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1)
시간에서 공간으로(1)
  •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6.2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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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알리는 말씀 : 이 여행기는 1965년 7월 26일(월)부터 8월 30일(월)까지 재일교포 김신환 목사님과 함께 한국을 일주하며 기록한 여행기입니다. 기록물 일부를 분실하여 며칠 분의 여행기가 빠졌습니다.

 

 7월 26일 여행 경로: [서울-춘천-홍천-인제-간성-거진-대진]  <한국관광지도>
(1965.3.20)로 경로 표시

1965년 7월 26일 월, 비-흐림-맑음/ 대진 하숙집에서

기차는 빗속을 달리는데

  기차가 춘천을 향해 북상하는 동안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나는 기차가 철도 연변에 이어져 있는 판잣집 사이를 벗어나 밭이랑 농가, 마을이랑 들판을 지나면서부터 눈을 차창 밖으로 돌려 여행의 기분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푸른 들판과 꼬부랑꼬부랑 이어진 전답들, 그리고 빗속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손을 흔드는 어린 목동의 맑고 천진무구한 웃음은 미지(未知)에 대한 여행자의 설레는 가슴에 깊은 서정을 안겨준다.
  시골은 정이 있고, 소박한 웃음이 있고, 푸른 초원에서 풍기는 시(詩)가 있어 어디를 가나 순수하고 아름답다.

   차창 밖의 풍경은 자꾸 바뀌면서 반복된다. 시골이 태고의 안식처처럼 다가온다. 수줍은 처녀의 마음속 풋정을 띄워 보내기도 했던 개울과 샛강 물결엔 향토(鄕土) 내음이 저린 향수가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이게 시골스러운 정취 아닐까. 차창 밖, 스쳐 가는 풍광을 보며 잠시 이런 감상에 젖었다. 

여행 일정표 : 1965.7.26(월)-8.30(월) ❶(1965.7.26-8.17), ❷(1965.8.18-8.30)
여행 일정표 : 1965.7.26(월)-8.30(월) ❶(1965.7.26-8.17), ❷(1965.8.18-8.30)

  언제부터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여행을 통해서 이러한 순박한 시골의 맛과 멋을 느꼈기에 연년이 여름에는 여행 병 환자가 되어 유혹의 곳으로 나의 몸을 맡기곤 한다. 한 곳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는 굶어도 좋다. 아니 몇 끼를 절약하면서 보는 것이 나의 삶에 더욱 인상 깊게 체험되는지도 모른다.
  기차는 시골 정거장에 멈출 적마다 승객들이 오르내리고는 또다시 북동쪽으로 향해서 숨차게 달린다.

  대성리에서부터 소양강의 물줄기가 멀리에서 뿌옇게 잿빛으로 보이더니 청평 저수지에 가까워지면서 물빛은 점점 검푸르게 보였다. 그리고 청평 수력발전소의 땜 수문으로부터는 만수 된 물이 폭포수처럼 강 밑으로 쏟아져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강에는 장마로 부서진 가옥 자재들과 솎아놓았던 잡목들, 벌채해두었던 통나무들이 넘실거리며 떠내려가고 있었고, 강가에는 모래와 자갈이 뒤섞여 있었다. 춘천 지구 수해가 심했다는 신문 보도가 문득 생각난다. 

7월 26일 여행기(1-2쪽)
7월 26일 여행기(1-2쪽)

