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40)
시간의 여행(40)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20.01.0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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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철학과 신학, 그 여정의 교수
① 연구실에서 ② 주제강연을 마치고(한국 기독교 학교 연합회 제28회 동기 교목 수양회, 1988.1.12-15)
① 연구실에서 ② 주제강연을 마치고(한국 기독교 학교 연합회 제28회 동기 교목 수양회, 1988.1.12-15)

교무처장   

   1970년대 말엽부터 한국에서는 학생운동이 과격화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에는 광화문, 종로, 서대문 등을 비롯하여 대학가에서도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매일 전쟁 아닌 전쟁이 벌어졌다.
   장신대 총학생회는 학생운동의 명분으로 “민주 장신!”을 표방했다. 하지만 그건 종합관에 내걸린 걸개그림을 장식하고 있는 구호일 뿐 그 핵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생들은 학교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교수는 학부(college)를 폐지하고 신대원 중심 신학교(seminary)로 개편하자는 안을 공론화하려 했고, 어떤 교수는 학생들의 의욕과 자존감을 짓밟는 말을 강의 시간에 공공연하게 토해냈다 봉변을 당기도 했다.
   교무처장과 학생처장, 그리고 학생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려있는 4인방 교수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매일 붙여졌다. 어떤 교수의 연구실은 문짝을 부수고 시뻘건 스프레이로 바닥과 벽에 욕설 낙서를 하고, 수업하는 교실 앞에서는 꽹과리를 치고 메가폰으로 학생들을 충동하며 수십 명이 몰려다녔다. 여학생 몇 명은 종합관 앞 미스바(Mizpah) 광장에서 삭발하는 등 흥분한 학생들의 행동은 갈수록 더 격화되어갔다.

 

   경찰은 수시로 동원되었고, 직원이 끌려가 복면한 학생들에게 린치당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이사장실과 학장실의 모든 집기를 마당으로 내동댕이치고, 그곳을 점령하여 아지트로 삼고 몇 달 동안 숙식하며 투쟁했다.
   총학생회장은 메가폰을 허리춤에 차고 학생회 임원 10여 명을 거느리고 다니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대학마다 소요사태와 학교 분규는 비슷했다. 내가 연구 학기로 떠나기 전까지 1년여 상황이 이 지경이었다.
   나는 5월 말에 귀국하여 학교에 들렀더니 조기 방학으로 교정은 조용했지만 사실상 운동권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된 상태였다. 소위 저들이 말하는 해방구였다. 이사장실과 학장실은 여전히 학생들에 의해 참모본부와 작전본부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4인방으로 낙인찍힌 교수 한 명은 휴직계를 내고 미국으로 출국했다.
   혹자는 교무처장 자리가 좋은 보직이라 내가 망설임 없이 넙죽 받아들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인즉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험지로 나를 떠밀어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③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1 ④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2 ⑤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3
③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1 ④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2 ⑤ 수업을 마치고 기념사진 #3

그 당시 교육정책은 졸업정원제(이하 졸정제)로 해마다 무조건 학생들을 일정 비율로 퇴학시켜야 하는데, 학생들이 울고, 학부모들이 찾아와 울고 사정하고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다. 어제까지 가르쳤던 제자들을 몇 점이 모자란다고 퇴학시켜야 하는 강제법으로 인해 사제간의 연(緣)이 깨지기 시작했다. 신입생을 정원보다 30% 더 뽑아 졸업할 때 정원 수만 졸업시키게 하는 이 제도, 졸정제는 몇 년 더 계속되었다.
   내가 교무행정을 맡고, 학생 대표를 만나고, 운동권 학생들과 만나 이제 모든 것을 털고 새 학기에는 새롭게 시작하자며 설득하고, 학장이 학부모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했더니 학생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권 주동 학생들도 내 과목을 몇 과목씩 수강했고 나를 많이 따르던 학생들이어서 내가 접촉하는데 거절하거나 제안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로 나오지는 않았다.

