 했다. ‘세상이 좁기도 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1975년 이 박사가 부친 장례를 치르고 출국할 때 우리 부모님이 공항까지 나와 전송했었다며 돌아와서 우리를 초대하여 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 박사는 서울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아헨공대에서 토목구조공학을 전공한 후 슈투트가르트 공대 구조공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쾰른에 소재하고 있는 독일 굴지의 건설회사(STRABAG BAU-AG)에서, 그리고 나우만 엔지니어링에서 수석부사장으로 교량설계 관련 일을 했다.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 회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꼴로 퇴근길에 나를 만나러 왔고, 집(Walheim, Florastr. 2a)에도 우리 내외를 자주 초대했다. 나는 주로 듣는 편이고 그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폭이 넓다 보니 화젯거리가 많았다.
   그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계적인 것에 관심이 많으며 여성을 존중하는 여성주의자다. 내가 받은 인상, 주관적인 판단이 그렇다는 것이다. 겉으로 풍기는 모습도 인자하고 아주 멋진 신사다.
   매년 새 차를 타고 오기에 그에게 물었더니 고속으로 달리는 차의 속도감에서 도전과 희열의 참맛을 느낀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동차광’이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 주말 우리를 초대하여 식사 후 차를 마시며 그해 여름에 가족이 남프랑스 니스에서 휴가 때 촬영한 영상물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어느 날에는 친구 부부를 초대한 자리에 우리도 초대하여 소개하고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며 지내기도 했다. 남자 친구는 점잖은 신사분(고 공광덕 박사)이었고 여자 친구는 음대 교수 출신(전 이대 조병옥 교수)이라는 아주 멋진 여성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왔다는 것 같은데 이 박사는 이 부부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이 박사는 매우 부지런하고 깔끔하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흐트러짐이 없는 분이었다. 늘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아주 부드럽게 이야기를 한다. 아버님이 독문학 교수셨다고 했던 것 같다.

   정부의 해외 두뇌 유치로 한국에 나와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콘크리트 사장교’ 구조형식의 올림픽 대교를 설계·시공했다. 독일에서 사용하던 공법들을 그대로 도입하여 시공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전 세계에 건설된 사장교 대다수는 철골 구조이며, 콘크리트 사장교는 국내에 유일할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몇 개 안 된다고 한다. 정부 국책연구기관인「한국건설기술연구원」 원장을 마지막으로 현직에서 은퇴했다.
   이 박사와는 지금도 서로 안부를 전하고 카톡으로 읽을거리도 나누며 거의 매일 접촉하고 있다. 북악산 서울성곽 둘레길 산행하다 생각나 카페에서 문자와 사진을 보내주는 이 우정의 깊은 속맘! 늘 건강 챙기라는 당부의 글도 잊지 않고 보내온다. 그와 맺어온 반세기 우정의 지속성이 이런 관계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동영상을 보내주었는데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Bill & Gloria Gaither의 찬송) 찬송가였다. 다재다능하고 마음이 여리며 따뜻한 친구, 예의와 우정의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이 친구는 참 멋쟁이다. 콧대도 높고 자존심도 매우 강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에게는 천진난만한 소년 같은 순수한 친구, 이승우!
   진정한 우정은 유유히 흐르는 깊은 강물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곡물은 흘러가며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가뭄이 계속되어 물줄기가 마르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 반면에 깊은 강은 땅에 깊이 스며들며 소리 없이 흘러가 대하를 이루는데, 우정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참된 우정은 소리 없이 가슴 구석구석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을 적시며 계절에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는 깊은 강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드물게는 녹조로 물고기조차 살 수 없게 된 물을 흘려보내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오염된 강도 있었지만. 60년의 우정이 깨어지는 이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강이 내 가슴에 깊이 잠기며 흘러가고 있고, 나는 그 깊이에 동화되어가며 행복에 취하곤 한다. 이것이 내게는 큰 재산이고, 내 삶의 의미를 넓고 깊게 채워가는 생명의 원소다. 나는 나와 친구 하려 접근해오는─내가 먼저 접근해가기 어려운 조건 때문이기도 하지만─벗들을 천사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순수한 영혼과 지금도 나는 교류하고 있다.

