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에 속한 인간에게 있어 의식의 뿌리는 두려움에 있다는 것을 에니어그램은 통찰해 주고 있다. 두려움은 인간이 자기완성과 자신의 신성을 찾아 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한없는 불신과 영원한 사랑에 대한 불신을 일으킨다.
두려움은 밝은 조명의 방 안에서 눈을 꼭 감고 앉아 어둠을 두려워하는 어린애처럼 진리의 빛에 대한 곡해이기도 하다.
인간 영혼의 바이러스가 두려움과 죄책감임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 됨을 가로 막는 거짓이다. 인간이 자신의 실상을 알아차리려면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굴욕감을 두려워한다. 무엇인가 막연하지만 잘못 될까봐 두려워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소용이 없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또는 진리를 믿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진리가 주는 자유와 행복과 사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정하는 커트라인을 쳐놓고 그 이하의 행복과 자유를 원할 뿐, 그 이상의 도약은 두려워 시도조차 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에니어그램은 나 자신에게 두려움이 엄습할 때 그 두려움이 말하는 바를 잘 들어 보라고 말한다. 나는 삶 속의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자신 속의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 두려움에 눈 감지 말고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두려움이 진정 무얼 말하고 있는지 들어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두려움의 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두려움이란 피해 다니면 다닐수록 강해지고 커 보이기 마련이다. 두려움을 꺼려한다는 것은 두려움에 불필요한 힘을 과다하게 실어 주는 것과 같다. 그러나 두려움에 직접 맞서서 수용할 때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텅빈 허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두려움은 다만 미지의 대상,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음을 통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성서는 말씀해 주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고 그러기에 삶도 죽음도 일체만물도 모두 은혜 일 뿐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숨었듯이 인간은 두려움 속에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분노 에너지의 중심에 있는 9번 유형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장형 1번이 겉으로는 복종하며 속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라면 8번 유형은 밖으로 화를 내고 안으로는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9번은 이 둘 사이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분노가 없는 평화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인간의 유형 중에 겉으로는 가장 온순하고 부드럽고 순응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복종하면 화가 나고 화를 내면 두려워하는 이중성이 자리 잡고 있다.
9번은 분노를 회피하는 방식, 곧 무시하거나 무감각해짐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 한다. 그들은 평화롭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저장된 분노를 소극적 공격행위로 표출하거나 잠으로 회피해 버린다. 바로 이점 때문에 게으르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9번의 중요한 문제점은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데 우선순위를 놓친다는 점이다. 중요한 일을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열심히 함으로써 회피해가는 악습에 대해 통찰할 필요가 있다. 9번 유형이 자잘한 일들에 매달려 있고 두서없이 일처리를 하고 있다면 그에게 무엇인가 중요하고 급박한 일이 있는 징조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9번 유형은 화가 나는 순간 화를 내는 대신 멍해지는 특성이 있다. 만약 그 순간에 과격하고 도전적으로 화를 낸다면 그는 9번 유형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에니어그램 도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9번은 모든 유형을 수용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편이기 때문에 훌륭한 중재인일 수 있지만 자신의 입장을 바로 세우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존재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
저작권자 © 크리스챤월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