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3)
시간에서 공간으로(3)
  •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7.0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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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계곡물에 손씻고 있는 필자
계곡물에 손씻고 있는 필자

태백산맥 지류에 솟아있는 설악산

  설악산은 강원도 양양군과 인제군 사이에 이어져 있는 태백산맥 한 자락에 솟아있는데, 높이가 1,708m나 된다니 우리나라에서는 꽤 높은 산에 속한다. 늦봄까지도 산의 정수리 그늘진 곳에 눈이 덮여있을 정도로 냉한 이 지대. 봄이 겨울의 꼬리 마지막 몇 가닥을 움켜쥐고 저물어가고 있곤 했던 저 산의 자연 현상을 지금, 여름의 한 가운데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외설악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거칠게 보이지만, 우리 민족의 기상이 말없이 이어져가고 있는 듯 늠름하고 믿음직스럽다. 풍화작용과 침식작용으로 인해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암석들, 구름을 뚫고 치솟은 봉우리들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바위산이지만, 그러기에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 스며들고 있다.
  울창한 삼림과 깊은 계곡에는 샛길마저 없어, 한번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길을 잃게 되어 산길에 밝은 이들과 동행하는 게 안전하다고 한다.

  이곳은 진부령과 미시령이 바닷바람을 막고 있어 여름이면 몰려가는 안개구름과 물을 듬뿍 머금은 구름이 산정에 잠시 머물며 비를 뿌려주곤 산마루를 넘어간다. 그리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쏟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지만 자연과 어울리며 반복되는 이 율동감이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것 같은 그리움의 몸부림이 아닐까. 아니, 이어져가고 있는 저 산맥의 줄기와 산봉우리들, 하늘과 구름이 숲의 숨결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이곳에서는 비와 햇살마저도 하나가 아니랴.

와선대
와선대

외설악 고찰 신흥사

  아침부터 찌뿌듯한 날씨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늘의 여정이 두 군데인데 흐린 날씨로 인해 피로감이 앞서는 듯하다. 우선 잠바를 걸치고 김 목사님은 우산까지 소지하고 첫 목적지로 향했다.
  숙소에서 약 400m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면, 왼쪽 조금 떨어진 곳에 신흥사(神興寺)가 바로 나타나니, 이곳이 1,300여 년 전 자장율사 때 지어진 고찰이다.

  신흥사의 창건과 연력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27대 선덕 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탑평(塔坪)에 사원을 세우고 향성사(香城寺)라 칭하였으나 그 후 사원만보(寺院萬寶)가 불타고 정보 원년에 영서(靈瑞), 연옥(連玉), 혜원(惠元) 선사가 재건하여 신흥사라 개칭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신라 28대 진덕여왕 6년(서기 652년)에 자장율사가 향성사를 창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인조 22년(서기 1652년) 영서 선사가 재건하여 신흥사라 개칭하였다는 설이다. [설악산 탐승 기념 팸플릿「설악의 전모」(1965)와 경내에 세워져 있는 신흥사 연력에 관한 설명문 참조]

  사찰 경내 동서남북 사면으로 전각 5동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 전면으로 향한 것은 보제루인데, 여러 개의 나무 기둥 위에 얹혀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극락보전은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처마 밑의 무늬가 섬세하고 창연하다. 단청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빛과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나온다.

비선대로 가는 길
비선대로 가는 길

울산바위와 흔들바위

  신흥사 옆 계곡을 끼고 올라가다 샛길 잡목 사이를 벗어났다. 가파른 암벽에 몸을 붙이고 기어가듯(내 경우) 한참을 더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산속으로 2km 정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구름은 암석층과 기암 산봉을 덮었다 벗겼다 하며 변덕을 부린다.

  바위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에 손과 얼굴을 적시며 잠시 더위를 식히고, 두 시간 남짓 산행을 강행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집채 같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다. 넓적한 바위들과 암벽, 그리고 계곡 사이로 흘러가는 물맛은 꿀맛이라 컬컬한 목을 축이고, 반석 위에 올라앉아 땀을 식히며 사방을 둘러보니 산이 산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서편으로는 1만2천 봉이라 불리는 날카로운 기암 산봉 무리가 구름을 뚫고 치솟아 있다. 저 오묘한 자태가 만들어가고 있는 장관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다 불러보기도 했건만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 감탄의 탄성이 그치질 않는구나. 동해안의 푸른 바다를 끼고 솟은 관동팔경, 이 웅장한 계곡과 기암절벽, 봉우리들을 어느 문호인들 그 절반만이라고 담아낼 수 있으며, 어느 화가인들 이 자연미를 그대로 화폭에 옮겨 놓을 수 있으랴. 아아, 설악의 비경이 이렇듯 기묘하다니!
  그뿐이랴. 반석 위에 얹혀 있는 듯 커다란 흔들바위, 한 사람이 흔들어도 흔들린다는 구형의 바위 뒤엔 또 다른 암석(울산바위)이 산 위에 돌출하여 있다.

석굴법당 계조암

  흔들바위 옆에는 석굴법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데, 석굴 속을 돌아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습기가 배어 나오는 천정에서는 물방울이 맺혀 똑똑 떨어진다. 안내하는 어린 승의 설명으로는 30여 년 전에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다는데, 하지만 아직도….
  냉한 습기가 더위에 땀범벅이 된 몸을 잠시나마 식혀주었다.

  이것이 계조암. 어느 관광객은 경주 석굴암보다 더 멋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니 과연 이런 암자가 또 어디 있으랴.

  하산길에 산골짝 계곡으로 흘러가고 있는 개울에서 멱을 감는데, 구름이 산을 엎었다 벗겼다 하더니 소나기를 쏟아붓는다. 젖은 몸에 옷을 껴입었는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따로 없구나. 잠바 등에는 물줄기가 줄줄 흐른다. 오래되지 않아 비가 그치고 흰 구름이 하늘로 치솟으니 암석 봉우리들이 다시 구름 위로 솟아오른다.

7월 28일 여행기(1-6쪽)
7월 28일 여행기(1-6쪽)

와선대와 비선대

  계조암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 숲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와선대와 비선대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 널빤지가 눈에 들어온다. 시계는 이미 5시를 넘기고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보니 산봉우리들이 조는 듯 구름에 아물거린다. 가끔 솜 같은 휜 구름이 산 중턱을 감쌌다 흩어지곤 하는데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거슬러 올라가던 개울 앞으로 조그마한 물줄기가 밑의 펑퍼짐한 바위에 떨어져 흘러간다. 이곳이 와선대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던 곳이라고 어느 아낙네가 들려주던 전설이 문뜩 떠오른다. 와선대를 왼편으로 끼고 몇백 미터를 더 오르니, 아! 장관이 바로 여기로구나. 비선대, 수량도 많고 물줄기도 억세게 쏟아져 맑은 물이 깊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뒤편 산을 바라보니 깎아 세운 듯이 이어져 있는 암회색 기암 거석 군이 비에 젖어 번쩍이고, 동편을 보니 방초노송(芳草老松)과 숲이 무성하다. 또다시 보니 하늘에 닿을 듯 미륵봉이 드높다.
  해가 기울어 가는 것도 잊은 채 천연의 비경에 넋을 놓고 있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나리기 시작하고 인적도 끊겨 우리만 남게 되었다.

  점심을 거른 몸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하산길에 설악산 명물이라는 머루즙을 사 들고 산골짝을 빠져나오는데 먹구름 사이로는 별이 반짝인다. (196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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