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자의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3
박은자의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3
  • cwmonitor
  • 승인 2008.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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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자동화작가 (온양 예은교회 사모)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빠는 나에게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분이 아니라 어쩌다 한 번씩 오셔서 잠시 무 등을 태워 주시거나 장난감을 한 아름씩 주고 가시던 분이었습니다. 아빠가 사 오신 장난감 중에는 이제는 내가 커서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것들이 섞여있을 때도 있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난감들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로봇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총이나 칼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사 오신 장난감 중에는 갖가지 모양의 로봇과 칼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빠는 그 칼로 나와 칼싸움을 하고 싶어 하셨고, 총을 들고는 영화에 나오는 무법자 흉내를 내고는 했습니다. 아빠가 총을 들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했습니다.

“자, 이리 나와! 내가 한 방에 갈겨 줄 거야. 이 황야에서는 내가 대장이야. 나를 이길 악당은 이 세상에 없어! 하하하!”

아빠가 큰 소리로 웃었지만, 아빠의 웃음은 어딘가 쓸쓸하고 슬펐습니다.
그런데 아빠에게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는 엄마나 누나들에게서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코가 알싸한 냄새 같기도 하고, 다 큰 녀석이 엄마 등에 업힌다고 가끔 엉덩이를 때리는 요셉슈퍼 아저씨한테서 나던 입 냄새 같기도 했습니다. 아, 어느 때는 병원 의사선생님한테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습니다. 아참, 아빠는 아주 큰 병원의 의사랍니다.

엄마는 의사 아빠를 닮아서 주사를 아주 잘 놓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주사를 놓아 달라고 엄마를 부르러 옵니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업고 주사를 놓아주러 갑니다. 엄마가 주사를 놓아주러 가는 집은 대부분 정해져 있고, 모두들 엄마를 반갑게 대해 줍니다. 과일이나 떡을 주면서 먹으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잘 드시지 않습니다. 겨우 과일 한 조각을 드실 뿐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은 모두 내 차지입니다.
나는 무엇이나 잘 먹습니다. 내가 잘 먹으니까 더러 집에 갈 때 싸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먹는 것은 다 어쩌고 이렇게 말랑깽이가 되었노?”

나는 ‘노’자로 끝나는 말이 참 좋습니다. ‘노’자로 끝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가령 이런 말들입니다.
‘사내가 어쩜 이렇게 예쁘게 생겼노?’

‘어린애가 그림을 와 이리 잘 그리노?’
‘눈이 어쩜 그리 맑으노?’
말할 때 ‘노’자를 잘 쓰는 어른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 같습니다. 왜냐하면 얼굴에도, 손에도 정을 담뿍 담고 있으니까요.

긴 줄이 매달린 링겔병을 벽에 건 뒤에 엄마는 주사를 맞는 분에게 말합니다
“주먹을 꼭 쥐세요.”

그러면 주사를 맞는 어른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지 않게 찔러요.”
엄마는 팔에 고무줄을 단단하게 감으며 말합니다.
“주먹을 꼭 쥐어야만 아프지 않아요. 혈관도 찾기 쉽고요.”

주사를 맞는 어른들은 어린애처럼 엄마의 말을 잘 듣습니다.
엄마는 능숙하게 혈관을 찾아내어 주사 바늘을 꽂은 뒤에 서서히 주먹을 펴게 시킵니다. 그러면 맑은 약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져 누워있는 사람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주사약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주사바늘이 들어가는 것도 몰랐네.”
사람들은 엄마가 아프지 않게 주사를 잘 놓는다고 칭찬합니다. 사람들이 엄마를 칭찬하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치 내가 칭찬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겁이 많은 어른도 많습니다.

주사약이 다 들어 간 뒤에 주사 바늘을 어떻게 빼야 하고, 또 주사를 맞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어도 엄마를 가지 못하게 붙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와 나는 꼼짝 못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 엄마는 얼른 가방에서 백지 공책과 색연필을 꺼내어 줍니다.

그리고 엄마도 조용히 책을 꺼내어 폅니다. 그러나 엄마가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주사를 맞는 분이 계속해서 말을 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말을 걸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사약이 다 들어갈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기다립니다. 사람들은 곧잘 엄마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지고는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어쩌다 남편을 잃었소?”

혹은 이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상처하고 혼자 사는 이가 있는데 내가 중매를 좀 설까?”
그러면 나는 얼른 소리칩니다.

“우리에게 아빠가 있어요. 우리 아빠는 의사에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 참고 기다려요.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고 해도 조강지처를 버리지는 못해요. 암, 조강지처를 버릴 수는 없지. 그리고 아이들이 있으니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요.”

엄마는 대답대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치 아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마른 꽃잎이 부스러지는 것처럼 엄마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는 슬며시 엄마 등으로 다가가 매달립니다. 그리고 엄마 얼굴을 만져 봅니다. 엄마 얼굴을 만지는 내 조그만 손을 엄마는 어김없이 잡아주십니다. 그래도 나는 이마며 콧등까지 확인해 본 후에야 안심하고 엄마 등에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나는 조강지처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엄마가 조강지처라는데, 또 조강지처는 버릴 수 없다는 데, 그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어서 누나들에게 물었습니다. “누나, 조강지처가 뭐야? 엄마가 조강지처야?”

그런데 누나들은 서로를 마주보다가 나를 바라보았을 뿐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누나들도 조강지처가 무슨 말인지 모르나 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시험을 볼 때 마다 백 점을 받아서 엄마를 환하게 웃게 만드는 똑똑한 누나들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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