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나님께서. 무엇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되소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번째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연결해서 드리는 기도이니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일 뿐,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까? 주님께 기도를 배우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그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부활과 소망을 전수받아 이 땅에서 믿음을 배우고 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저와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고 있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는 스스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엘리 대제사장 시절에, 선민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할 때, 그 이름조차 멋진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도 사천 명이나 전사하며 대패를 당합니다.(삼상 4장)
백성은 물론 장로들이 의논 끝에,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시고 전쟁하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이길 것을 기대합니다.
결과는 이스라엘이 대패하여 삼만이 전사하고, 엘리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비극을 겪으면서,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엘리 대제사장은 혼절합니다.
왕이 없던 이스라엘에서 사사와 대제사장을 겸직했던 실권자 엘리가 집권 40년의 막을 내리고, 사무엘 시대가 열립니다. 빼앗겼던 여호와의 언약궤는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면서 난산으로 죽어가며,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탄식하며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부르고 죽습니다.
남편 비느하스도 전사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권세를 가졌던 시아버지 엘리도 비보에 스러져 죽었으며, 희망의 근거인 언약궤까지 블레셋에게 빼앗겼으니, 어찌 "이가봇"이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궤는 스스로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
블레셋의 다곤 신당에 노획물로 놓여진 언약궤의 행적은 다곤의 머리가 부러지고, 두 손목이 끊어지고 몸통만 남습니다. 다곤 신당이 자리잡은 아스돗 사람들은 악성 종양이라는 재앙을 만납니다.(삼상 5장)
택한 백성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룩하게 구별하지 못해서 조롱을 당하듯 빼앗기고 다곤 신당에 방치되었지만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되시고 역사하십니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야 할 본능을 뒤로 한 채 벧세메스로 올라오는 어미소의 울음소리와 함께,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언약궤가 돌아옵니다.(삼상 5장-6장)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을 드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우는, 요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주기도문의 첫번째 기도와 함께 우리가 곱씹어 보아야 할 까닭입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7-21 새번역)
이미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시 주님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도 주님을 다시 거룩하게 하시니까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