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9)
시간에서 공간으로(9)
  •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8.0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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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울진-성류굴-평해-백암온천으로 가는 지도
울진-성류굴-평해-백암온천으로 가는 지도

8월 5일 목, 맑음/ 울진 성류굴, 온정리 태백장에서

  울진에서 동해를 끼고 남쪽으로 20여 분 달려가면 성류굴(聖留窟) 입구라는 커다란 간판이 강둑길 다리 몫에 세워져 있다. 버스에서 내려 간판에 그려져 있는 화살표 방향으로 2km 정도 걸어가며 몇 번 숨을 고르고 마지막 산허리를 돌아서니 산과 하늘을 품은 호수가 바람결에 넘실거린다. 배 몇 척이 모래 위에 얹혀 있을 뿐 주위는 인적이 끊겨 고요하다.

  성류굴 어귀 옆에 세워놓은 관광 안내판에는 이 동굴이 1963년 5월 7일에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는 내용과 굴에 관한 정보, 굴 내부 지형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 바위는 이름을 새긴 낙서로 더럽혀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마음이 글자에서 배어 나온다.

  안내인에게 몇 시에 들어가냐고 물으니, 10인 이상이 모여야 들어간단다. 빨리 보고 돌아가야 다음 목적지로 가는 차를 탈 수 있어 마음이 조급하다. 아침 8시에 무슨 관광객이 오겠냐며 들어가자고 사정했건만, 들은 척도 안 한다. 여정에 짜 맞추어 놓은 시간은 자꾸 흐르기만 한다.
  20분 정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청년 두 명이 나타났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4명으로 들어가자고 말을 건네는데도 안내인은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또 한 무리의 남녀가 몰려왔다. 칠팔 명은 되어 보인다. 그러나 저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들어가겠다며 건너편 바위 위에 둘러앉아 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놓는다. 보아하니 급한 게 없는 사람들인 듯하다. 음식을 나누며 유유자적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니 같은 기다림인데 나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긴장의 지속이었던 게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내게 맞춰가며 생활하곤 했던 나로서는 오늘처럼 시간의 위력에 소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2) 성류굴 내부 지형도(좌)  성류굴에서 (뒷줄 왼쪽에 김신환 목사, 그 옆 뒤쪽에 필자)(우)
2) 성류굴 내부 지형도(좌) 성류굴에서 (뒷줄 왼쪽에 김신환 목사, 그 옆 뒤쪽에 필자)(우)

  주어진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되자 조급했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오늘 하루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나로서는 나를 되새겨 볼 시간에 접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귀한 것을 얻은 셈이다. 자위란 이런 것일까. 하지만, 사실 지금 내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체념의 지속이다.

  안내인을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온몸에 엄습해 온다. 박쥐 몇 마리가 이쪽에서 저쪽 구석으로 후드득 날아가 버리고는 동굴 안은 고요하다.
  바위 짬에 놓인 나무 층계를 몇 계단 내려가니 석순이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옆길을 빠져나오니 바로 호수가 발 앞에 닿았다. 물속에 비친 전등 가로 물고기 한 마리가 얌전히 떠다닌다.
  지하 금강으로 이름난 이 굴은 길이가 472m나 되는데, 석회석과 철분, 유황 등이 혼합된 동굴로서 평안북도에 있는 동룡굴(蝀龍窟)과 암석 성분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순수한 석회석 동굴이 아니므로 철분이 내배어 누렇고 적갈색을 나타낸다. 

온정리 태백장 (평해온천=백암온천)에서 부모님께 올린 우편엽서
온정리 태백장 (평해온천=백암온천)에서 부모님께 올린 우편엽서

  내부 지형도 안내판에 기록된 설명문에 따르면 성류굴은 다섯 개 연못과 열두 광장(5池12廣場)으로 되어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종유굴이란다. 석순과 석종, 석주 등의 황홀한 자태를 내 어찌 말로 옮길 수 있으며, 그 장관과 신비함을 어찌 글로 세세히 그려놓을 수 있으랴.
  얼마 전에 9개의 옆 굴이 발견되었으나 전등 시설이 안 되어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니 아쉬움과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굴 앞으로 흐르는 왕피천(王避川)과 지하로 통하고 있는 호수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하지만, 석주와 석순에서 떨어져 고인 물웅덩이에는 석회성분과 철분, 유황 등이 섞여 있어 물고기가 살 수 없단다. 

8월 5일 여행기(1-4쪽)
8월 5일 여행기(1-4쪽)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니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재주를 부리는듯한 원숭이, 석순마다 교묘한 음색을 내는 타악기, 그뿐이랴 굴을 또 하나 들어가니 성모마리아의 성스럽고 자애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이밖에도 비키니를 걸친 우아한 자태의 미스 코리아 전신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조각이 만물 만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의 궁전 앞에 서니 천정에서 흘러내린 석순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이 천연의 찬란한 예술 작품 같았다. (196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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