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기독교역사와 기독교문화유산
익산기독교역사와 기독교문화유산
  • 한승진(익산 황등중 교사)
  • 승인 2020.03.31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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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진목사(황등중학교 교목)
한승진목사(황등중학교 교목)

I. 들어가는 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신채호 선생의 말을 되새긴다면 오늘의 기독교가 안정감에 만족하거나 게으를 수 없다. 기독교신앙은 민족과 지역과 함께할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참된 신앙을 추구해야한다. 역사와 민족 앞에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교회 안에 개혁해 나가야할 것은 무엇인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할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의미로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어야할 것이다. 이런 일들의 하나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종교문화유적지의 역사를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이 일을 보다 활성화하는 것이 종교문화유적 답사일 것이다. 가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함께 어울리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여정(旅程)을 통해 든든한 정신문화적 토대 위에서 미래를 꿈꾸는 우리 지역이,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지역공동체로 활성화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살고 있는 전북 익산의 기독교문화유산을 살펴보는 일도 뜻깊은 일이라 생각해본다.     

  II. 지역종교문화이해로서 역사 이해

  1. 역사반성과 다짐을 위한 역사인식

이 땅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 존재감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가 짧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역사는 다른 종교에 비해 역사가 짧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를 외래종교(外來宗敎)라느니, 우리역사와 동떨어진 서양식 종교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다. 이런 말들이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맞는 말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비록 기독교역사가 짧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는 한국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과 지역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아파하면서 한국 기독교문화를 꽃피워나가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한국근현대사를 이해해야만 한다.  
기독교가 전래되고 정착되던 시기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외세의 침탈 그리고 새로운 문화가 급격히 유입되면서 혼란을 겪던 시대였다. 급기야 주권을 빼앗겨 나라 잃은 설움으로 일제강점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런 시대에 믿음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지켜나갔는지,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민족과 지역에 뿌리내렸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이다.
역사는 그저 과거에 흘러간 시간이 아니다. 오늘 우리를 끊임없이 비춰주는 거울이요, 내일의 방향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과 같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의 역사를 알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동안 우리는 당장의 먹고 살기에 급급해서 소중한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해 주는 유산(遺産)들을 잃어버렸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어디로 간 줄도 모르게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 것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다. 역사유적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다보니 제대로 보존하는 데 소홀하였다.
 
  2. 우리가 걸어가는 길, 역사

우리는 왜 이제 와서 역사를 말하고 찾으려고 하는가?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과 이른바 ‘4차산업혁명 시대’라고 말하는 첨단과학시대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에도 정신없는 이 시대에, 굳이 아주 오래전 이야기와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전 시대의 산물은 기록물을 끄집어내야하는가? 도대체 역사가 무엇이기에 오늘 우리에게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가? 이런 질문은 오늘 우리사회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이는 일본의 독도점유권 주장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우리의 역사관을 정립하자는 논의가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한국인, 한국사회,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여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사회발전과 민족통일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가와 사회의 흐름이 우리 역사를 강조하는 시기이듯, 우리 지역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찾아내서 우리 지역 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구축하고 이를 우리 지역의 다음을 짊어지고 나갈 다음세대들에게 교육해 나가야함이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지역 기독교 문화역사 이해의 목표는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 우리 지역의 깊은 종교문화정신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지역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데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지역의 종교문화유산의 자료발굴과 자료정리 및 역사관(歷史館) 설치 등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3. 기독교역사유적지 탐방에 임하는 자세  

