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3)
시간의 여행(33)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0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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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질과 현상
① 임신부의 낙엽길 산책(1976년 늦가을) ② 아기의 식사 ③ 숲속 산책길 나들이 ④ 가족사진
① 임신부의 낙엽길 산책(1976년 늦가을) ② 아기의 식사 ③ 숲속 산책길 나들이 ④ 가족사진

생명: 설명 안 되는 신비

    천지 만물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현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퀴즈 문제처럼 내고 답을 찾으라고 한다면 각자의 관점에서 한마디씩 진술하며 가볍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 핵심에 접근해 보면 존재의 원초적인 문제와 관련된, 인류사가 지금까지 밝혀내려고 노력하면서도 찾아내지 못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확실한 정답은 없다. 그러므로 미로를 헤매며 한없이 가도 현상만 보일 뿐 그 원초성은 밝혀낼 수 없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현상인가? 광대한 우주가 위대하고 자연 현상의 변화 양상이 신비롭고 아름답다지만 그런 것은 규명될 수 있는 질료의 형상일 뿐 생명력의 신비는 밝혀낼 수 없다.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명의 탄생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기원과 탄생에 관한 학설을 발표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새로운 학설을 내세우곤 하면서 학문성을 증진해왔지만, 생명의 기원을 가능하게 한 존재의 원초성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세포증식이나 유전자 결합, 혹은 자연 현상에 의한 지질의 변화와 생태계 변화에 따라 생명의 생성과 진화, 변이와 소멸 등이 계속된다고 설명하지만, 그런 것의 창조에 관해서는 설명을 유보하고 있다. 종교의 창조신화나 성경, 경전 등에서는 신의 창조라고 믿고 단언함으로써 답을 제시하지만, 아직 철학은 물론 인류의 어떤 영역의 학문이나 과학도 생명의 기원과 신비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생명의 문제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거리면서 정답이 없는 시소게임 양상으로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창조론은 존재의 본질이 생성된 원초성을 주장하고 진화론은 생성된 존재의 현상이 진화-발전-변화되어가다 퇴화하는 과정까지를 규명하는 과학이므로 이 둘은 결코 타협점도 찾을 수 없고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이질적이며 배타적인 관계를 견지해 가고 있다.
    인간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도 위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여자가 잉태하면 그것만으로도 창조의 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신이 창조하는 것처럼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 한 것은 아니지만, 피조물의 차원에서는 최고의 걸작품을 창조한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인간이 인간을 낳는 것만큼 위대하고 신비로운 게 무엇인가?

⑤ 뭔가 먹고 싶을 때 ⑥ 즐거운 목욕시간 ⑦ 오늘의 몸무게 ⑧ 혼자 놀기 싫을 때(1977. 2. 9) ⑨ 유아용 음료(1977. 8. 16)
⑤ 뭔가 먹고 싶을 때 ⑥ 즐거운 목욕시간 ⑦ 오늘의 몸무게 ⑧ 혼자 놀기 싫을 때(1977. 2. 9) ⑨ 유아용 음료(1977. 8. 16)

그 겨울의 감격과 환희

나는 아내가 임신했다며 알려주었을 때 몹시 놀라며 가볍게 흥분했다. 그때 그 기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으로 나를 덮쳤다. 외경스러운 떨림과 매혹적인 느낌에 빠져든 것 같은 감정, 오토(R. Otto)의 용어를 빌리며 “거룩한 감정”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어쨌거나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만큼 외경스럽고 매혹적인 환희는 없을 것이다.
    1976년 12월 11일 밤 10시경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는데,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진통이 온다며 혼자 차를 몰고 대학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다음 날 새벽 0시 2분에 제왕절개로 첫 딸을 낳았다. 아이는 예정일보다 몇 주 일찍 나와 체중 미달로 인큐베이터에 누워있었고, 아내는 산모 실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매일 인큐베이터가 놓여있는 병실 창가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는데, 그곳의 모든 아이의 눈에는 가리개가 씌어있었고 보랏빛 광선이 내리쬐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고 있었다.
    결혼 후 4년 만에 나는 아기 아빠가 되었는데 그때 내 나이는 34살이었다. 나는 흥분과 환희의 감정에 휩싸이면서도 이 아이를 어떤 인물로 키울까, 특히 유학 생활을 하며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데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가장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이를 건강하고 훌륭하게 키워가며 양육하려는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는 부모의 본능이리라.

   

⑩ 산책 중에 먹는 간식⑪ 호숫가에서 오후 한때(1977. 10. 29)⑫ 엄마 품에서⑬ 바나나 간식
⑩ 산책 중에 먹는 간식⑪ 호숫가에서 오후 한때(1977. 10. 29)⑫ 엄마 품에서⑬ 바나나 간식

