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54)
시간의 여행(54)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20.03.14 20: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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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많은 만남 그러나 영원한 고독
① 연애 시절 ② 튀빙겐 기숙사 창가에서  ③ 아버님 회갑연 때 ④ 여름 어느 날 ⑤ 어느 가을 아들과 데이트 중
① 연애 시절 ② 튀빙겐 기숙사 창가에서 ③ 아버님 회갑연 때 ④ 어느 가을 아들과 데이트 중  ⑤ 여름 어느 날

나와 너, 그리고 만남의 미학

   만남은 여운을 남긴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서 물결치며 흐르고 있는 것은 만남이었다. 몇몇 쓰라린 만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수없이 많은 만남으로 나는 나를 성숙시켜가며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갔다. 내가 눈감는 순간까지도 이 수많은 인연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느냐에 따라 인격의 형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했다. 중학교 입학하는 날부터 나는 신체적 조건이 나를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의식이 생겼다는 것, 아니 그렇게 내몰아쳐졌다는 것은 나에게 내려진 가혹한 일이었다. 너무 일찍 인생의 쓴맛을 체험하게 됨으로써 나에게서는 어린애다움이 건너 뛰어졌다.
   내 일생에 이런 아픔이 몇 번 있었다. 아픔은 상처로 남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는 순간, 삶의 환희와 기쁨이 잉태한다는 것을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나와 너의 만남이 나를 나 되게 하는 창조적 에너지로 역동했다. 이 과정을 나는 만남의 미학이라고 명명해 본다.

아내의 죽음

   2011년, 아내는 큰딸이 아이 두 명을 데리고 LA에 여름 캠프 가는데 같이 가서 3개월간 지내고 돌아와 몸이 좀 이상하다며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10일간 정밀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전이성 폐암 4기로 암이 뼈에까지 전이되어 수술도 할 수 없고, 방사선 치료도 의미 없다며 생존 가능성이 몇 개월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큰딸은 여러 경로를 통해 폐암 명의를 소개받고 찾아가 그분에게 진료를 의뢰했다. 그 전 병원에서 검사결과자료와 CD(X-ray, CT, MRI) 등을 받아 넘겨주었는데 이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도 거의 같았다. 암은 이미 머리와 팔, 골반에까지 퍼졌으며 오른편 상완골 속은 이미 괴사 되어가고 있었다.
   담당 의사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는 암의 진행을 늦추는 것뿐이라며 폐암 표적치료제를 처방해 주었다. 이 약은 우리의 서광이었다.
   퇴원하여 표적치료제 한 알씩을 복용하며 며칠 지내던 어느 날 오른쪽 팔이 저절로 부러졌다. 뼈 촬영 결과 팔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암이 뼈대를 갉아가고 있었다. 깁스하고 한 달 정도 지났는데 신기하게도 뼈가 붙기 시작했고 골수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몇 달 후에는 팔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차츰 폐의 암 부위도 축소되고, 암 수치도 낮아지고 있었다.

