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사랑합니다
부모님, 사랑합니다
  • 강승찬(고려대학교 경제정책학 전공 2학년/황등교회 청년부)
  • 승인 2020.06.17 20: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명나무 주관, 제5회 기성 계원식 기념 화해문예제전 익산시장상 수상작
강승찬(고려대학교 경제정책학 전공 2학년/황등교회 청년부)
강승찬(고려대학교 경제정책학 전공 2학년/황등교회 청년부)

나는 23살 대한민국 남성이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전 병장만기전역을 했다. 누군가에게 23살이라는 나이는, 많을 수도 있고, 적은 나이일 수 도 있다. 뭐 나이는 둘째 치고, 이번 주제에 대해 고민하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고,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불평’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특히 내 대학진학, 군복무, 학업 스트레스 등 다양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불평’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불평’은 항상 내 마음속에서 불같이 일어났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이 ‘불평’이라고 하는 불이 날 때 마다, 불똥이 튀었던 곳은 어디 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진학을 고민할 때, 가고 싶은 학교, 학과와 내 성적의 차이가 클 때 누구에게 화풀이를 했을까? 그리고 학업 스트레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때, 누가 내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을까? 지금 뒤돌아 생각하니 항상 내 부모님이였다.
  사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비교적 내신 성적을 따기 쉬운 시골에 있는 고교진학을 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서 근무 중이던 아버지는 반대를 하셨고,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크게 반대하셨다.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던 16살의 강승찬은 부모님의 뜻대로 시내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물론 시내의 인문계 고등학교가 특목고라고 하는 몇몇 학교처럼 엘리트들이 모이는 집단은 아니다. 하지만 수능1등급이 내신 1등급을 할 정도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지 않으면, 성적이 나오지 않는 학교였다.

나는 고교진학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때 학업문제에 있을 때마다,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거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마다 말이다. 사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내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100번 맞지만, 그때 고교시절 강승찬은 스스로 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불똥’은 항상 부모님을 향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시내의 학교에 진학해서 좋았던 점도 많이 있었다. 서울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대회가 있을 때, 시내교육청팀을 대표해서 출전하기도 하였고,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는 우수한 학우들과 경쟁하면서, 다양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서울대학교 경제캠프에서 상을 타기도 하였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HSBC에서 주체하는 고교모의 창업캠프, 3학년  때는 전국통일토론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하였다. 뒤돌아 생각하니 부모님은 이러한 점들 때문에 나를 시내의 학교에 진학시킨 것 같다. 다양한 성장을 한 덕분일까? 그래도 학생부 종합전형이라는 입학 전형을 통해, 내 점수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내가 시외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다면, 더 좋은 학교에 갔을 거라며 부모님을 탓하고, 가정에서 화를 냈었다. 그렇게 진학한 학교는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이다. 인터넷에서는 일명 ‘조려대’라고 놀리기도 하는 그런 학교이다. 그래도 나는 이 학교가 나에게는 또 다른 기회라 생각했고, 그래서 이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때도 부모님이 원하는 학교와 내가 진학하고 싶은 학교는 달랐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 내가 다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비슷한 수준의 학교와 비교했을 때, 등록금이 많이 비싸고 부가적으로 들어가는 금전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짝퉁’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부모님은 내가 그 학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사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는 학교의 면접을 간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이건 우리 부모님도, 주변 친구들도 모르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진학 때처럼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당연히 부모님이 원하시는 학교의 결과는 ‘불합격’이였다. 사실 처음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봤을 때, 부모님의 반응이 무서웠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면접을 가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말했을 때 반응은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부모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학교가 나를 놓친 거라면서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면접을 가지 않은 것이 너무 죄송스러웠다. 그때 사실대로 왜 말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였다.