아기 침대를 비롯하여 유아용품은 그 전에 모두 마련해 두었던 상태라 아이의 퇴원에 맞추어 준비할 것이 별로 없었다. 아이는 한 달 가까이 인큐베이터에서 성장하며 정상적인 체중에 달했고 각종 면역 주사와 병리 검사 등을 마치고 퇴원했다. 내가 차 뒤에서 아기가 누워있는 광주리를 안고 아내는 아주 조심스레 차를 몰고 집에 왔다.
    아내는 아기를 목욕시키고, 기름을 발라주고 접히는 살에 분을 뿌려주고 저울에 얹혀 몸무게를 재서 기록하며 너무 신이 났다. 하루에 몇 번씩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기름으로 닦아내고 살이 짓무르지 않도록 유아용 크림을 발라주며 아내는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나는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머니의 이런 모성애로 키워졌을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머니가 쏟은 사랑과 정성만큼 어머니를 정성껏 사랑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 고국에 계시는 어머니에 대한 불효자라는 자괴감이 들곤 했다. 천하 누구도 혼자 된 게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생아들은 꼭 낮에는 잠을 많이 자는데 밤 한두 시가 되면 울기 시작하며 아무리 잠재우려 해도 그치지 않고 계속 보채곤 하여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이웃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아무도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너무 좋은 이웃들이었다. 여섯 가정 중에 젊은 여자 한 분이 중학교 다니는 여자아이와 지내고 한 부부는 아이가 없고, 세 명은 독신이었다.
    아내는 아이가 울 때마다 잠재우려고 안고 어르며 잠을 설치곤 했다. 뭔가 불편해서 그랬는지, 엄마 체온을 느끼고 냄새를 맡으며 자고 싶어 투정 부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아기는 엄마 품에 안기면 오래지 않아 잠들곤 했다.        
    한 달쯤 지나니 밤과 낮의 수면시간이 제대로 되어 낮에는 많이 놀고 밤에는 목욕 후 우유를 먹고 트림을 시키고 나면 바로 잠들었다. 하지만 낮에는 혼자 있으려고 안 해서 천장 곳곳에 모바일을 매달아 놓았는데 그 효과도 며칠 못 갔다. 계속 놀아달라고 칭얼대곤 하여 나는 재롱을 부려가며 친구가 되곤 했다. 그런데 이 꼬마가 성깔이 보통이 아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면 그치지 않고 울어대어 애를 먹일 때도 많았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니 아기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생명이 성장하는 과정에 비바람이 있듯이 아기도 자라는 동안에 비바람을 맞게 된다. 처음 닥친 비바람은 감기였다. 밤이 되었는데 아기가 울고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그치지 않고 얼굴이 달아올라 체온계를 아기 겨드랑이에 꽂고 재었더니 39도가 넘었다.
    밤 2시경인데, 아내가 아기 담당 소아과 의사(Dr. M.Husung)에게 전화하여 밤에 왕진왔다. 의사는 열이 높다며 갖고 온 물약을 입에 한 방울씩 넣어 주고 한참을 지켜보다가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자 약 처방전을 써주고 가고 새벽녘에 아기는 잠들었다. 아내는 아기 발에 물수건을 번갈아 싸매주며 꼬박 밤을 새웠다.
    시간에 맞추어 우유를 타서 손목에 몇 방울 떨궈 온도를 재서 먹여주고 어깨에 걸쳐놓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 트림을 시키곤 잠재우기를 몇 주 더 하고 그 후에는 근무 나가게 되어 내가 아침부터 엄마가 되었다. 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내 작업 시간이었으나 아기의 잠은 배고플 때, 기저귀가 젖었을 때, 잠자리가 불편하거나 실내가 너무 덥거나 건조할 때 투정을 부려 그때마다 나는 우유 먹일 시간인지 체크 하고 기저귀 상태를 점검하고 안아 재워 다시 눕히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며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백일잔치 상을 받았고 돌이 되어 이웃의 축하를 받으며 돌잔치 상도 받았다.
    한국에서는 산모가 한 달가량 외출해도 안 되고 찬 바람을 쐬어도 안 되고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고 하여 아내는 아기가 퇴원하는 날만 잠깐 밖에 나갔었고 한 달이 넘도록 외출을 하지 않았다. 식품이며 일용품은 넉넉히 준비해 놓았으므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⑭ 돌잔치 만찬 후 케이크 커팅(왼쪽부터 루노, 마리-테레즈, 아기와 엄마, 이레네, 스잔느) ⑮ 선배며 친구인 스잔느와 돌 때 ⑯ 할아버지, 할머니와 영국 여행(런던 타워 브리지를 배경으로, 1978. 5. 27)
⑭ 돌잔치 만찬 후 케이크 커팅(왼쪽부터 루노, 마리-테레즈, 아기와 엄마, 이레네, 스잔느) ⑮ 선배며 친구인 스잔느와 돌 때 ⑯ 할아버지, 할머니와 영국 여행(런던 타워 브리지를 배경으로, 1978. 5. 27)

새 생명이 탄생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경이로웠다. 조용하던 아파트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니 생동감도 느껴졌다. 나는 아기의 변해가는 모습 하나하나가 새로운 기쁨이 되어 어떤 때는 한없이 내려다보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 애는 복이 많았고, 내게도 복덩이였다. 그해부터 나는 매월 박사후보생 장학금(Doktorandstipendium)을 받았고 박사학위 논문 출판비까지 받았다. 1975년 7월 7일(월) 나는 박사후보생 장학금을 신청했다. 튀빙겐대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큄멜 교수님과 틸 교수님의 추천서는 본인들이 직접 보냈다. 그런데 1년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 나는 거의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헨 공과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국 유학생 가운데 내가 유일한 박사후보생 장학금 수혜자로 선발된 것이다. 튀빙겐에 있을 때 프리드리히-에버트 장학생으로 선발될 때도 그랬지만 독일에서는 장학금을 신청하고 보통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철저하게 심사한다는 말이다. 외국 학생이 독일 내에서 학술 장학생(Stipendiat der Akademie)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나는 한 번 받기도 어려운 장학금을 세 번이나 받았다. 튀빙겐에 있을 때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정부에서 지급하는 우수 장학금(6개월)을 받았고, 프리드리히-에버트 장학금을 2년 받았으며 이번이 세 번째로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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