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가장 해석하기 까다로운 귀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우리 말로는 아무리 좋게(?) 읽으려 해도 이유나 근거 혹은 정도를 말하는 조건절의 냄새가 너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다 용서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누구는 용서하고 아무개는 용서하지 못한 채, 혹은 어떤 실수나 손해는 용서했지만, 다른 실수나 손해는 가슴 속에 담고 끙끙거리며, 주기도를 할 때마다 가책을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사하여 준 것 같이"가 조건절이 아니고, 죄를 용서할 필요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해석하기 까다로운 이 구절을 복음에 합당하게 아멘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살기에 용서를 구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나 여화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6-37)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용서의 기도가 필요 없는 의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 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그렇습니다. 용서는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시매 용서받은 은혜와 감격으로 주님을 경외합니다. 용서받은 감격의 크기와 정도에 따라서, 주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순종하고 헌신하는, 믿음과 충성 그리고 헌신의 크기와 깊이가 달라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은 만큼,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들이 그 사람에게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엡 3:19)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받고 누린 만큼, 용서하며 살아야 할 자세와 용기 그리고 태세 전환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봅시다. 만 달란트라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넣다니요. 이것이 인생,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 이게 우리 인간들의 일반의 모습이자, 바로 저와 당신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자기 문제는 발이 손이 되도록 빌면서 해결하거니와, 다른 사람의 문제는 보고 듣기에도 민망할 만큼 야박합니다.
주님의 해결책과 선언을 봅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2-35)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0)
용서를 받았습니까? 용서를 받은 자의 삶을 삽시다!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고후 6:13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