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합격하면 카톡 프로필 바꾸는 엄마들
대학에 합격하면 카톡 프로필 바꾸는 엄마들
  • 한승진목사(황등중 교목)
  • 승인 2020.06.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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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진목사(황등중 교목)
한승진목사(황등중 교목)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교육을 소재로 우리 사회의 욕망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스카이 캐슬이라는 고급 주택단지 안에 사는 교수·의사 부모들이 자식들을 서울대 의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거액의 사교육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스카이 캐슬’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자주 회자된 단어 중 하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방영 초기 단순히 흥미로운 드라마로 이야기되던 스카이 캐슬은 이후 한국의 교육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간주되더니, 이제는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구조와 구성원들의 욕망을 해석해내는 인문학·사회학적 텍스트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스카이 캐슬 신드롬’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이 드라마에서 ‘교육스릴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새로운 장르처럼 보였습니다. 교육을 소재로 한 가족 드라마는 많이 나왔지만, 이 드라마는 단지 입시에만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출세 경쟁, 고부 갈등, 조직 내 권력 다툼,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 코미디 등 여러 요소들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딱 집어서 절묘하게 표현해냈습니다.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들을 직설적으로, 때론 독설을 통해 대변해주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습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평소 위화감이나 동경의 대상이었던 의사, 교수와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볼 수 있었습니다.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싶은 욕구를 드라마라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줍니다. ‘그들도 문제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면서 위로감이나 동질감을 느낍니다. 태생부터 금수저일 것 같은 그들이 알고 보니, 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선지집 딸이었습니다. 세탁소집 아들이었고, 날라리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몰입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 이거 내 문제인 것 같은데?’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하고, 이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입시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뒷바라지 하면서 막 달려갑니다. 아이들 몰아세우기도 하고, 아이를 칭찬도 해주고 어르기도 하고, 또 나름 속을 끓이며 고민이 많습니다. 공부가 잘 안 되는 미술도 시키고 악기도 해보게 하고, 정 안되면 해외 유학도 고려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도 나 몰라라 하는 모습에 많은 시청자가 공감한 것은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 조금씩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진로 코디는 아이들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영혼을 조작하고 최면을 걸면서 목적을 달성합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아이를 망칩니다. 샬롯 브론테의 소설『제인 에어』에서 평온해 보이는 가정에 미친 아내 버사가 숨어 있었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깊숙한 곳에서 파괴적인 집착의 악령이 음산하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마왕>이 떠오릅니다. 마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아픈 아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갑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꾸 헛소리를 합니다. “마왕이 보여요. 마왕의 소리가 들려요.” 그런데 아빠는 아이에게 “그건 마왕이 아니다” “잠자코 있어라”라고 말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갑니다. 도착했을 때 아들은 죽어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 가정에서 많이 관찰되는 모습입니다. 아이는 치열한 경쟁, 부모의 과도한 기대 등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문제집 풀기 싫고, 학원 다니기 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참아봐. 나중에 얘기하자” 라고. 그런데 도착했을 때 아이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 현실 속에서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지만 어머니가 자살하는 경우나 성적 스트레스로 자해를 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사례가 실제로 있습니다. 자식을 자신의 욕망 대리자로 삼거나 아이의 절박한 외침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흔히 강남, 대치동을 매도하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틱 장애를 겪거나 불안증, 우울증이 심할 때 옵니다. 그런 증상마저 없으면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전혀 모릅니다. 부모 말 잘 듣고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5∼6학년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중2 정도가 되면 부모와 충돌이 심해집니다. 그럴 때 부모가 “너 내 말 안 들어?” 하면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부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이가 어떻게 할까요? 몸싸움을 벌이거나 심하면 칼을 들고 자살하겠다고 부모를 위협합니다. 가출을 하거나 성적으로 일탈하기도 합니다. 최근엔 자해도 많아졌습니다. 부모랑 육탄전을 벌이는 아이들은 바깥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라면, 자해와 자살은 그 분노가 자기를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도와주세요.”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호를 놓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캐슬이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캐슬은 영어로 ‘성’입니다.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봉건 시대의 잔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캐슬과 함께 아파트 이름에 많이 쓰이는 '팰리스(왕궁)'도 마찬가지입니다. 