  기차는 청평 저수지를 멀리 두고 점점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들판을 달리다가 소양강을 옆에 끼게 되었다. 이곳도 수해가 심한 지역이었다. 공병대 군인들이 트럭과 군용 장비로 복구공사를 하는 광경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수재민들은 강가 언덕에 야전용 천막을 치고 가재도구를 챙겨 놓은 채 서성거렸다. 저들의 모습은 슬프게 보였다. 그러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마음속 깊숙이 스며 있는 표정들이었다. 그러기에 오늘은 슬퍼도 내일은 희망 속에서 맞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기차가 춘천에 도착할 때쯤에 비가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어 날씨는 계속 속을 태웠다.
  우리는 우선 화천으로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외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여객 사무실에 들렀다. 화천의 파로호 호수는 화천 수력발전소와 더불어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매표소 직원은 “이번 홍수로 화천 방면으로 가는 도로가 유실되어 당분간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다음번 목적지인, 대진 어항을 향해 갈 길을 서둘러야 했다.
  오후가 되면서부터 날씨가 조금씩 개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춘천역 앞 간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간성 가는 버스에 자리를 잡았다. 홍천과 인제를 지나 원통에 이르는 동안 버스는 고갯길을 여러 차례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곤 했다. 곳곳의 검문소에서는 총을 멘 군인들이 버스에 올라와 검문하였다.

7월 26일 여행기(3~4쪽)
7월 26일 여행기(3~4쪽)

노을 녘 동해 물결

  버스는 진부령과 대관령이 이어져 있는 계곡과 능선 사이를 쉼 없이 굽이돌며, 숨 가쁘게 달려 저녁해가 질 무렵 간성에 도착했다.
  간성에서 차를 바꿔 탔다. 차는 동해안을 우편으로 하고 38선 북쪽으로 올라간다. 50분간을 북쪽으로 향해 달리는 버스의 차창으로는 낯선 풍물이 펼쳐진다. 차창 가에서 바라보는 노을 녘 동해 물결, 신비와 찬란함과 수억만 년을 묵묵히 지켜온 창생의 속삭임을 누군들 경탄하지 아니하며 바라볼 수 있으랴.

한국의 최북단, 대진에서의 첫 밤

  버스는 거진(巨津)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여행길 나그네가 갈 수 있는 한국의 최북단이며, 동해의 맑은 물결이 출렁이는 곳, 바로 대진(大津)이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농작물 판매소득보다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가계를 지탱하는 큰 수입원이다.

  오징어 20마리 한 두름이 90원에서 100원이란다. 거래가 빈번하다. 배가 들어올 때는 인파 수백 명이 인근 각지에서 모여들어 광주리며 함지에 오징어를 사서 가기도 하고 배에서 받은 오징어의 배를 가르기도 한다.
  대진은 6·25 전쟁 후 남한의 영토가 됨으로써 멀리 남해안 지방에서도 오징어 철이 되면 수십 척의 배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이들 원정 어선들에서 떨어지는 돈이 많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술집이 부둣가에 늘어나며 멀리 내륙 지방에서도 이곳까지 영업하러 온다고 한다. 이때가 되면 술집 여자들의 노랫가락이 낮에도 곳곳에서 흘러나와 한철이나마 성시를 이루곤 한단다. 주머니가 두둑해진 선원들의 기쁜 비명과 꽃 파는 웃음소리가 작은 어촌을 들썩이곤 한다니…. 

  오징어잡이는 고기잡이하는 것과는 판이하다. 낮에는 배를 해안가에 정박해 놓고 선원들은 갑판에서 어구를 손질하거나 낮잠을 즐기기도 하지만, 다른 어장과 달리 이곳은 낮부터 술집에서 즐기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징어잡이는 저녁에 나가서 밤을 새워가며 집어등을 밝혀 오징어를 모으며 물밑으로는 수백 개의 낚싯줄에 20여 개씩 특수 낚싯바늘을 매달아 집어등에 모여든 오징어를 낚아내는 것이다. 저녁에 출항한 배는 새날 동틀 무렵에 입항하기 시작한다.

  여기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그들의 생명을 바다에 내맡긴 어부들과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골목을 들썩이는 작은 어촌, 대진. 건건한 바닷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나의 폐부로 스며든다. 곳곳에서 오징어 말리는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동해안 어촌 교회 부흥회에서 들려오는, 풍금 반주에 맞춘 찬송가 소리가 파도 소리에 뒤섞여 가냘프게 들려온다.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잠이 쏟아진다. 밤도 깊어간다. (196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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