    아내는 스스로 차를 몰고 친구들 모임이나 경조사에 참석하기도 했고, 한 주일에 하루는 양평 숲속 친구 별장에 가서 친구들과 보내기도 하고, 가족들과 며칠씩 여행도 하고 휴양림에 가서 자연에 취해 소녀처럼 천진하게 즐기며 나날을 보냈다. 여름에는 해변에서 피서하며, 이렇게 하루하루 평범하게 생활을 이어갔다.
   거의 5년을 이렇게 지냈는데, 2016년 7월 28일 손녀들이 와서 즐겁게 지내고 저녁 식사까지 한 후 갑자기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에 가서 20분 만에 소천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100세 시대라는데 젊은 나이에 떠나는 게 애석하기도 하지만 재미있게 지내다 고통 없이 한순간에 눈을 감았으니 행복한 죽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가 운명하고, 장례 기간 내내 장신대 교직원들은 물론. 친구들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며 통곡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생전의 행실이 어땠는지 드러난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는 철이 바뀔 때마다 학교에 가서 정원을 가꾸고 제초작업을 하고 꽃나무 가지치기 등을 하며 자원봉사를 했다. 교수부인회에서 매년 개교기념일 행사의 하나로 열곤 하는 바자회 때는 학생들에게 덕을 베풀며 아들딸 대하듯 애정을 보였던 게 이런 결과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아내의 현숙하고 범절이 높은 성품이 많은 이들에게 큰 여운으로 메아리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내가 협동 목사로 사역했던 삼양제일교회에 20년간 출석하며 한 번도 구설에 오르거나, 언행이나 품행으로 실수를 한 적이 없다. 늘 겸손하고 다소곳하며, 천성적으로 누구와도 함부로 말을 섞는 성격이 아니므로 교인들이 좀 어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나 역시 20년 동안 사역하며 예배 후 행사가 있는 날 교회 식당에서 식사할 때 외에는 개인적으로 어느 교인과도 식사한 적도 없고 커피 한잔 같이 마신 적이 없다. 언젠가 교회 청년들이 기습 방문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우리가 교인들을 집에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개인적인 친교가 당회장 목사님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고 교인들과 어울리다 보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어 우리는 개인적 접촉은 피했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교인들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간격을 유지하며 지냈는데도 우리를 많이 따르는 게 나로서는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비롯하여 장로님들과 교인들, 특히 연세 많으신 권사님들이 무릎이 아파 잘 걷지 못하면서도 날마다 조문왔고, 발인 날도 아침 일찍 와서 고인과 영결을 했다. 10년 전에 사임하며 교적(敎籍)도 옮겼는데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많이 와서 조의를 표했다.  

   우리 자녀들이 출석하는 소망교회에서는 장례 일체를 맡아 매일 예배를 드리며 도와주었고, 발인 예배와 화장, 매장에 이르기까지 일체 예식을 맡아 진행했다.
   제자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특히 배요한 목사는 부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일을 거들어 주었고, 발인하는 날 운구 운반도 도우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가끔 우리 내외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며 우리가 어디에 가도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주님의 은혜일 테지만.

⑥ 양재천 산책길에 달을 손에 넣고 ⑦ 지상에서의 마지막 미소
⑥ 양재천 산책길에 달을 손에 넣고 ⑦ 지상에서의 마지막 미소

영원한 고독

   인간을 “신 앞의 단독자(單獨者)”라고 했던 키르케고르의 말이 기억난다. 인간은 늘 만나며 헤어지는 과정에서 홀로 남겨진다. 신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친구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심지어 나와 나의 의식세계와의 관계에서조차도 인간은 언제나 외톨이가 되게 마련이다. 나는 이제 내일이 점점 내게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며 고독한 시간의 한순간을 생각하는 때가 많아졌다.
   부모님을 차례로 보내고, 아내를 먼저 보내야 하는 영결의 슬픔을 안고 있었지만, 그런 시간을 나도 남기게 될 것이다.
   나는 삶의 단락이 새로 펼쳐질 때마다 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져 오곤 했던 것을 삶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인생의 많은 연(緣)을 내 가슴에 담고 그 아름다움과 슬픔을 삶의 역동성으로 느끼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시간도, 아무리 내가 시간의 추억에서 환희의 순간을 떠올려도 고독은 또 다른 삶의 역동력으로 내게서 약동한다. 영원한 고독, 그것은 어쩌면 운명하는 순간에도 주검에 드리워질 것이다.

