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사회는 물질적인 업적과 사회적 성공으로 정체성을 판단하는 문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풍토에서 실용적이고 긍정적이며 결과 지향적인 3번 유형들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과 성공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우리 사회가 들어섰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은 정신적인 과도기에 처해 있다. 그동안 이것만 이루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음을 자각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73.9%가 행복한 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별 행복도에 있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1군이라면 한국은 중국 우간다와 함께 3군에 속하는 나라이다. 남의 눈에 의하여 성공의 척도가 좌우된다면 그는 언제나 불안에 떠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행복은 남 보기에 그럴듯한 직업과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이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얻은 것은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삶의 허구에 대한 깨달음 일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깨어지는 가정들을 보면서 일과 삶의 혼동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한 각성일 것이다. 이는 미성숙한 3번 유형의 사회적 패턴에 대한 재앙과 그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의 반성은 너무도 부족하다. 소위 양극화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데 가진 자들의 사치는 극을 달하고 있고 없는 자들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3번 유형들은 명품을 좋아하는 데 3번 지향의 사회는 자연스럽게 명품지향, 최고지향의 사회로 내달리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물에서 생존에 대한 깊은 안전감을 느끼는 자기 보존본능과 맥을 같이 한다. 성공한 3번 유형들은 (특히 사업가들) 누군가가 조금만 추켜세워도 금새 거기에 빠져 버린다. 칭찬 받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본성이겠지만 3번 유형은 자신의 에고에 엄청난 관심을 쏟아 붇는다. 그들은 날개인 2번들을 속으로 경멸하지만 신문 방송의 모금이나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시설에는 막대한 기부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기념물을 만들고 그 위에 이름을 새기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3번 문화인 미국문화에서 온갖 이름 붙은 건물이나 방들을 볼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3번들은 효율성의 함정에 빠지곤 한다. 몇 가지 일들을 동시에 해내면서 불철주야 노력한다. 운전을 하면서 면도하고 전화하고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는 식이다. 목표를 설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진행 내용의 과정을 검토한다. 그러나 문제는 자동차가 사고가 난다면 여러 가지 행동을 한꺼번에 처리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바가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세상을 놀라게 한 황우석 박사는 3번 유형의 전형적인 모습과 3번 유형이 빠지는 효율성의 함정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인간 유형으로서 성서의 인물을 꼽는다면 야곱을 들 수 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겨루는 자’였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형과 겨루었고 아버지와 외삼촌을 속였고 온갖 꼼 수로 재산을 모았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막다른 상황 야뽁 나루에서 그의 얄팍한 임기응변과 잔꾀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속임수와 위선으로 버텨온 삶, 자신이 자기를 속이는 삶의 종말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그 날 밤, 야곱은 일생일대의 씨름을 벌였고 자기초월의 근본경험을 하게 되었다.
돈과 명예는 사람의 노력과 함께 갈 수 있지만 생사문제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외로움과 불안이 왜곡된 성공주의와 편법과 기회주의적 성향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날이 새면서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 날 아침 떠오른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니었다. 죽은 자 야곱의 태양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 이스라엘의 태양이 떠오른 것이다.
에고의 틀을 깨고 영혼의 새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은 갖가지 혼란된 모습을 띠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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