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6)
시간의 여행(36)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1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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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철학과 신학, 그 여정의 교수
①  Airogram 편지 앞면 ② 연세대 신과대학 이상호 학장님의 편지
① Airogram 편지 앞면 ② 연세대 신과대학 이상호 학장님의 편지

하지만 내겐 꿈이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는 나를 가르쳐주셨던 스승들께 박사학위 받은 소식과 논문을 보내드렸다. 이상호 교수님으로부터 제일 먼저 축하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을 보니 내 편지를 받으시고 즉석에서 답장을 쓰신 것 같았다. 1978년 8월 21일 박사학위를 받은 날 편지를 보냈는데 한 주일 후인 8월 28일 만년필로 쓰신 답장을 보내주셨다. 이 교수님은 신약학을 가르치셨는데, 나는 학부 2학년 때부터 「종교」(고대 중근동), 「신약사」, 「신약원전」, 「신약개론」 등 네 과목을 한 학기에 한 과목씩 수강했다. 4학년 때부터는 내 관심이 조직신학이라 교수님 수업에 참여한 적이 없다.

    나는 교수님이 신과대학장이 신 것을 보내주신 편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내가 “연세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라며 이번 학기에 4분이 새로 부임하므로 총장과 의논해 보겠다는 내용을 적어 보내주셨다. 교수 한 명을 더 채용하려고 하니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하시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거대 기구인 종합대학교는 한 학과나 단과 대학이 교수 충원을 요청한다고 바로 증원해 줄 수 있는 조직이 아니므로 총장도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수 자리를 부탁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을 타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단순히 스승들에게 공부를 마쳤다는 글과 박사 논문을 증정한 것뿐인데 제자의 진로까지 생각해주시는 교수님의 깊은 정을 느끼며 강의하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학위를 마치고 나는 새로운 길을 갈 계획을 세워가기 시작했고, 1978년 겨울 학기 개강 후에 내 계획(꿈)을 틸 교수님께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으므로 교수님과 약속한 것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사부의 명령: 내 뜻에 따르라!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장로회신학대학의 이종성 학장님으로부터 1980년 9월부터 학교에 와서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사회에서는 귀국하면 교수로 임명하도록 결정해 두었기 때문에 빨리 귀국하라며 9월 강의 시간표까지 짜서 보내주셨다. 1970년대 말엽부터 장로회신학대학은 학생들의 학습권 요구로 어수선했다고 한다. 전임 교수에게서 제대로 수업받게 해 달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니 그 당시 교육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학교에서는 우선 전공 분야별로 몇몇 교수를 초빙하기로 했다. 편지에는 이런 긴박감이 배어 있었다.
  학장님께서는 우선 한 학기만이라도 와서 가르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나는 학장님의 편지를 읽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보면 믿을만한 제자, 당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제자라고 확신하시고 이런 편지를 보내셨을 텐데 나로서는 내 계획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본인이 공부한 신학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 장학금을 얻어 줄 테니 가서 공부하라며 나를 수제자로 키우려고 하셨는데, 그 제안을 거절하고 독일로 떠났던 게 내겐 늘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당신이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와서 도와달라는 이 제안마저 거절한다면 제자의 도리가 아니기에 나는 일단 가서 한 학기라도 가르치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귀국했다.

    6월에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는 혼자 갓난애까지 세 명의 아이를 돌봐야 하므로 그 어려움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다.
   1980년 9월 1일 이 학장은 채플 시간에 이형기(역사신학), 박수암(신약신학), 정장복(실천신학), 한숭홍(철학과 신학) 이런 순서로 학력과 경력을 곁들여 우리를 소개했다. 나는 한 학기만 가르치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사회에서는 그대로 임명해 버렸다. 그 당시 장신대 교수는 미국 여선교사(Marie Melrose. 한국명: 왕마려) 한 분을 포함하여 11명이었다. 개설된 과정 중에 신학과, 기독교교육과, 신대원, 대학원이 교육부에서 인가한 정규 과정이고, 여신원, 목회연구과정(목연), 여성지도자 과정 등은 비정규 과정이었다. 과정이 많다 보니 대다수 과목을 목회하고 있는 목사들이나 은퇴한 원로 목사, 총회 기관 간사, 심지어는 학교 기획실 직원에게 맡겨 한두 과목씩 가르치게 했다. 학부 일반교양 필수과목들과 전공선택 과목 경우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나에게는 일반교양과목, 신학과 과목, 기독교교육학과 과목이 모두 배정되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나는 매 학기 7과목에서 10과목 정도, 강의 시간으로는 24시간에서 27시간까지 강의해야 했다. 교무처에서 일방적으로 과목을 정해 수업시간표를 짜서 보내주었다. 사실상 나 혼자 시간강사 7, 8명 몫을 한 셈이다. 실례를 들면, 1981년 1학기 내게 주어진 과목은 철학개론(4시간) 철학사(3) 국민윤리(4) 고급독어(2) 독어신학강독(2) 현대인의 사상(4) 교육신학(3) 기독교윤리학(3시간, 목연 과정) 현대기독교윤리(3시간, 대학원) 등 9과목이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강의 시간은 28시간이었다. 한 학기 동안 강의한 시간만 400시간이 넘었다. 여름방학에는 계절학기 과목도 맡겨졌다. 평교수는 최대 9시간, 보직교수는 3시간에서 6시간 정도 강의한다는데, 내 경우는 한 학기에 교수 3명 이상의 수업을 하도록 강요당했으니 학교로서는….