역사공부라 하면 흔히 무작정 역사적인 사건만을 암기하던 학창 시절의 역사 수업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역사학이라고 하면 고루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역사의 이해는 역사의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부족해서이다. 역사란 과거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 또는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 사회와 국가는 물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다. 우리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을 이해함으로써 통찰력과 비판적 사고력, 판단력을 기를 수 있다.
인간이 살아온 모습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중단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고자 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통찰은 인간의 삶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극복하게 해준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포괄적 이해의 폭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역사학은 오늘을 살피고, 내일을 설계함에 확고한 지침을 얻고자 과거의 제반 문제를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 우리는 거창하게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정리하는 학문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 우리 지역의 역사관(歷史觀)을 정립하고, 이를 오늘 우리를 반성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중요한 시사점(示唆點)을 얻고자함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 지역 교회역사를 둘러싼 한국근현대사를 이해하고, 우리 지역 기독교를 품고 있는 지역 사회를 이해하고, 지역과 함께해온 지역사회 종교문화들의 의미를 통시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종교문화유적의 이해를 갖게 되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 문헌자료의 수집과 유적지 답사 및 조사 등을 통해 왕성한 지적 욕구, 인내력과 성실성을 길러줌으로써 인생의 큰 지침을 얻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계승을 위한 논의와 역사계승 활동을 통해 우리 지역 교회 역사의 심오(深奧)함과 위대(偉大)함을 확인하고 확고한 역사인식을 지닌 우리 지역 교회의 공동체성을 구축함으로써, 역사적 토대 위에 든든히 서 가는 우리 지역의 모습을 구현해나가는 일도 의미 있을 것이다.

III. 익산기독교역사의 이해

  1. 익산기독교역사 개관

  전북 익산시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호남고속도로가 전라도 땅에 들어서는 초입이자, 호남선과 전라선과 군산선이 갈라지는 철길의 분기점을 이루는 교통의 요충지이지만 정작 외지인들이 익산 땅을 밟아 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더욱이 이곳이 수십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 도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불교의 대표적인 상징중 하나인 미륵사지 유적지, 토착종교인 원불교의 총본부,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보석축제와 서동축제로 이름을 알리는 곳인 정도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교회들을 자랑하는 서울,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평양, 순교자들의 거룩한 피가 뿌려진 여수와는 달리 익산시는 몇 가지 기독교유적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익산은 선교사들의 여행로를 따라 전주와 군산으로 들어온 복음이 몇 년을 지체한 뒤에야 전해졌고, 원도 없다. 그러나 익산은 인구대비로 볼 때, 전국 최고(最高)의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는 곳이다. 하다못해 익산시내권에 이름난 기독교학교나 대형 기독병원조차 없다. 그러나 익산은 인구대비로 볼 때 전국 최고(最高)의 기독교 인구를 기록한 도시이다. 더욱이 익산이 원불교 성지임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강세는 놀라운 일이다.
  익산시의 모태(母胎)인 옛 이리시의 태동(胎動)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이곳에 형성되면서 비롯되었다. 철길이 놓이면서 자연스레 교통과 물자교류의 중심지가 된 이곳으로 인근 농촌인구가 유입됐고, 그 중 상당수는 외국문물과 시대흐름에 일찍 눈을 뜬 기독교인들이었다. 1906년 익산시내 최초의 교회인 고현교회(익산시 모현동 소재)가 문을 열기 전, 인근 면지역에는 이미 수년 전부터 함라교회, 남전교회, 서두교회, 고내리교회 등이 활발한 기독교선교를 하고 있었다. 군산과 전주를 거친 기독교가 인구밀도가 높은 농촌지역에서 무르익은 후 한가운데인 익산에서 만개했다. 더욱이 이들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는 교화소(敎化所)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1907년 남전교회가 도남학교를 세운 것을 비롯해 20개가 넘는 학교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힘으로 세워졌다. 오늘날 익산지역 교회 성장에는 이처럼 신문명의 전파지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키워온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익산시의 기독교 역사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기 전의 일이다. 익산군에서는 1901년 오산면의 남전교회와 황등면의 동련교회, 1903년 삼기면의 서두교회와 여산면의 고내리교회, 1904년에 망성면의 무형교회, 1906년에 웅포면의 웅포교회와 대붕암교회, 용안면의 송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교회의 설립연도는 192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정식기록에 의한 것으로, 이들 교회가 그 전부터 자체예배를 보았다는 설이 많다. 차종순,『대장교회 100년사』(대장교회 100년사 발간위원회, 2004), 96쪽에 보면 대장교회는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예배를 회집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전도인을 초청한 교회이다. 대장교회 외에도 여러 교회들이 선교사나 전도인 이전에 현지인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교회를 설립해나간 경우가 많다. 동련교회와 황등교회도 이런 현지인의 주체적인 자각으로 자생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런 자생적인 교회의 대표적인 경우는 소래교회이다. 용산교회가 동련교회에서 1907년 분립되었으며, 황등교회가 1928년 분립되었다. 이리시 권역에서는 1906년에 고현교회가 최초로 설립된 이후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2. 익산지역 3·1운동-지역교회를 중심으로
 
