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5)
시간의 여행(35)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1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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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질과 현상
뮌헨대학교 문장     튀빙겐 대학교 470주년 기념주화(1927년 주조)
뮌헨대학교 문장                  튀빙겐 대학교 470주년 기념주화(1927년 주조)

꿈, 그리고 그 연속 선상에서 

   시간은 가끔 잊어버렸던 자아를 지금의 현실 속에서 구현해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당시 느꼈다. 그것은 내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도 했고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동인이기도 했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알게 되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며칠 지나던 중에 나는 꿈을 이어갈 수 있는 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에겐 거의 불가능했던 모든 현실이 하나씩 실현되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의식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학문에로의 충동과 문화적인 것에 심취되어가는 열정이었고 미에 대한 조형적이고 형상적인 관심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느낀 바이지만, 학문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수단으로 작용했고, 문화적 영역은 나를 끌어당기며 매혹하는 마력으로 약동했다. 나는 거기에 빨려 들어가며 문화의 폭을 문명과의 복합적 차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문의 제 영역은 물론 삶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문화의 구체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내가 문화의 실체, 그 속에 침잠되어있는 형상(形相)을 알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운명처럼, 혹은 본능처럼 불가분리의 관계로 작용하며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미(美) 그 자체에 대한 잠재의식이라는 게 내가 규정하려는 문화 개념의 한 축이다. 나는 이런 모든 현상과 관계 구조를 단순화하여 문화라는 대개념으로 이해한다.

   문화란 문명의 실체를 구성하는 역동력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 의하여 새롭게 진화·발전하며 인간을 의식체계의 구조로 흡입하는 힘이다.
   1978년 10월 말경, 겨울학기(WS 1978/79)가 시작되고 며칠 후 나는 틸 교수님을 찾아뵙고, 내 진료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나는 철학, 신학, 교육학을 아우르는 문화의 큰 그림을 말씀드리며 교수자격 학위 논문(Habilitation)을 준비하려고 한다는 내 견해를 밝혔다. 사실 이 구상은 학문의 대계를 설계하고 싶은 나의 꿈이었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시고 한참 있다가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이 작업을 수행할 것인지, 이론을 정립해갈 수 있는 방법론은 무엇인지 그 구상이 구체적으로 잡히면 그때 그 설계도를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교수님으로부터 긍정적인 말씀을 들으며 나를 믿고 내 계획을 받아주신 교수님이 새삼 크게 느껴졌다.

   내 머릿속에서는 오직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는 철학에 문화의 생성 메커니즘을 포함 시키는 포괄적인 철학 체계 구상과 문화의 원형과 폭을 철학으로 각색하며 그 개념을 새롭게 창출할 구상으로 복잡해 있었다. 철학의 범주에서 문화의 메커니즘을 풀어가며 새로운 틀로 구조화해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실현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은 이상론에 집착하는 작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의 철학화 과정과 그 형성 논리를 체계화해가려는 작업 역시 구상과는 다른 결과로 표출되어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시밭길, 첩첩 산으로 막힌 험지를 쉼 없이 걸어왔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획이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면 성공은 의지에 따르게 마련이다.
   우선 철학과 문화 간의 상관관계에 관한 이론과 학술서가 즐비한 상태에서 여기에 도전하며 독창적인 학설로 철학계에 등장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나는 오랜 시간을 나의 철학관을 세워가려는 구상으로 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의 철학화 과정에 관한 철학 이론과 철학과 문화 간의 상관관계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는 방법론을 정립하여 독창적인 학설로 인정받는 것이다. 나는 우선 설계도 초안을 작성하는 데 1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헨 공과대학교 대학본부(개교 당시 모습)
아헨 공과대학교 대학본부(개교 당시 모습)

