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사의 소명을 불순종하다가 사랑의 매를 맞고 회개하고 돌이켜 목사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은퇴했습니다.
섬마을 중학교 교사를 뒤로하고 돌맹이라도 녹여낼듯한 불붙는 마음으로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사명을 공부로 증명이라도 하듯 열심히 경건과 학문을 닦았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로 이사가신 박창환 교수님께서 강의 시간에 고백하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설교나 강의를 위해 출타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옆자리에 여자가 앉지 않게 해 주옵소서. 혹시 여자가 앉거든, 늙은 여자나, 얼굴이 예쁘지 않은 여자가 앉게 해 주소서’"
피가 끓는 청춘들이 대다수였던 우리들이(?) 얼마나 깔깔대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 아니야? 뭘 그리 어렵고 딱딱하게 살아? 예쁜 여자와 동행해서 나쁠게 뭐람?”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데도 불구하고 그 교수님께서는 혼자서 사뭇 진지했습니다.
이제 내가 그때 그 교수님의 나이를 넘어서고 인생을 살만큼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분의 표정을 되짚어 봅니다.
"너희들이 아직 인생을 모르는구나. 살다보면 이성적 분별력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정욕과 본능에 끌려서 행동하기 십상이란다. 지금은 깔깔대지만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되새길 때가 있으리라"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의 부제는 "하나의 로멘스"입니다. 주홍글씨는 간통이나 간음 혹은 부정을 의미하는 Adultery를 지칭합니다만, 바로 그 주홍글씨 A가 때로는 Angel이나 Able 혹은 Mercy를 의미하는 단어로 진화(?)합니다.
Adultery가 Angel이 되기까지 짊어져야 할 인생의 십자가. Angel이나 Able 혹은 Mercy가 Adultery로 미끄러지는 경계. 모든 인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계선에 선 사람들입니다. 마치 강원도 태백의 삼수령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삼수령 언덕에서 어느 골짜기로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서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의 운명도 갈립니다.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바다로, 낙동강을 통해 남해바다로, 혹은 한강을 만나 서해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간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죄인된 심정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부끄럽지만, 목사들이 가장 많이 실수하는 대목이 돈과 이성문제입니다. 이 대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 순서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같은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하신 주님의 말씀을 유념하고 이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교수님, 그때 철딱서니없이 웃어서 죄송합니다.
성경은 다른 많은 죄들에 대해서 대부분 싸워서 물리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청년의 정욕은 피하라 하십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2)
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실까요? 정욕과 본능에 휩쓸리기 쉬운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자유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음란문화가 활짝 꽃 핀(?) 세상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절제하고 말씀대로 피할 것을 피하고, 잘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면, 로멘스로 간직되고, 깨끗한 사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괜찮을 거야!"라며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고전 4:6, 10:11-12)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라는 덫에 걸려 주홍글씨라는 굴레를 결코 벗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