  익산 지역의 만세운동에서는 어떤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계몽을 기치로 내세운다거나, 신사참배에 반대되는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가 10개를 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독교가 강세였던 익산지방의 신앙심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기독교와 3·1운동에 관한 당시 상황을 더듬어보면 상당부분 접근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남전교회
   오산면 남전에서 조선시대 말엽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김내문 집안이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남전교회에 출석하였다. 1917년에는 동학혁명에 참여한 민족주의자 최대진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김내문 가정을 심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의 지도자인 박연세 장로와 김내문, 최대진, 김만순 등과 당시 도남학교 김영인 선생 등이 연대한 구국운동의 모의가 시작되었다. 남전교회에서는 도남학교의 김영인 선생과 최대진 목사가 민족 신교육의 내용이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이집트 바로의 억압과 폭정 앞에 울부짖는 통탄의 소리를 들으시고 해방시키시는 하나님께서 기독교로 선택된 우리조선 민족도 일제의 폭압과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 우리민족을 일본제국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키신다는 설교와 기독교 교육으로 교인들과 도남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3·1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갈 때 오산 김내문의 집에서 아들 김만순, 최대위, 김영인과 함경도 갑산탄광에서 금광사업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하여 만주 등으로 송금 하는 등 구국운동에 열중하던 민족지도자 문용기가 3월 중순경에 김내문 집을 찾아 합세하면서 4월 4일 12시를 기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 시켜 나가기로 합의 되었다.
  4월 4일의 만세운동의 전초전으로 익산 각지에서 발발한 3·1만세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이나 호남선 열차승객이 많이 몰려드는 기차역을 활용하는 운동방법이었다. 이리역에 일본보병 제 4연대 1개 중대가 주둔하면서 전주, 군산, 김제, 정읍 방면으로 왕래하는 승객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 때의 정황은 역 안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4월 4일 거사에 앞서 3월 27일과 29일에는 승객들이 많이 몰려있는 대합실과 승강장 안에 열차가 서있는 플랫폼(platform)과 열차 안쪽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만순, 정진영, 문용기, 박영문, 김병수, 오덕근, 박병렬 등 수십 명의 기독교측 지휘본부는 조를 지어 승객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각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복사기 가리방으로 독립선언서를 수 만장씩 제작하여 놓고 승객들에게 배포하였다.  가리방이란 B5나 A4 용지만한 크기에 가로 세로 촘촘하게 줄이 그어진 철판인데 그 위에 양초를 먹인 기름종이를 대고 글씨를 쓰면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사용을 다하고 난 못 쓰는 볼펜이나 또는 뾰쪽한 철필을 이용하여 글씨를 새기는 방식이다. 선언문의 내용을 확인한 수백 명의 승객들이 기차가 잠시 멈춘 사이에 밖으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여 외쳤고 기차가 떠나버리고 나면 일본 헌병들은 먼 산만 바라보는 꼴이 되었다.
  ◇ 고현교회
  1904년 오원집이 고현리 곽도일의 사랑방에서 오덕근, 김자윤, 고선경, 김경장, 오덕순 등과 기도를 시작하면서 고현교회(古縣敎會)의 태동을 알렸다. 1906년 6월 1일 초가로 된 4칸 예배당을 마련하니 이리시 권역에서는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이 때 오원집은 1900년도부터 옥구군 회현면의 지경교회로 20리를 걸어서 예배 보러 다니던 신자였다. 오덕근은 1917년 12월 1일 장로직을 받은 교회의 평신도지도자로, 1919년 4·4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기독교인이라고 교회당에서 예배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하였다. 오덕은은 감옥에 가서도 우리 민족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였다. 오덕근은 감옥에서 하나님께 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열심히 호소하였다. 오덕근은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출감(出監)과 동시에 전 재산을 민족교육에 바치기로 하고는 백동학교(栢東學校)를 설립하였고, 같은 교회 장로인 김한규와 뜻을 같이하여 계문학교(啓文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때 군산 지방의 3·1운동의 주동자였던 박연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고현교회와 동련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당시는 목회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박연세 목사는 두 교회를 같이 담임하였다. 이 때 박연세는 교회만이 민족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25년 박연세는 오덕근, 김자윤, 김한규 등과 의논하여 고현교회 내에 경신학교(敬信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김자윤 장로를 임명하였다. 1926년에는 오덕근 장로가 교장이 되었다. 오덕근의 아들 오준환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현교회는 초기교회의 울안에 오덕근을 기리는 기념비(記念碑)를 세웠다. 후리교회(현재, 이리제일교회), 만석교회, 송학교회, 북일교회, 신광교회, 성광교회 등이 고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들이다.
  1936년에 젊은 장로 김한규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경신학교는 더욱 발전하였다. 경신학교는 오덕근이 앞에서 이끌어주고 김한규가 뒤에서 밀어 주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경신학교로 학생들이 수없이 몰려오자 이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던 고현교회에서는 교회당을 비롯해서 공간이 될 만한 장소에 학교 교실을 증축하여 교육에 힘썼다.
