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7)
시간의 여행(37)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2.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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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철학과 신학, 그 여정의 교수
1980년 추계 신앙사경회(17-19일) 때 학생들과 저녁준비(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1980년 추계 신앙사경회(17-19일) 때 학생들과 저녁준비(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긴 겨울, 깊은 생각

 

   1980년 12월 13일(토) 수첩엔 빨간 볼펜으로 “독어(I, II) 시험(11시에 합반으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 밑줄에는 “L1-13"(1-13과까지)이라고 쓰여있었는데 시험 범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학과와 기독교교육과가 같은 시간 같은 문제로 시험 보도록 준비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각과 별로 시험을 보게 되면 난이도 문제로 학생들이 불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성적에 예민함으로 수업은 과별로 하더라도 시험만은 같은 시간 같은 문제로 보도록 나는 늘 신경을 썼다.

   나는 시험 기간 전 한 주일은 한 학기 동안 강의했던 내용을 간추려 총정리해주고 시험 보도록 했다. 학생들이 보기엔 융통성 없는 교수로 보일 수도 있겠고, 불평도 있겠지만, 나는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12월 9일(화)부터 2박 3일 동안 한강 호텔에서 ‘1980학년도 교수 퇴수회’를 가졌다. 부서별로 이번 학기 경과보고와 새 학기 학사일정 및 건의 사항 등이 토론의 주제로 다루어졌다. 마지막 날에는 총무처장의 종합적인 학교 상황 보고가 있었는데 질문만 몇 분이 하고 끝났다. 퇴수회 기간 동안 쉬는 시간과 자유 시간은 친교의 시간이었다.

   퇴수회 종합 자료집에는 내년도 보직 교수 명단과 분과 위원회 위원 명단 등이 실려있었고, 교무처 보고서에는 강의 과목과 담당 교수 명단, 강의 시간표까지 완전히 짜여있었다.      학장님은 내가 혼자 귀국한 것을 보시고 무슨 낌새를 차리셨는지, 나를 도서관장에 임명했고, 교무처에서는 내가 담당해야 할 과목을 공지했다. 대학원에서는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 하는 학생 여러 명의 명단에 나를 지도교수로 기재해 놓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나는 내 꿈이 있었고, 틸 교수님과 약속한 것이 있기에 이번 학기를 마치고 학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떠나려 했는데, 사실상 묶여버린 것이다. 퇴수회 후에 학장님께 내 계획을 말씀드리려 찾아갔더니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 박사, 한 학기 가르쳐보니 어땠어. 학생들이 한 박사를 너무 좋아하더군. 독일 가서 가족을 데리고 와. 와서 같이 일하자고.” 내가 좀 머뭇거리자 “어쨌든 꼭 와야 해.”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사람을 많이 다뤄보아서 그런지 내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 같다.
   12월 13일 학교 통근 버스에서 내려 본관 현관으로 들어가는데 청소부 아주머니가 물통에 대걸레를 담갔다 꺼내 가며 복도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겨울이라 물바다로 해 놓은 데 살얼음이 끼어 나는 몇 걸음 만에 미끄러졌다. 왼쪽 무릎을 바닥에 부닥쳤는데 전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하며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사무처 직원이 잡아 온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갔는데 학교에서 연락해주어 기다리고 계시던 부모님과 곧바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다. 무릎뼈에 금이 가서 철심을 박고 깁스를 하고 침대 폴대에 다리를 매달고 2인용 병실로 옮겨졌다.

   내 계획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독일어 시험만 채점하면 성적 보고서를 제출하고 학장님 면담을 한 후에 20일 독일로 출발하려 기행기표도 예약해 두었는데 병원에서는 뼈가 붙으려면 한 달 이상 걸릴 거라며 막연한 이야기만 한다.
   13일 아침에 독일어 시험 보려고 왔던 학생들이 시험이 연기된 사유를 듣고 그날 저녁부터 매일 여러 명씩 문병을 왔다. 첫날 저녁에는 양금희가 왔고, 그다음 날부터는 손상웅, 김석, 곽수광, 이길원, 이재순, 박보혜, 염신승, 김종훈, 나영미, 남윤미, 조석원, 진경우, 김성진, 고병희, 주철희, 성정희, 정은옥, 박충호, 그리고 어느 날에는 학생 여러 명이 같이 오기도 했다. 교수님들은 모두 오셔서 오래 머물다 가셨다. 대학원생들과 직원들은 수시로 들렀다.
   김중기 교수와 김은동 부부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김창식 목사와 교인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며 위로의 말씀을 했다. 하여튼 매일 몇 차례씩 문병객이 와서 옆에 있는 환자에게 미안했다. 그분은 한화 공장장이었는데 기계에 왼팔 어깨까지 절단되어 몹시 좌절하고 있었고, 부인과 형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침울한 분위기에 문병객으로 북적대는 게 그분에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1980년도 장신대 출석부들
1980년도 장신대 출석부들

12월 24일에는 김윤갑 목사가 와서 성탄 예배를 드리고 오래 머물다 돌아갔다. 밤 8시경에는 김홍철과 음악 활동을 같이했던 가수 최성욱(신학과 2학년)이 부인 최안순(1972년 ‘산까치야’를 부른 가수)과 병문안을 왔다. 연말 즈음에는 가수들이 한창 바쁠 텐데 크로마하프를 갖고 와서 내 침대 가에서 캐럴을 부르며 연주했다. 갑자기 캐럴이 울려 나오자 복도에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환자와 가족들이 몰려나와 예상치도 못했던 귀한 가수 두 분의 노래를 들으며 너무 즐거워했다. 크리스마스 캐럴 몇 곡을 더 부르고 앙코르 요청을 받고 ‘산까치야’를 불렀을 때 분위기는 절정이었다. 나는 그 부인이 1970년대 유명한 가수였다는 것을 그 후에 학생들에게서 들어 알게 되었다.

   나는 한 학기 가르치며 제자들의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사랑, 동료 교수들과 직원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에 너무 감동했다. 내 마음은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이런 곳을 등지고 매몰차게 떠나며 이 인연을 끊어야 하나, 다음 기회를 생각하며 일단은 몇 년 더 있어야 하나, 매일 밤 내 생각은 요동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 해!’, ‘아니야, 제자들의 이 사랑을 어떻게 내팽개칠 수 있어!’ 이런 갈등은 나를 점점 한쪽으로 밀고 갔다.
   한 달 정도 지나서 퇴원하고 깁스를 한 채로 집에서 누워 있었다. 재진 일에 담당 의사를 만났더니 뼈가 잘 붙었다며 깁스는 몇 주 정도 있다 제거할 거란다. 의사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지금 이 상태로 여행해도 되므로 독일에 가서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가 진료받으라며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발을 무리하게 쓰지 말라고 했다.

   아헨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틸 교수님을 찾아뵙고 귀국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은 반가워하며 깁스한 다리를 보시고 그 연유를 들으시곤 한국에서 가르치며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하게 물으셨다. 나는 차근하게 모두 말씀을 드리며 학교 분위기, 교수와 학생들의 관심, 내가 가르쳤던 과목, 이 학장님이 하셨던 마지막 말씀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교수님은 학교에서 필요로 한다는 데 우선 가서 가르치고, 나와 약속한 계획은 다음 기회로 일단 밀어놓자고 먼저 제안을 하셨다.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매우 난감했었는데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2월 2일(월) 아헨 대학병원 정형외과에 가서 의사를 만났더니 엑스레이 필름을 보고 깁스를 떼도 된다며 내일 오라고 했다. 50일 만에 깁스에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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