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 배움 - 말을 배우는 것 (2)
에니어그램 - 배움 - 말을 배우는 것 (2)
  • cwmonitor
  • 승인 2008.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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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창 목사(시인·진달래교회moamm@hanmail.net)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지구학교에서 배움의 때를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겠지만 인간은 나이에 따라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마련이다. 대소변을 가리는 교육이 필요한 때도 있고 영적 성숙에 대해 배워야 할 때도 있다.

인간의 몸 주기는 7년이라고 한다. 일곱 살이면 학교교육이 시작되고 열네 살이면 성적 변화를 가져오는 사춘기에 접어든다. 이때는 성적 에너지 곧 충동적 본능의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명상과 적절한 수련이 필요한 때다.

스물 한 살이면 성년으로서의 책임과 자립의식이 있어야 하고 스물 여덟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사명에 대한 물음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성현들도 이 나이에 출가를 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게 된다.

심리학자 칼 융은 서른 다섯 살 때 까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정신분열 환자로 보았다. 새로운 주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육체가 생화학적 변화를 겪고 새로운 세포로 탈바꿈하는 시기는 새로운 도약과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결정적 시점이다.

이 시점을 잘 이용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다. 뱀이 허물을 벗 듯 인간도 이 시점을 잘 보내야 ‘늘 그런 이로 사는 늙은이’ 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춘하추동의 계절 변화에 따라 곡식들이 자기 성장 단계의 모습을 저마다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식의 성장과정에도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이고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존재와 방향을 알아야 삶의 혼란이 없다. 이걸 모를 때 삶은 애매모호해진다. 이 애매모호한 상태를 가리켜 영적인 눈이 멀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피와 살로서의 몸 나를 나로 아는 차원이다. 사십이 넘어도 이 자각과 통찰이 없을 때 ‘되어 감’이라는 우주의 법칙을 거역하게 된다. 때를 따라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밟아야할 ‘자아’의 성장이 멈출 때 인간은 영적 자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몸 나는 생각하는 나와, 느낌의 나와, 행동하는 나로 이루어져 있다. 몸 나를 나로 알 때 인간은 이 세 가지 나의 중심이 없이 살기 때문에 두려움과 혼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예수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사람들이 겪게 되는 혼란은 이 두려움의 에너지 장에 있는 한 그 말을 이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차원으로의 변화가 없이는 그 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공자나 소크라데스를 이해하기 위해 ‘거듭남’이라는 존재의 변화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지성과 노력만 있으면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 지식만 가지고선 이해가 안 되는 역설과 어둠이 있다. 요한은 예수를 진리 자체로서의 로고스라고 말한다. 예수는 진리에 대하여 설명한 사람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의 존재였고 진리 그 자체를 온 몸으로 살아낸 분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배움을 그 무엇들에 대한 끝없는 설명으로 이해해왔다. 그 것은 지식과 논리의 차원이다. ‘나’ 존재 밖의 현상에 대한 지적 풀이일 뿐이다. 그것은 실존이 없어도, 나 존재의 변형과 고백 없이도 존재하는 영역이다.

사실 사과의 품종별 맛을 책으로 읽고 설명을 많이 듣는다 한들 각 사과의 맛을 먹어 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과 맛을 많이 먹어본 사람보다 설명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에니어그램 역시 존재로 맛을 보지 않고 주입된 지식으로 설명을 잘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앎이란 지식의 주입인 기억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인식의 영역이 있다. 그러나 내 인식의 영역 너머의 존재는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계시적 앎이 있어야 나보다 더 큰 세계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낡은 규범의 틀이 깨어지지 않고 어떻게 나보다 더 광대하고 강렬한 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어린 마리아가 천사의 기별을 수용하듯이 나의 모든 판단을 뛰어넘는 말씀을 수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정한 에고의 선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는 자신의 생각을 믿는 신념의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완고한 신념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순간순간 임의로 움직이는 바람 같은 예수의 행태와 파격적인 역설의 통찰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욕구와 열정을 죽이고 온순 착실한 인간상을 모범으로 길들여진 종교적인 사람이 늘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살아 있는 자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예수는 거울이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어찌하여야 할지를 물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곧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거울을 깨뜨려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자 했다. 바로 이런 일은 2천년전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난 일이었을까.

만물이 변하고 있고 지구환경이 격변을 하고 있음에도 요지부동의 완고함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런 때 예수의 말씀거울 앞에서 ‘나’를 다시 한번 바라보자. 내가 어떤 변화와 도약의 시점에 서있는지 그분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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