  김한규는 김용태의 둘째 아들로 전주 동문 밖에서 출생하였다. 김한규는 부농(富農)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한학을 연마할 수 있었다. 김한규는 신학문에 뜻을 품고 이리로 이사한 후 1920년 익산군 북일면 신리에 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가난한 농촌의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개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김한규는 오덕근 장로의 전도를 받아 고현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며, 고현교회의 장로로 이리 기독교계의 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김한규는 재산이 많았지만 재산관리는 부인에게 맡기고 교회와 학교 일에만 열중하였다. 김한규는 신리에 있는 계문학교와 고현교회에 있는 경신학교를 오가면서 자라나는 민족의 새싹들을 키우기 위해서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경신학교에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미 경신학교는 철저한 한글교육을 통해서 그 어느 학교보다 강한 민족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결국 폐교를 하고 학생들을 모두 계문보통학교로 전학을 시키게 되었다. 학교를 빼앗겨 버린 고현교회는 주일학교를 통해서 한글운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김한규는 고현교회의 장로로서 신앙을 꿋꿋이 지켜 나갔다. 김한규는 1947년 이원용과 함께 중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문중학교(현 이리중학교와 이리 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1년에는 몇몇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북창교회 내에 대성중학교를 설립하고 역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역시 같은 해 이리농림학교를 모체(母體)로 해서 이리농과대학 설립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전북지방 최초로 농과대학을 설립하는데 공헌하였다.  이 학교가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전북대 농과대학은 전주가 아니라 이리에 있었다. 지금은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 농과대학이 있다. 다음의 내용은 전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 홈페이지 연혁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7.10.15 도립 이리 농과대학 설립인가” “1948.04.05 도립 이리 농과대학 개교식 겸 입학식” “1951.10.06 도립 이리 농과대학을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농학과, 임학과, 수의학과)되었다.” 김한규는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서두교회
  서두교회는 1898년 정정보라는 전도인이 삼기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서두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더욱이 삼기는 백제 불교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서두교회 교인들은 이리 지방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3·1 운동이 일어 날 때 참여하였고, 이러한 일들이 신사참배 반대 저항 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박병렬 장로는 신사 참배를 반대 하다가 옥고를 치른 후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익산군 삼기면 서두리에 초가 3칸으로 예배처소를 만들고 조선야소교 공의회에서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 초대 당회장으로 마로덕 선교사가 사역한다.
  마로덕(Luther O. McCutchen) 선교사는 1901년 독신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목포에 도착하였다. 마로덕은 1902년 전주 선교부로 옮겨, 자신의 선교 구역을 할애 받고 익산지방 일부를 비롯해서 완주지방, 무주지방, 진안지방 그리고 현재는 충청남도가 되었지만 금산 지방을 조사(助事;외국 선교사를 돕는 사람들로 우리나라 지역과 문화를 잘 모르는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한국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조사와 함께 전도인과 성경을 판매하러 다니면서 전도하던 권서인(勸書人)의 활동도 있었다)들과 함께 순회하면서 전도에 임하게 되었다. 마로덕은 독신(獨身)으로 선교에 한계를 느끼고 1908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하운셀(Miss J. Hounshell)과 결혼하였다.
  박병렬은 1877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삼기면 간촌리에서 한의사 박영호와 방 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박병렬은 도마리교회, 방주간교회, 와리교회, 부송교회 등의 매서인(賣書人;성경을 팔고 다니면서 전도하던 사람)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박병렬은 익산 지역 3·1 운동에 참여하고, 또한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로 제1계명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이 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삼기 주재소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어도 박병렬은 흐트러짐이 없이 신사참배는 절대적으로 기독교에 위배된다면서 버텼고, 삼기 주재소에서는 이리경찰서로 이첩해 버렸다. 마로덕은 이리경찰서로 찾아가서 박병렬을 면회하고 위로하였다. 당시 마로덕을 비롯해서 미국 선교사들이 자주 드나들며 박병렬을 면회하며 구명하였고, 이리경찰서에도 박병렬이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그만큼 일본제국주의 생명이 단축된다.”면서 고함을 지르자, 이리경찰서 고등계 형사들도 박병렬을 유치장에 놔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석방해 버렸다. 박병렬이 석방되어 돌아왔지만 박병렬의 온 몸에 고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때 박병렬은 고문자국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근거라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 하였다고 한다. 박병렬은 1935년 5월 7일 서두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박병렬은 1940년 9월 2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박병렬의 순교비가 엘리사기도원에 세워졌고, 후손들과 교인들이 힘을 모아 1986년 7월 17일 순교비를 고쳐 세웠다.