    학장이 나에게 교무처장을 맡긴 것은 모험이었다. 30여 명의 교수가 있는데 출국하는 나에게 학장 유고 시엔 학장직을 대행해야 하는 보직을 맡으라고 한 것은 학생들이 나를 많이 따르고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태 수습의 적격자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 당시 학생들은 매우 흥분되어 있어 아무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대학에서는 학교 실험실이 불타고, 시내는 최루탄 연기와 타이어 태워 솟아나는 시커먼 연기, 깨진 보도블록과 벽돌 조각으로 깔려 폐허처럼 흉물스레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신대는 차츰 정상화되어가며 학업에 전념하는 분위기로 변해갔다. 나는 이것을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천륜이라고 본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이상 무엇이 위대할까.

    나는 어릴 때 “내리사랑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그때는 그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생각하는 폭이 넓어지고 내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다 보니 나도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사랑, 나는 학생들을 대할 때 언제나 그 뜻을 명심하며 실천하려 노력했다.
   내 생일 때면 학생들이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서 생일 노래를 부르고 축하해 주는 사제간의 이 따뜻한 정은 배움과 가르침의 제도적인 메커니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아름다움은 인격과 인격의 교류, 인간애의 상호 유기성이 꽃피운 것이라는 말 밖에는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⑥ 세미나 수업 후에 1 ⑦ 세미나 수업 후에 2 ⑧ 세미나 수업 중에 3 ⑨ 세미나 수업 중에 4
⑥ 세미나 수업 후에 1 ⑦ 세미나 수업 후에 2 ⑧ 세미나 수업 중에 1 ⑨ 세미나 수업 중에 2

남부지검에 제출한 각서

    시내에서 데모하다 잡혀 경찰 조사를 받고 남부 지검으로 송치되어 온 학생이 있는데 “지도교수를 보내라!”는 검찰의 연락을 받고 박 학장이 나보고 가라고 하여 가긴 했지만 나는 그 학생의 지도교수가 아니었다.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더니 학생은 머리를 숙인 채 몹시 떨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젊은 검사가 나와 학생 관계를 묻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후에 내게 백지와 모나미 볼펜을 건네주며 각서를 쓰란다. 나는 참 난감했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일도 아닌 것으로 무슨 각서를 써야 하는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각서를 쓰라는데, 내가 왜 각서를 써야 하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 그는 앞으로 이 학생이 다시는 데모에 가담하지 않도록 잘 지도하며, 만일 다시 이 학생이 이런 일로 잡혀 오면 책임을 진다는 내용으로 쓰라는 것이다. 소위 신원보증을 겸한 책임 각서였다. 나는 그런 각서를 안 쓰겠다고 거절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학생은 곧바로 구속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학생을 위해 내 양심으로는 전혀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앞으로 이 학생(이름)이 다시는 데모하지 않도록 잘 지도하겠습니다.”라고 간단히 적고 연월일과 내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하여 그렇게 해서 제출했다. 그는 반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반말처럼 느낄 수 있는, 게다가 목소리엔 사람 냄새가 배어있지 않은 말투로 말하며 우리를 거만스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내민 각서를 읽어보곤, 그 학생에게 “다시 이런 일로 잡혀 오면…”. 어쨌든 협박과 무서운 언어적 압박과 냉동고 같은 분위기가 끝을 내렸다.

⑩ 제자들과 기념사진
⑩ 제자들과 기념사진

이 소문이 학생들에게 알려져서 그런지 학생들이 교무처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바뀌었다. 2학기 개학 전에 학생들이 점령 공간을 비웠고, 직원들과 일꾼들이 마당에 던져진 집기들과 강의실 책상, 의자들을 제자리로 옮겨놓으며 학교는 새로운 모습으로 2학기 개학을 맞았다. 개학 때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정상적으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신대원 입학시험을 학교 밖에서 치러야 했고, 모든 수업은 통신문을 통해 교수별로 수업을 하고 과제로 평가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내가 교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며 사태는 수습되고 교수-학생 간담회도 하는 등 학생들도 학교 정상화에 협조했다.

    새로 임명된 학생처장도 학교사태 수습에 도움이 되었다. 전임자는 엄벌주의로 학생들을 다스리려 해서 학생들에게 크게 봉변을 당하고 물러났는데, 새 학생처장은 학생들과 대화하며 학생들을 선도했다. 나는 교무처와 학생처가 학생들을 학칙으로만 다스리지 않고 포용해주었던 것이 학교 정상화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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