   

③ 1980년 당시 있던 장신대본관(현재는 철거됨)
③ 1980년 당시 있던 장신대본관(현재는 철거됨)

교사는 3층으로 된 본관 건물 한 동뿐이었다. 몇몇 작은 건물은 사택과 기숙사였다. 총무과와 교무처 등 기구는 본관 중앙 쪽에 있었고, 학장실과 시니어 교수 연구실(2분이 사용), 전임강사들과 신임 교수연구실은 3평쯤 되는 작은 방이었는데, 3명이 같이 사용했다. 한쪽 벽에 회색 철제책상 2개를 붙여놓았고, 다른 쪽 벽에 책상 하나를 놓았는데 그쪽에 출입문이 있었다. 이런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겨울에는 조개탄 난로가 유일한 난방기구였다. 도서관은 건물 왼쪽 끝 지하에 있었고, 당시 장서는 1만 권 정도였는데, 오래된 일본 책과 미국 신학교에서 기증한 복본이나 폐기된 오래된 도서, 기증받은 도서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강의실은 본관 2층과 3층을 사용했으며 오른쪽으로 300명이 장의자(長椅子)에 밀착하여 앉아야 하는 예배실이 있었다.

    첫 시간 수업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독일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는데 어떤 내용으로 강의하려나’라는 호기심으로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참 순수하고 맑은 얼굴들, 나로서는 강의하는 게 처음이므로 약간 긴장되었다. 그동안 설교나 특강 등은 많이 했어도 한 학기 내내 한 과목을 45~48시간 강의하는 것은 설교와 다르게 매우 긴장된다. 3시간 분량의 내용을 압축하여 매주 가르쳐야 하므로 한 과목을 가르치려면 준비 시간이 두 세배 이상 걸렸다. 첫 수업 때부터 나는 강의 노트 없이 학생들을 보며 강의했는데, 학생들은 노트에 적으며 열심히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년 할 때까지 수업 중에 학생들이 강의와 직접 관계되거나 방계 되는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버벅거리거나 몰라서 당황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질문이든지 즉석에서 단답식으로 간결·명료하게, 어떤 질문의 경우에는 역사적 배경까지 설명하며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철학사 시간에 수업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질문을 할 경우에도 나는 연도와 관련 학설이 태동하게 된 연유까지도 정확히 설명해 주곤 했다.

    어떤 학생이 “교수님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세요.”라고 하여 나는 절대 그런 말 해서는 안 된다며 경고한 적이 있다. 교재를 펴놓거나 강의록을 작성해 읽어가며 강의할 수 없는 형편인데, 강의마저 내용이 중구난방으로 어긋나고, 틀리고 한다면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할 텐데, 그래서 내용을 거의 암기하여 강의하다 보니 이런 별명이 붙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로서는 듣기 거북한 별명이었다.  

④ 2002년 졸업한 최유진의 감사 편지  ⑤ 2010년 정지혜(내 옆 여학생)의 추억을 담은 편지(2007년 은퇴 학기 종강 때 찍은 사진. 학생들이 마련한 케이크) ⑥ 편지 봉투
④ 2002년 졸업한 최유진의 감사 편지 ⑤ 2010년 정지혜(내 옆 여학생)의 추억을 담은 편지(2007년 은퇴 학기 종강 때 찍은 사진. 학생들이 마련한 케이크) ⑥ 편지 봉투

3학점짜리 수업의 경우 중간에 10~15분 정도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때 학생들은 구내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와 교탁에 놓기도 한다. 나는 “절대 그러지 말라!”며 강의로 목이 칼칼해도 입을 대지 않았다. 몇 번 그러고 나니 쉬는 시간에는 개인적으로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로서는 쉬는 시간마저도 입을 다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학생들은 나를 많이 좋아했다. 이런 반응이 내겐 감동으로 와 닿았다. 어느 여학생은 서울의 학생 문화 공간을 안내하겠다며 내 마지막 수업시간까지 밖에서 기다렸다가 광화문 어느 곳인지 대학생들이 많이 가는 음악 공간 같은 데로 데려가 요즈음 대학생들의 문화가 이렇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복층 건물이었는데 위층에서 아래 공간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어떤 여학생은 꼭 꽃 한 송이씩을 작은 꽃병에 꽂아 책상에 놓고 가기도 하고, 어떤 여학생은 피곤하실 텐데 드시라고 귤 몇 알을 놓고 말 붙일 사이도 없이 얼른 나가 버렸다. 어떤 여학생은 청주 집에서 가져왔다며 밤을 한 봉지 놓고 가기도 했다. 나는 근로학생이나 조교에게 이런 것을 가져가라고 하곤 한 번도 학생들이 가져온 것을 먹거나 집에 가져간 적이 없다.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진심을 드러내는 표현방식은 차이가 있지만 하나같이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눈빛은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제자들이 대학교 총장, 목회자, 목사 사모, 여자 목사, 교수, 교사, 총회 기관 중책 임원, 외국 선교사, 환경운동가 등등 다양한 직종에서 활동하며 한국 사회와 교회를 위해 크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제자를 사랑했고 키워왔던 교수로서의 내 삶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요즘도 환갑의 나이들인데 연락을 하며 모시겠다고, 만나 뵙고 싶다며 연락을 해오는데 한창 바쁠 텐데 부담이 될 것 같아 늘 다음에 시간 내자며 얼버무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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