  ◇ 동련교회
  1901년 군산시 서수면 신기리 장평마을의 지성옥의 뒷방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동련교회는 1902년 황등면 동련리로 옮겨온다. 전남 승주 태생의 백낙규는 원래 동학군의 소접주 출신으로 개혁과 개화에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백낙규가 1904년 세례를 받음으로 이 교회에서는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동련교회(東蓮敎會)가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상세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황등에서 연일이어지던 만세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이 동련교회 교인들이었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자료와 당시 처한 민족적 상황에 비추어 보면 서두교회의 박병열, 남전교회의 최대진, 고현교회의 오덕근과 더불어 동련교회의 백낙규가 선봉에 섰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련교회와 황등지역에서 백낙규의 영향력을 감안해볼 때, 동련교회 교인들과 계동학교 학생들도 상당수 참여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련교회의 계동학교의 돌이 일제가 만든 황등신사의 일본국기게양대 지주석(砥柱石)으로 사용한 예를 보더라도 상당한 견제와 억압 속에서 많은 애국심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동련교회와 고현교회는 같은 선교사인 하위렴(Harrison, William Butler)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적 성향은 물론 종교적 성향도 상당부분 비슷하였으리라 여겨진다.
 
  ◇ 제석교회
  1908년 제석교회(설립 당시는 곱패집교회, 대붕암리교회라고 하였다)가 세워지면서 하위렴 선교사가 대붕암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09년 4월 30일 민립 ‘부용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같은 기독교학교인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들이 1919년 3·1운동 당시 군산, 강경, 함라, 웅포 등 3·1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거사 일정이 탄로가 나면서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가 경찰서로 연행되자 거사가 어려운 형편에 이르게 된다. 이 때 대붕암리교회 교인이면서 부용학교를 졸업한 초대 장로 강두희의 두 아들 강인성과 강관성이 군산 영명학교 학생이었다. 두 학생은 마을 주민 100여명과 더불어 기독교학생들을 규합하여 3월 5일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박연세가 감금되어 있는 군산경찰서로 군중들을 몰고 석방할 것을 촉구하다 체포되었다. 이들은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1992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IV. 익산기독교역사의 깊이