공간과 시간

   공간의 이동이란 문화의 진화를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다. 내가 뮌헨에서 튀빙겐을 거쳐 아헨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민족 이동이 문화를 묻혀 가며 새로운 문화에 흡수·동화되어가듯이 나 자신도 이동할 때마다 새로운 문화에 용해되어가며 문화의 폭을 넓혀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뮌헨에서 나는 문화의 양태를 체감했으며, 생명의 활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통과 역사, 자연과 환경, 문화와 문명, 과거와 현재가 약동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나는 삶의 맛과 멋을 빨아들이며 생명의 경이, 사랑의 환희를 느꼈다. 이것은 내게 주어진 행운이었고,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지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동인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경험했던 생생한 인간관계로 인해 이런 인상이 내 삶에 각인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뮌헨은 내겐 인간의 소박하고 순수한 체취가 물씬 배어 나오는 생명력과 따뜻한 인정이 시간의 결정체(結晶體)처럼 영롱이며 반짝이는 아름다운 곳으로 추억된다.

   1968년,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서구 문화에 처음 접하니 모든 게 낯설면서도 신기했고 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며 비참했던 상황을 직접 목격하며 살았던 나로서는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그 당시 서울과 비교할 때 부러움이 솟구쳤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에 나와 세상을 처음 구경한 것 같은 느낌이 그 당시 나의 감상이며 느낌이며 놀람이었다. 어쨌거나 뮌헨은 내겐 애정이 깊은 곳이다.
   그 반면에 나는 튀빙겐에서 문화가 철학, 문학 등과 동질성을 융합시켜가며, 조용히 진화하고 있는 잠재된 힘의 역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시기의 튀빙겐은 옛 모습과 주거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주변의 자연이나 풍광 등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새로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걸음으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섞어가며 화합해가고 있는 곳, 판화나 민속화에서 옛 튀빙겐의 모습을 보며 이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튀빙겐에서 철학과 문화의 장르를 호흡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복이었다. 대학도시의 지성과 낭만은 유유히 흐르는 넥카강의 물결처럼 잔잔하면서도 영혼까지도 자극하는 에너지로 생동했다. 이런 현상을 대학문화가 만들어가고 있는 아카데미즘이라고 규정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어떤 이들은 문예(文藝)와 성애(性愛)가 혼연일체 되어 흐르는 철학적 에로티시즘, 예컨대 에로스 신화에서 그 연유를 찾아 구현해가는 문학적 미학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벨기에-네덜란드-독일, 삼국 만남의 점(Dreiländerpunkt)
벨기에-네덜란드-독일, 삼국 만남의 점(Dreiländerpunkt)

아헨은 내겐 축복의 땅이었다. 나는 스승을 찾아 그곳에 갔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내 학문의 오메가 포인트를 찍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철학과 과학 간의 상관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헨은 내게 추수할 수 있는 수확을 듬뿍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아헨은 네덜란드 벨기에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삼국 만남의 점(Dreiländerpunkt)이다. 국경을 드나들 때마다 언어가 다르고 생활 양식이 다르지만 상생하며 지내는 삶의 현장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문화가 습합(習合)되어가는 과정을 보았다. 이곳에서 거두어들인 큰 수확은 세 자녀를 얻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이보다 큰 수확이 무엇이랴.

   내 의식 속에서는 뮌헨-튀빙겐-아헨, 이 세 도시에 살며 내가 체험한 게 합류되어 하나의 대하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다. 이 흐름이 나의 사상을 형성해가는 배경이 되었다. 뮌헨에서는 문학을 하는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고, 튀빙겐에서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튀빙겐은 나의 유학 시절 가장 아름답고 인상 깊은 추억의 도시인데, 독일 친구들은 물론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친구들과 삶의 폭을 넓혀가며 나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아헨의 경우에는 과학과 기술이 융합하여 잿빛 하늘에 드리어진 구름처럼 도시를 덮으며 밀려가고 밀려오고 있었다. 아헨에서는 이공계 분야를 전공하는 몇몇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들과의 대화에서 현대 과학과 기술이 어느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지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배경이 내 학문과 의식 속 어딘가에 흡수·융합되어 지금도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세 도시의 합류는 다양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안목과 관점이 먼 지평으로까지, 높은 차원의 정신세계로까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끼며, 체험의 폭은 인생의 가치를 증폭하고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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