⑤ 유아세례(왼쪽부터 신부님, 마리-테레즈와 아이들, 큰아들 르노, 시몬, 형님, 이레네) ⑥ 시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식사 후 ⑦ 마리-테레즈와 시몬 ⑧ 1977년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서
⑤ 유아세례(왼쪽부터 신부님, 마리-테레즈와 아이들, 큰아들 르노, 시몬, 형님, 이레네) ⑥ 시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식사 후 ⑦ 마리-테레즈와 시몬 ⑧ 1977년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서

이레네-마리 테레즈-시몬

   아헨에서 아내는 사실상 자유인이었다. 이 말은 새로운 세계에서 삶을 향유하며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날이 즐겁고,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행복감에 너무 감사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퇴근 후에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말리스(Marlies), 유타(Jutta), 레지(Rosi) 등 병원 동료들과 어울려 지냈던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려주고, 날이 화창할 때는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산책하며 우리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냈다.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과제가 확정되어 있고, 차근차근 그 정해진 길을 가고 있어 매일 만족감으로 채워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에는 몇몇 한국 가정과도 오가며 지내는 이웃도 생겼다.
   1974년 초여름 어느 날 아내는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고 있었는데 병원 별관에서 이비인후과 병동 쪽으로 오던 젊은 여자가 옆으로 지나가다 멈춰 서며 말을 걸었다. 벤치에 앉아 자신을 소개하는데 병원 실험실에서 일하는 조수(Laboratorin)며 벨기에 여자란다. 그리고선 자기 오빠가 켈미스(Kelmis, 프랑스어: La Calamine)에 살고 있는데 아들이 한 명 있는데도 얼마 전에 한국 어린이 두 명을 입양했다며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니 좀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이름(Irene Royen)과 주소(Habsburgerallee), 실험실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곤 헤어졌다. 아내를 한국 사람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아시아인은 10명 정도 되는 데 모두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켈미스는 우리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아헨 접경도시다. 아내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분 같다고 했다. 나는 우선 그분의 오빠가 아이들을 입양할 정도의 인품이면 마음씨도 착하고 인간적이리라는 생각, 그리고 이 아이들도 사람들의 생김새, 언어와 음식, 생활습관 등이 생소한 이곳에서 얼마나 두렵고 견뎌내기 힘들까 하는 생각에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고 결정했다. 다음 날 아내가 실험실에 찾아가 만났더니 너무 반가워하며 친구로 지내자고 하고는 바로 말을 텄다고 한다. 이레네의 적극적이고 씩씩하며 활달한 성격은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내는 참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며 즐거워했다.
   며칠 후 저녁에 이레네가 오빠 부부(Simon, Marie-Therese)를 데리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주말 저녁 식사에 우리를 초대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직접 온 것이다. 우리 다섯 명은 스스럼없이 각자 소개를 하고 오랜 친구처럼 말을 낮춰 이야기하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3살이 채 안 된 여자아이와 4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인데 우리를 보자 몸을 숨기려 하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묻는 말에도 대답을 안 하고 완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우리를 불신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애들이 고아원에서 어른들에 불려가 많은 어려움을 당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말을 붙이는 건 고문만큼이나 아픔을 주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애들을 내보내고 나는 시몬에게 이 애들이 마음에 안정감을 가지고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좀 두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시몬은 이곳에서 약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마리-테레즈는 학교 식당에서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일해야 살림을 꾸려갈 수 있을 정도로 서민층에 속해 있었지만 그런데도 아이 두 명을 입양하는 것, 그 마음을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1975년 여름 어느 날 교구신부가 시몬 집안 직계 가족과 친척이 참석한 자리에서 입양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초대된 손님으로는 우리 부부가 유일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는 이레네가 초대하여 벨기에식 크리스마스 음식을 먹으며 연말을 함께 보냈다. 이레네는 서른 살 초중반 정도 되는 미혼여성으로 아주 교양이 있으며, 명랑했다. 우리 다섯 명은 서로 오가며 식사도 같이했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로이엔 집안은 벨기에의 보수적인 정서에 비추어 보면 너무 앞서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대인 관계 때 언행이나 몸가짐은 전형적인 백인의 상류사회 생활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의식은 자유롭고 세계관은 개방적이었다. 형 한 분이 리에지에서 교수로 계시는데, 그 가정도 아이 3명을 아프리카에서 입양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해동포주의란 이상주의일 뿐이라고 단정했었는데, 로이엔 가문의 인간관을 관조(觀照)하며―비록 단면을 본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게 사해동포주의의 구현된 표본일 것이라는 상상을 했었다.
   1976년 1월 14일(수) 저녁 8시 뷔르셀렌(Würselen)에서 리틀엔젤스 공연이 있었는데 그날 이승우에게 시몬 가족을 소개하여 자연스레 교제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퍽 인상적인 밤이었다. 이승우는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이레네와 한두 번 우연히 만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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