1. 익산교회역사의 산실, 두동교회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편백마을에는 ㄱ자 형태로 지은 한옥 교회가 있다. 두동교회(강동훈 목사)다.  두동교회(杜洞敎會)는 1923년 선교사 해리슨(W.B.Harrison;하위렴)과 김정복 조사, 안신애 전도부인의 전도로 처음 설립되었으나 1929년 무렵 지금의 ‘ㄱ자자형 교회를 새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전라북도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의견서에 따르면 “두동교회는 ‘ㄱ자형’교회로서 우리나라의 토착성과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일종의 현지자립형 선교라 할 수 있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하여 기독교와 한국의 전통을 잘 살렸다”고 그 특징을 밝히고 있다. 특히 남녀유별적인 유교전통이 막 무너져가는 1920년대에 오히려 ‘ㄱ자에배당’을 통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전통을 보여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고 했던 독창성이 돋보인다. 1920년대에는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속에 따라 내부를 구분하던 기존의 휘장(揮帳)들이 제거되는 일반적 경향에도 두동교회가 1929년에 ‘ㄱ’자형교회를 건립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20년대는 일본이 호남 지역 착취를 본격화할 때다. 땅과 곡식을 수탈하기 위해 전국에 수리조합을 만들었다. 전주, 군산에도 수리조합이 생겨 조선인 땅을 강탈했다. 수리조합은 조선인 앞잡이를 내세웠다. “땅을 팔면 목돈도 생기고 농사도 계속 지을 수 있다. 나오는 곡식은 소작료로 일부만 떼고 나머지는 다 당신들 것이다.” 감언이설에 속은 농민들이 대거 땅을 팔았다. 일본인 농장주가 소작료로 장난치기 전까진 이들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을 예상하지 못했다. 호남에서 난 곡식은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넘어갔다.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던 농민들 사이에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됐다. 해리슨 선교사가 전도해 기독교인이 된 박재신이 자기 땅에 예배당을 마련한 게 두동교회 시작이다. ㄱ자형 예배당은 1929년 지어졌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교회를 만들 때 하나님이 도왔다는 이야기가 돈다. 안면도 소나무가 마을 앞 포구까지 흘러온 일 때문이다. 안면도 소나무는 주로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한다. 목재를 실은 배가 풍랑에 뒤집혀, 소나무가 조류를 타고 마을까지 왔을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했다. 교인들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목재들은 서까래로 쓰였다. 10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나무 기둥은 균열 없이 튼튼히 서 있다.
