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거부당한 그리스도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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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wmonitor
  • 승인 2008.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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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 목사(시인·진달래교회)

산 아래 마을을 지나노라니 동네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 두방 마을에 교회 건축 결사반대”. 목숨이 몇 개나 되길 레 결사반대일까? 혀를 차면서 김구선생이 “나라를 위해서 경찰서 하나를 짓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더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어쩌다 교회가 이지경이 되었는가. 마을 앞에 오래 동안 자리 잡았던 교회가 마을 안에 교회 건축을 하고자 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것을 보면 그 동안 그 교회와 마을 주민의 관계가 어떠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온유한 빛을 사랑하면서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종교가 진리에 대한 증거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빈약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맨 윗자리에 계시는 내적인 혁명이 전혀 없었고 인간적인 것이 모든 것을 선점해 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히려 기독교에 의하여 거부되고 있다고 그는 통찰을 한 것이다.

루이스 피셔는 간디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 간디의 기독교도 친구들은 그에게 기독교의 정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가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도가 인정하는 그리스도성이라면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간디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내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원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죄 그 자체로부터의 구원을 원한다. 내가 그 목표를 달성할 때 까지 나는 쉬지 못해도 족하다.”

나는 간디의 말에서, 그리고 동네의 현수막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을 빙자해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쫓아내고 환전상의 탁자를 둘러엎었던 예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가지고 너희들 자신도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 까지도 방해하고 있다.” (누가 11:52)

오늘 이 시대에 그리스도에게 가는 길을 누가 막고 있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이상과 교훈을 자신의 생활과 신앙 속에 구현하고자 노력했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인도를 해방시킨 간디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오늘의 교회는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배워야 하고 갈릴리 변방 어둠의 백성들이 환호했던 복음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찾아야만 한다. 오늘도 장사꾼의 소굴로 변해버린 예루살렘의 모습은 여전하고 “자기 백성에게 와도 그들이 영접하지 않는” (요한 1:11)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교회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최고조에 도달해 있는 이 시대에 교회는 안티 기독교를 외치는 그들의 외침 속에 들어 있는 주의 음성을 듣고 진정한 겸손과 사랑의 실천을 회복해야만 한다. 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이었던 나아만이 엘리사의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 (열하 5:10)는 지시에 겸손히 따랐듯이 온갖 만신창이가 된 오늘의 교회는 말씀의 강물 속에 몸을 던져 일곱 번 씻는 작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옷을 걷으시고 수건을 들어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낡은 관념의 의복을 걷어 제치고 발을 닦아주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예수에게 발을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는 자신의 발을 스스로 닦고 남의 발도 닦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젠 사랑에 관한 글과 설교로는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책은 책방에 넘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의 의미에 관한 이론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치료해야 한다.

우리는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 더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그 분을 따르기 위해서 내 신발을 벗고 그 분의 새 신발을 신어야 한다. 중생(born again)이란 그 무엇들을 나로 아는 삶에서 나로서의 ‘나’가 된 사람이다. 그는 하늘의 빛으로 깨어난 사람이다. 그리하여 지구에 보내어진 그분의 사명을 아는 사람이다. 삶의 달인이요, 안내자요 치유자다.

진리 앞에서 겸허하게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는 태도가 ‘온유’이다. 이 겸손의 실천적 온유함을 잃어버릴 때 종교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진리 앞에 겸손하지 못한 자가 어찌 사람과 세상 앞에 온유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겸손과 실천의 짠맛을 잃은 종교를 배척할 수 밖에 없다. 복음은 인간을 의존하는 앉은뱅이의 삶에서 일어서게 하고 걷게 하고 춤추게 하는 능력이다. 모든 것에 자유하지 만 스스로 봉사와 수고의 무릎을 꿇게 한다. 삶의 모든 순간과 조건 속에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 겸손히 노력하게 한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기 자신과 만유를 수용하고 인간을 조종, 위협, 통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mo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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