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 그램 /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 간 삶 - 영생
에니어 그램 / 생사의 두려움을 건너 간 삶 - 영생
  • cwmonitor
  • 승인 2008.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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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7년 주기로 자기 존재의 변화와 도약이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R, 슈타이너는 통찰하고 있다. 식물들은 때를 따라 자기 초월과 성숙의 과정을 통하여 열매라는 완성에 도달한다. 연어가 머나먼 여정을 다니다가 마침내 자신이 태어 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생명체들은 자신 안에 가진 꿈길을 따라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자신을 위해 그 결과를 소모하지 않는 부자생(不自生)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왜 그것이 안되고 있을까? 인간을 밀알에 비유한다면 땅은 두려움이요, 새로운 변화와 성장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일과 소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도약과 성장을 위한 기회들을 붙잡지 못하고 피하고 있다는 통찰을 에니어그램은 보여주고 있다. 밀알이 밀알 하나의 상태로 머물고 있으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진정으로 아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무지요, 영생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어리석음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막무가내로 무지와 어리석음의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있다. 영혼의 스승들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생사를 초월하는 자유와 영생의 삶으로 인간을 안내 하고자 했다.

연어가 연어의 꿈을 찾아 가듯이 인간에게도 영원을 찾아가고자 하는 본성적 마음이 있다. 그것을 억압하고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꿈이 썩게 되고 인생이 죽게 된다.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꿈을 죽이고, 순례자가 순례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꿈들을 죽일 때 나타나는 그 세 번 째 징후는 평화입니다.
삶이 안온한 일요일 한낮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자신에게 대단한 무엇을 요구하지도,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구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고는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졌다고 여깁니다. 젊은 날의 환상은 내려놓고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래의 누군가 아직도 인생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원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놀라게 되는 거죠. 하지만 실상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지요. 우린 자신의 꿈을 위해 싸우기를 포기한 겁니다.
즉 "선한 싸움"을 벌이기를 포기한 것이죠. 꿈을 포기하고 평화를 찾게 되면, 얼마 동안은 평온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꿈들이 우리 안에서 썩어가면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감염시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잔인해지게 되고, 마침내는 그 잔인성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게 됩니다. 그리고 고통과 강박관념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싸움에서 만날까봐 두려워 피했던 실망과 패배가 우리 비겁함의 결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느 날, 죽어서 썩어버린 꿈들 때문에 더는 숨 쉴 수도 없게 된 우리는 죽음을 바라게 됩니다. 우리의 확신, 우리의 일, 그리고 일요일 한낮의 끔찍한 평화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해줄 죽음을요.

- 파울로 코엘료 / 순례자 -
성서는 인간을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순례자는 낯선 곳을 찾아가는 사람이지 한 곳에 머물면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지 않는 정착민이 아니다. 사실 여행의 맛은 낯선 곳, 전혀 새로운 문화와 환경을 접하는 데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익숙하고 낯익은 데만 고집하면서 아무데도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순례자일 수 없다.

여행은 밖으로 하는 여행과 내면의 여행이 있다. 이 우주 공간 속에서 지구는 하나의 별에 불과하다. 인간의 의식 공간 역시 우주와 같이 한 없이 넓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고 어떤 물음도 없이 생존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순례자로서의 삶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길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갖지 않고, 인간의 길을 가지 않을 때 그는 자신과 타인을 공격하는 잔인한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경제 논리만 판을 칠 뿐 종교의 자리는 제대로 설 자리가 없다.

종교 역시 인간 영혼의 깨어남과 성숙에 초점을 두는 종교가 아니라 머리 숫자와 건물공간의 크기가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마련이다.
예수는 그런 종교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오시지 않았던가. 인간의 살과 잔인함 속에 묻혀있는 사랑을 부활시키기 위해 오시지 않았던가.

이병창 목사 시인·진달래교회 moa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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