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념의 세계가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자각이 새로워지는 것이요, 나와 이 세계에 대한 의식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존재와 삶의 집을 짓는 데 있어 어떤 지혜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 7:24-27)
에니어그램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래란 두려움이요 반석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집을 마음과 정서적 안정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의 바람 속에서 늘 안절부절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기계와 같다. 어떤 단추를 누르느냐에 따라 희로애락이 춤을 춘다. 자칫 실수로 분노의 단추를 잘못 눌렀다가 다시 못 보는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모래위에 자신의 집을 지은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사람이다.
그들은 거짓 나를 나로 알고 있다. 그들은 신을 자신의 두려움을 투사하여 창조해 내고 신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두려움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전 뜰을 아무리 오래 밟아도 사람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이 열리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이란 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나를 통해 흘러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두려움으로 세상을 대처해 가는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그들은 영악할 수는 있으나 지혜로워질 수 없고 신경질적 공격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삶의 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이란 길가다가 걸려 넘어진 돌부리일 수 도 있고 누군가가 전해 주는 기분 나쁜 소식일 수 도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여덟 가지 바람에 날린다고 말한다. 얻음과 잃음, 숭배와 조롱, 칭찬과 비난, 고통과 기쁨이다. 바람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바람을 나로 아는 동일화의 정신착란에 빠져 그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누군가의 칭찬에 우쭐거리는 순간 칭찬의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바람에 날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통찰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의 어떤 청년이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승에게 이젠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냈다. 스승은 그가 사는 곳에서 양쯔강을 5백 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가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그 시를 읽고 나서 아래에다 ‘방귀, 방귀’라고 적어서 돌려보냈다. 청년은 그 답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침내 그는 스승을 찾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 양쯔강을 5백 킬로나 거슬러 올라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스승을 찾아 갔다. 그리고 인사를 드리기가 무섭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답장을 쓰신 겁니까? 제 시를 읽어보면 이제 제가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수 있지 않습니까?”
“자넨 더 이상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방귀라는 두 글자가 자네를 이 먼 곳까지 날려 보내지 않았는가?”
지금 당신은 어떤 바람에 날아가고 있는가?
에니어그램에서 두려움의 주제를 지극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자신의 그 어떤 것들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삶의 패턴을 마감 짓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증명의 무망한 노력으로 인하여 화내고 구걸하고 상처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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