나름 시내의 우수한 학교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서 그런가, 예상보다 대학 성적이 굉장히 잘 나왔다. 다양한 발표대회에 나가서 실력이 좋아서 그런가, 항상 발표수업에서는 1~2등을 했었다. 그리고 경제관련 활동 덕분에 전공과목은 남들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재미있었다. 2학년 1학기까지 열다섯 가지 과목중 두 과목을 제외하고 전부 A+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공이해도 때문인가, HSBC 모의창업 캠프에서 지방대 최초의 대학생 멘토가 되었고, 한국청소년학술대회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Facilitator’ 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높은 성적과 대외활동 덕분에, 고교시절 정말 가고 싶었던,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의 자율전공학부 ‘공공거버넌스와 리더쉽전공 융합전공에 합격하고, 서울캠퍼스로 진학할 수 있었다.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보통 학과에서 상위 3~5%안에 들어야만, 서울캠퍼스로 진학할 수 있다. 나는 이때 꿈처럼 보이던, 서울캠퍼스에 합격하면서 부모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누구보다 기뻐해줬고, 나를 믿었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의 강승찬은 그때의 부모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다. 굳이 단적인 예로. 비교적 점수를 얻기 쉬운 학교에 진학한 친구와 비교하자면, 예상된 결과처럼 그 친구들은 서울 소재의 학교에 합격을 했다. 하지만, 높은 학점을 받지 못했고, 적응하는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대학 진학 후, 부모님이 왜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학교에 진학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점수를 얻기 쉬운 학교를 간 친구들은 원하는 학과에 진학을 못한 이유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은 학과에 진학한 이유를 들여다 보면, 비교적 점수를 얻기 쉬운 학교에 비해 시내의 학교들이 진로, 진학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서, 자신의 진로를 설계하는 과정과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학교에 진학한 것은, 부모님의 진로, 진학교육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이 내린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면, 진로탐구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고교시절 ‘불똥’을 항상 부모님에게 튀었던 것 같다. 내가 당장 눈앞에 있는 결과를 봤다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한 걸음 아니, 열 걸음 이상을 본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관찰하고 성향을 파악하고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좋은 결과를 얻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 병사로 입대하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55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내가 많이 걱정 되었던 것 같다. 훈련소에서 어머니와 통화를 할 때, 어머니는 울었고, 하루에 한번 씩 인터넷 편지로 성경구절과 사회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 그래서 집을 떠나 온, 낯선 공간이었지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수료식 때 부모님이 나를 보러 오셨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났었다. 그때 연병장 끝에서 나한테 올 때 까지 20초정도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그 20초 동안 주마등처럼, 내 과거가 떠올랐다. 고교시절 부모님에게 학업스트레스 때문에 화를 냈던 것들이 말이다. 그때 일과, 걱정해주던 부모님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다. 나름 장남이라 그랬던가, 눈물 나는 것을 부모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많이 일부러 많이 참았다. 그리고 588일 동안 부모님에게 하루에 한번 씩 안심할 수 있는 안부전화를 드렸다.

군 생활 중에는 부모님에게 힘든 일이 있어도, 일부러 감추려고 노력했다. 선임에게 혼이 날 때,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을 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항상 나는 ‘요즘 군대 편해 엄마’라고 말했다.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환경에서 부모님을 안심 시켜 드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며 2020년 4월 19일 부대 미복귀 휴가를 출발하고, 5월3일에 무사히 현지 만기전역을 했다.

지금의 부모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은 것을 보고, 지금 까지 살아오신 경험을 통해 나를 지도 했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있던 것을 보며, 나는 우리 부모님처럼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섣불리, 'YES'라는 대답을 못할 것 같다. 나는 과연 우리 부모님처럼 할 수 있을까?

2008년 경제위기, 2012년 유럽재정위기,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이러한 경제 불황속에서도 항상 가정에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내가 공부를 못해도,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흡연을 하고, 술을 마시면서 문제를 일으켜도, 교회에서 친구와 주먹을 휘두르며 싸워도, 학교에서 대인관계에 관련된 문제를 일으켜도 부모님은 항상 나를 사랑해 주시고 감싸주셨다. 못난 아들이여도, 우리 가정의 자랑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나는 나중에 내 아들,딸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렸던 시절, 내 마음속의 ‘불똥’을 항상 부모님에게 튀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러한 모습까지도 감싸주시고, 격려 해주었다. 이번 주제로 글을 쓰며, 앞으로 이런 ‘불똥’말고, 부모님이 나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오늘 이 글을 작성하며 부모님에 대한 많은 생각이 든다. 오늘은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치킨 한 마리 들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 신관 201-2호
  • 대표전화 : 02-3673-0123
  • 팩스 : 02-3673-01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종권
  • 명칭 : 크리스챤월드리뷰
  • 제호 : 크리스챤월드리뷰
  • 등록번호 : 서울 아 04832
  • 등록일 : 2017-11-11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임종권
  • 편집인 : 임종권
  • 크리스챤월드리뷰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크리스챤월드리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