당시 교회는 교육기관 역할도 했다. 조선인 선생이 일본 경찰 몰래 조선 노래, 말을 가르쳤다. 들판 사이로 순사가 칼을 차고 나타나면 선생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그러면 재빨리 책상에 있는 국어(일본어) 책을 꺼내 “이찌, 니, 산, 시, 고!”를 외쳤다. 장마루 바닥 위를 지나갈 때 ‘삐그덕’ 소리가 난다. 바닥 한쪽 구석에는 마루 밑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달렸다. 이에 대해 여러 신화가 알려져 있으나 이를 두동교회의 산 증인인 박정호 원로장로에게 들으니 이는 사실이 아닌 신화로 꾸며진 이야기라고 한다. “마루에 들어갈 수 있게 한 공간은 일제 순사가 올 때 민족의식 교육 등으로 숨던 곳이라고 알려진 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연탄 같은 것을 넣어둔 것이다.”    
1929년, 교인들은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서 같이 예배해야 하니 건물을 ㄱ자 형태로 지었다. 출입구도 두개다. ㄱ자 꼭짓점에 강대상이 있어 설교자는 양쪽을 보며 말씀을 전한다.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두동교회는 ‘ㄱ자형’ 평면의 한옥(韓屋)교회로 함석지붕에 홑처마 우진각 형태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전라북도문화재 제 136호)와 함께 유일한 ‘ㄱ자형’교회 건물이다. 남녀회중석(會衆席)을 직각으로 배치해서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으며, 두 축이 만나는 중심에 강단을 시설해서 ‘ㄱ자가 90도 회전한 평면 형태를 이루도록 하였다. 북서쪽 모서리의 강단은 한 칸 규모이며, 남녀회중석은 각각 3칸 크기로서 같은 규모이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이루어졌는데 전면(全面)에서 볼 때 ‘ㄱ자형’ 평면 중 남북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남자석이고 동서축은 여자석이다. 각각의 출입문이 있어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속에 따라 동선(動線)을 분리하였고, 내부바닥은 장마루가 깔려 있으며, 강단은 회중석과 380mm의 단차를 두고 전면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하고 그 중앙에 강대상을 놓았다. 강대상 전면에는 내진기둥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다른 기둥은 모두 방주를 사용한 반면 이 기둥만은 8각주를 사용하여 차별을 두었다.
두동교회의 건축양식은 기독교장신이라기보다 당시 한국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지역종교가 지역과 시대와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아쉬움은 기독교적인 정신이 담긴 유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박정호 원로장로는 자신의 기억에 남녀회중석을 막은 휘장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자신이 5살부터 출석하였는데 기억이 없음은 휘장을 하긴 했다가 오래지 않아 휘장을 뜯은 것 같다고 한다. 남녀칠세부동석은 기독교정신은 아니다. 기독교정신은 남녀평등의 새로운 문화였다. 기독교에서는 전도부인들의 활동과 구역운동 등에서 여성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아직도 개신교 내에서 많은 교단들이 여성의 목사안수를 불허하고, 장로 등의 직제에도 불허하고 있을 정도로 개신교 안에서도 전근대적인 유교의 잔재(殘在)가 남아 있다.
두동교회의 오랜 역사를 알 수 있는 교회의 문서자료도 찾아보기 어렵고, 교회의 종(鐘)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2007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처럼 두동교회에 가보면 더 많은 역사유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쉬움은 두동교회애 가보면 무료카페가 있고, 가까운 거리에 무인카페를 접할 수 있게 한 것이 인상적이다.    