시와 인간, 그리고 그 사잇길

   2017년 11월 20일, 내가 시인으로 등단한 날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창작이라기보다는 많은 시집을 읽으며 감명 깊었던 시상(詩想)을 떠올리며 읊조려본 습작에 불과했다. 훗날, 이 원고 뭉치를 폐기해버렸다.
   대학 시절부터 나는 시문학의 미학적 요소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고, 매일 열심히 습작하고 찢어버리곤 하며 시의 본질을 익혀가기 시작했다.
   선배이며 친구인 등단 시인 최연홍과의 교제는 나의 시성(詩性)을 보다 세련되게 정제하는 촉진제가 되었고, 이로써 나는 차츰 시의 미학에 심취되어갔다.
   나는 시를 인생의 진솔한 표현으로 이해한다. 이 말은 인간을 정화하는 순수성이 시의 본체라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며 이런 것을 늘 경험한다. 시란 가슴으로 느껴지는, 삶의 대상에 대한 원초적 표출이며 속까지 투명한 수정 같은 것이리라. 이런 시성의 맥락에서 나는 시를 쓰고 있다.
   나는 기교주의나 형식주의의 틀을 깨버리고 “시 쓰기의 탈형식주의”(『시집 1』, 자서)의 이상으로, 시상의 순수함을 투명하고 진솔하게 드러내려는 자세로 시를 쓰고 있고, 그렇게 쓰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 이런 시의 미학을 나는 『시집 2』 서시(序詩)에서 “시 쓰기의 나체주의”라고 규정했다. 시를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으로 이해한 것이다.
   시와 인간은 이렇게 본다면, 늘 현실과 이상, 본질과 현상,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등의 상관적 경계 위에서, 다른 표현을 빌리며 이 양자 간의 사잇길에서 연동(連動)하는 삶의 동인이라 하겠다.

14. 헤어짐의 모습을 그려보며

회자정리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셨다. 학생들이 한자 공부하는 것을 지루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아시고 선생님은 고사성어에 얽힌 구수한 이야기로 학생들을 집중시켜가며 수업을 했다. 그때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고사에 얽힌 의미도 배우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만나고 헤어짐, 생기고 소멸함은 만물의 진리이며,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닐까.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철학자는 “만물은 흘러간다”(panta rhei)라는 명언으로 생명의 본질을 설명했고, 니체 역시 “만물은 오고 만물은 지나간다”(Alles kommt, Alles geht)는 진리를 역설했다.

   나는 이 명언의 의미를 부연 설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와 만났던 모든 인연과 끝맺음을 해야 하는 헤어짐의 모습을 그려보며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고 싶을 뿐이다. 이미 많은 친구가 유명을 달리했다. 친척들도 여러 명이 가족의 곁을 떠났고, 존경하는 스승들도 모두 돌아가셨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나의 작품들과 원고들을 정리해 놓고 가고 싶다. 그 준비 과정에서 이미 종교학을 정리해 출판했고, 나의 신학(상, 하권)을 정립해 출판했으며, 틈틈이 써 왔던 시를 엮어 시집 두 권을 출판했다. 지금도 시집 두 권 이상의 분량에 해당하는 작품이 원고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대학 시절인, 1960년대에 창작한 시들도 수십 편 된다.
   나는 영결의 시간에 가족들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제자들, 친구들, 동료들과 신학계, 철학계, 기독교 교육학계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내겐 이렇게 헤어짐이 아름다운 이별이며, 위대한 시간이다.
   
   이 회고록을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친다. 

환희의 눈물

한숭홍

나는 순간마다 내 운명에 덮친
절망의 한계선상에서
원망하며 울부짖지 아니한다네
푸른 초원 넓은 평야에서
독수리처럼 창공으로 기상하며
내 인생의 환희에 눈물지을 뿐일세

내겐 황금이 없어도 내 마음엔
세상보다 더 큰 꿈이 있다네
지금의 내 몸이 바로 나일 진데
창조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꿈꾸며
스스로 있는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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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2020-03-22 11:42:08
한 박사, 참 오랫만이네. 그 사이 우리가 삶을 정리할 나이에 이르렀네. 내 이메일 주소로 연락주시게. Yearnh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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