캐슬, 팰리스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의 배타성, 폐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 안에서 선민의식을 갖고 자신을 남들과 구별 짓습니다. 신분제도는 무너졌는데, 신분 의식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밑에 있는 신분이 위에 있는 신분에게 도전하고 사회 시스템을 혁파하면서 신분 의식도 함께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동학운동이 그것을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곧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습니다. 해방 뒤 고도성장기에는 경제가 팽창하고 삶의 기회가 확장했기 때문에 남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살림이 피고 자신의 부모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저성장의 수축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모멸감을 주는 갑질, 감정노동이 문제가 됩니다. 성장의 전망이 안보이고 자기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으니 사람들이 자꾸 옆을 보는 것입니다. 사소한 구별 짓기에 집착하고, 내가 너보다 위에 있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캐슬은 모래 위의 성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고하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노부부는 평생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었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 부동산도 현금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 일도 많아 사람을 무서워합니다. 누가 집 앞에 와서 독을 탈까봐 우유 배달도 못시켜 먹습니다. 주변을 항상 의심합니다.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했지만, 결국 불안하고 외로워진 것입니다. 그만큼 돈, 명예, 권력 등으로 쌓은 성은 허망하고 외롭고 불안합니다. ‘스카이 캐슬’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일까요? 드라마에 나오는 주민들은 서로 친한 것 같지만 그들은 언제든 배신을 하고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끊임없는 뒷담화가 있고, 협잡과 권모술수, 아첨, 폭로, 누설이 이어집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인정투쟁’입니다. 한 명 한 명 들여다보면 ‘나 무시하지 마’ ‘네가 뭔데?’ 같은 말들을 끝없이 외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한 마디가 “우리 애는 레벨이 다르다”입니다. 이미 피리미드 상층부에 오른 사람들인데도, 왜 그렇게 인정 투쟁을 벌이는 것일까요? 그것만 잘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대물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감이 있다면 껍데기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나만 압니다. 올라간 뒤의 삶도 욕망의 연속입니다. 병원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복지부 장관이 되려고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줄을 대려 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고 필요 없는 수술을 하고 실적을 올리려고 합니다. 실제 현실 속 의사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파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범죄에 연루되기도 합니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진짜 사랑하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이른바 ‘상류층’만 그럴까요?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 그런 성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속물근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멋진 사진을 올리고 자랑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도 자기 머릿속에 있는 욕망과 이미지를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엄마들 프로필 사진이 바뀌는데, 아이가 합격한 학교 사진이나 로고를 올립니다. 일종의 ‘온라인 캐슬’을 쌓는 것입니다.
  사회 드라마의 또 하나의 주요 소재는 서울대 의대입니다. 서울대 의대에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걸까요? 의사는 3D업종에 가깝습니다. 잠 못 자고 고생하면서 수련까지 마치려면 10년이 걸립니다. 피 고름을 묻히면서 수술해야 하고, 부검도 해야 합니다. 의료 사고도 당하고, 엄청난 책임감에 시달립니다. “몇 십억 들여서 서울의대 갈 수 있다면 가겠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냥 그 돈으로 건물 사서 서울의대 나온 의사들한테 임대하고 월세 받을래요.” 행복을 위해서라면 드라마에서 나온 대로 4살부터 15년 동안 놀지도 못하게 하면서 의사 시킬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이 잘 키웠어’ ‘성공시켰어’ 하는 부모의 만족감과 욕심을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를 설정한 것은 입시상품 중에 최고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손익을 따져보면 답이 안 나오는데도 매달립니다. 옛날에 양반들이 허세에 집착한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실리보다 명분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이 최고라는 맹목적 믿음이 거기에 깔려 있습니다. 서울대 의대는 그런 우월감을 담보하는 일종의 ‘상징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상징자본을 그렇게 중시하는 이유는 뭘까요? 남은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좋은 삶을 구성하는 의미의 자원이 빈곤합니다. 자기 나름의 삶을 창조하고 누리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욕망에 끌려 다니고, 인정 투쟁에 매달립니다. 서울대 의대만 합격하면 끝날까요?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일류대’ 보낸 부모들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사윗감, 며느릿감으로 서로 경쟁하고 과시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일류대 의대생이 엄마의 소원대로 의대에 입학해서 같은 대학 경영학과 다니는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의대보다 레벨이 낮은 학과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결혼한 다음에는 무엇으로 경쟁할까요? 다시 자녀들의 성적과 입시입니다. 그러다 늙으면 손주들을 닦달합니다. 비좁은 굴레에서 끝없이 맴돕니다. 성은 교도소가 됩니다.

무의미한 경쟁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기 삶의 뿌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실패나 고통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방어하고 버티다가 갑자기 딱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 빡치게 하는”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지점들을 보면, “그러니까 네 딸이 그렇게 된 거야”라고 할 때 무너집니다. 아들이 사표 낸다고 할 때 무너집니다. 자녀가 교도소 간 뒤 면회 가서 흔들립니다. 이혼 당할 때 무너집니다. 가족의 극심한 갈등에 결정적으로 무너집니다. 누구나 무너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결핍이나 트라우마 같은 무너짐이 있습니다.  