2. 익산교회역사의 깊이, 황등교회 사랑의 종

황등교회에 가보면 하늘 향해 우뚝 솟은 종각에 아담한 크기로 매달려 있는 종이 있다. 이 종은 1884년 제작된 종으로 2016년 9월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에서 한국교회역사유적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만주 심양 서탑교회 계택선 초대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계원식 장로는 황등교회의 설립자대표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기성병원을 개원했다. 계원식 장로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한 일로 일본 고등계 형사의 추적을 피해 1921년 군산으로 내려와 다시 기성의원을 개원하고 병원을 기도처로 삼아 예배드리던 중, 교인이 많아지자 1922년 황등교회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황등교회 종은 플로리다주 리스퍽제일교회에서 교회 종을 교체하며 기존 교회 종을 기증한 것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교회종 중에 제작연도가 제일 앞서는 것이다. 이 종에는 1884년이라는 제작년도가 선명하게 찍혀 있어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 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종의 표면에 “N.Y 1884”라고 양각되어 있다. 이 종 바로 옆에는 이 종에 대한 설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이 ‘사랑의 종’은 한국선교가 시작되던 해인 1884년에 제작한 종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안고 있는 종이며 한국에서는 제일 오래된 종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이 종의 설명중, 이 종이 한국에 선교가 시작되던 해라는 표현은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 종을 주선한 계일승의 신학박사학위논문과 이 종의 설명판의 글을 쓴 김수진은 1884년이 아닌 그 이전에 기독교선교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종이 제작되기 이전 귀츨라프, 토마스, 로스와 멕킨타이어,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상태였다. 이 문장은 지나치게 이 종의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1884년은 알렌이 우리나라에 입국한 해이다. 계일승은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신학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알렌이 최초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음을 밝혔다.
이 종이 황등교회에 오게 된 것은 장로회신학대학교 9대 학장으로 우리나라 신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계일승 목사에 의해서다. 이 종은 플로리다주 마을에 있는 교회에 울리던 종을 당시 미국유학 중이며 이 교회를 담임목사를 역임한 계일승 목사의 요청으로 황등교회에 기증되기로 해서 보내지던 중,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머물다가 1951년 6월 10일 황등교회의 열혈청년들에 의해 전해지고 세워졌다. 황등교회 종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자부심과 신앙적 뿌리가 되었으며 “사랑의 종”으로 명명(命名)하고 순교애국정신과 교회연합, 교회 사랑과 화목정신의 매개로 삼아 교회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현재도 교회 종으로 사용되어 그 존재가 교인들의 생활과 지역사회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V. 마무리하는 글

  익산지역 기독교역사와 유적은 진공(眞空)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당대의 시대정신과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고, 기독교와 한국문화와 지역문화가 얽히고설키는 역동적인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를 주의 깊게 이해해야만 익산지역의 기독교문화가 담고 있는 깊이를 알 수 있다. 이런 이해는 시간이 걸리고 지루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다. 보다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종교문화해설을 하려면 인터넷에 떠도는 정도의 부정확한 지식정도로는 안 된다. 만일 이런 단편적인 지식으로 종교문화해설을 한다면 자칫 불특정다수의 예측불허의 질문에 얼굴이 벌게지는 당혹감을 갖게 될 수 있다. 더욱이 잘못된 해설은 우리 지역의 종교문화를 천박하게 이해시키는 잘못을 초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종교학을 전공하거나 한국역사학을 전공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 더 주의 깊게 자료를 찾아보고 직접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현장역사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는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요즘은 관련 자료도 많고, 이를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다. 바라기는 눈에 보이는 역사유적만 볼 것이 아니라 그에 담긴 그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와 흔적들을 상상해보고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통해 되새겨보면 좋겠다. 만일 내가 그 때 여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만으로도 종교문화유적지탐방을 재미, 흥미,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종교문화유적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이를 담아내고 품고 함께한 토대를 이해해야한다. 이를 위해 시대상황과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이들 중에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역이요, 실체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문화유적만이 아니라 인물을 다룬 책이나 자료와 마을의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해서 해설해나간다면 해설의 매력이 더해질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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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한국기독교사연구』(기독교교문사, 1971).
변창욱, “한국교회 자립 선교전통과 비자립적 선교 형태”,《선교와 신학》(2011, 제27집).
유성종․이소윤,『믿음의 땅 순례의 길』(도서출판 두란노, 2016).
연규홍,『예수꾼의 뚝심-동련교회 90년사』(동련교회역사편찬위원회, 1992).
정재영, “익산시 복음화 어제와 오늘(1)익산시 복음화 어제와 오늘”,《기독신문》(200년 12월 4일)
차종순,『대장교회 100년사』(대장교회 100년사 발간위원회, 2004).
한승진,『함께 읽는 기독교윤리』(한국학술정보, 2012).  
______,『사랑의 종, 그 언저리에서 길을 묻다』(박문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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