무너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궤도 수정을 합니다. 크게 깨우치고 허상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끝까지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믿었던 세계가 무너질 때 그냥 붕괴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삶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겸손하게 되고 깊어지고 발전합니다. 그게 진짜 ‘레벨 업’입니다. 이 드라마는 치유 효과 요소가 많았습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나 아픔, 트라우마가 있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너무 아프고 힘드니까 그 부분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공들을 따라가면 비밀과 아픔이 공개됩니다. 출신에 대한 열등감과 거짓말, 가짜 하버드생, 출생의 비밀, 살인 범죄 등에 마음을 졸이던 시청자들이 진실이 밝혀지면서 안도감을 느낍니다. 진실에 직면하면서 도리어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의 그림자를 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된다는 진실도 드라마를 보며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친구가 비밀을 아는 적으로 등장하지만 다시 친구로 돌아올 수 있고, 나를 떠받들던 사람이 나를 경멸하고 공격하고 머리채까지 잡지만 다시 친해질 수도 있습니다. 군식구라고 귀찮아했던 아이가 내 딸이라는 상황 설정도 있습니다. 결국 세상에는 완전한 타인과 완전한 적은 없을 수 있습니다. 다 돌고 돌아 내 식구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 형제라는 생각으로 우리 의식이 넓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치유적인 집단 무의식이고 영성입니다. 꼭 무엇이 돼야 내 딸인 것이 아니고, ‘그냥’ 내 아들이고 딸이면 된다는 것,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도 역시 치유적입니다.
  결핍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이해할 때 중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핍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결핍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창피함 때문에 도망가고 거짓말을 하고, 결핍을 해소해보려고 더 탐욕스럽게 욕심을 부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가지도, 회피하지도 말고 그냥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결핍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결핍을 껴안고 품을 수 있고, 결국에는 신기하게도 결핍감이 사라집니다.

드라마에서 결핍을 직시하고 껴안는 캐릭터는 ‘노승혜’였습니다. 딸이 하버드대에 입학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한 사실을 알고 무너졌지만, 딸이랑 함께 옷도 사고 사이가 더 좋아졌습니다. 중요한 전환입니다. 딸을 용서하면서 자기도 용서한 것입니다. 서로가 용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다양한 잠재력이 펼쳐지는 그런 장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어마어마한 피라미드만 쌓지 말고 말입니다. 차 교수는 “내 딸 아니야. 내 눈 앞에서 치워”라고 말하지만, 노승혜는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있었고 내가 소홀한 건 아닐까”라며 딸을 이해해보려 합니다. 결핍을 받아들일 만한 힘이 없을 때는 남을 비난하고 등을 돌리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결핍, 모자람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새로운 해결을 시도합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서울대 의대 하나를 놓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나눕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놓치는 것이 많아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것을 ‘초점의 오류’(인생의 어느 한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라고 합니다. 우리 삶 속에는 여러 가지 뇌관들이 잠복해있습니다. 입시만 성공하면 된다고요? 착각입니다.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살아갈 힘이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학력보다 더 중요한 자산이나 역량이 많습니다. 특히 지금은 수축사회입니다. 고도성장기와 다른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그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삶의 방식도 전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변화된 사회에서 개인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잘난 체 안 해도 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서로의 학력이 궁금하지 않고, 자녀의 성적을 비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승패나 우열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뭔가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가족을 넘어선 세대 간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사회적 양육’에 동참해야 합니다. 자기 아이만 보고 있으면 계속 비교하게 됩니다. 집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구박받는 아이가 동네 축제를 벌이면서 다른 부모에게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상의 반경을 넓혀야 합니다. 드라마 주제가인 ‘위 올 라이’의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극중 이수임도 정의의 사자인 것처럼 그려졌지만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못 받았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결핍을 부끄러워하는 친구를 이해하지 못한다든가, “너는 나를 못 이겨”라며 여전히 이기고 지는 패러다임 속에 있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속물적인 면도, 정의감도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빛과 어두움을 응시하면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해야합니다. 아이들이 정말 똑똑한 아이들인데, 많은 부모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아이보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자기 것만 잘 챙기는 아이를 바랍니다. 언니에 밀려 부모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그런 아웃사이더여서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봅니다.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아빠와 엄마의 운명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배짱으로 자기의 운명도 잘 헤쳐 나갈 것입니다. 이제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회복탄력성’과 ‘함께 잘 사는 것’,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모두 삶에서 좌절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 고통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웃기도 하면서 아이들이 한층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고 생존 욕구를 가진 존재입니다. 남보다 더 잘나고 싶고 더 갖고 싶은 것은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하지만 그것에만 몰두하면 안 됩니다. 내 욕구와 욕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계속 줄타기를 하면서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계속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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