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할 이야기가 많아졌어요. 많은 이야기 중에 무엇을 골라 말해야 좋을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친구 ‘소리’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누나들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어요. 엄마랑 살던 집의 라일락꽃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어떤 이야기를 해야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맞아요. 초록빛 물고기의 이야기라면 선생님의 마음을 단박에 움직일 수 있을 거여요. 나는 숨을 한 번 깊이 쉰 다음에 초록빛 물고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초록빛 물고기를 만난 것은 아주 넓고 깊은 바다였어요. 바다 속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중에 초록빛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마치 날개 같아서 바다 속을 하늘처럼 날라 다녔어요. 나는 초록빛물고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연필과 종이가 없었어요. 종이가 있다고 해도 물속이니까 금방 젖어버려서 그릴 수가 없었을 거여요. 무척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초록빛 물고기가 말해 주었어요. 연필과 종이가 없어도 꼭 그리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그릴 수 있다고요.
맑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면 그릴 수 있대요.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은 물에 젖지도 않고 불에 타지도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 날, 초록빛 물고기는 나를 그렸고 나는 초록빛 물고기를 그렸어요. 서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을 열었답니다. 그래서 나는 초록빛 물고기의 몸에 그려진 나를 보았고 내 마음에도 항상 초록빛 물고기가 존재해요.”
“네 이야기는 참 멋지구나. 정말 감동을 주는 이야기야. 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선생님 마음속에도 초록 물고기가 보이는구나.”
“네? 그럼 허락하신 거여요?”
“그래. 와도 좋다.”
“정말이지요? 제가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인 거지요?”
나는 무척 기뻤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미술학원이 문을 여는 시간을 알려 주셨어요. 그 시간은 피아노학원과 속셈학원이 끝나는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너무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선생님이 내 가방을 들더니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시는 거여요. 나는 그만 가슴이 뛰어서 얼굴이 빨개졌어요. 3층에서 계단을 막 내려가는데 선생님이 두 계단 먼저 내려서시더니 커다란 등을 제게 대는 거여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선생님이 다 큰 나에게 업히라고 하신 것은. 엄마와 누나말고, 나보고 업히라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나는 선생님의 커다란 등에 얼굴을 묻었어요. 선생님은 아주 작은 새 하나 업은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어요. 계단을 내려오자 선생님은 나를 내려놓았어요. 대신 손을 잡아 주셨어요. 선생님이 손을 잡아 준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선생님의 커다란 손에는 무엇인가 아주 소중한 것이 들어있었나 봐요.
만약에 내가 아빠의 병원에 찾아간다면 아빠도 선생님처럼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줄까요? 업어 주실 까요? 내 손을 꼭 잡아 주실 까요? 학원에 가지 않는 토요일에 아빠의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와 점심도 먹고 책도 사 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전거도 사달라고 조르고 싶었어요.
물론 내가 ‘자전거 타기’를 배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오른쪽 다리가 짧아서 걷는 것도 어려운데 자전거를 탄다고 하면 다 말릴 거여요. ‘다친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꼭 해내고 싶었어요. 자전거를 타고 멋지게 달려보고 싶었어요. 이런 나의 마음을 아빠가 알아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토요일을 기다렸어요. 토요일이 되자 아빠 병원에 가겠다고 두나 누나에게만 살짝 말했어요. 그러자 누나는 아빠를 만나지 못하니 가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만 내가 꼭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누나가 사정을 했어요.
“하늘아, 가지마. 아빠는 바빠서 너를 만날 수가 없어.”
“싫어. 갈 거야. 아빠가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기다려도 못 만나. 누나도 그런 적이 있어.”
“언제?”
“누나가 지난 번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을 때 너무 기뻐서 아빠한테 갔었어. 상장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 하지만 아빠를 만나지 못했어.”
“싫어. 그래도 나는 갈 거야.”
정말 나는 아빠 등에 매달리고 싶었어요. 아빠와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어요. 그리고 ‘충무거리’에 있다는 자전거 가게에도 가고 싶었어요. 달릴 때마다 빨간 불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전거를 아빠가 뒤에서 붙잡아 주신다면 자전거 타기를 금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내 가슴은 그만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학교 공부가 끝나자 얼른 병원으로 향했어요. 병원에 가는 길은 멀고 신호등도 여섯 번이나 건너야 했어요. 병원 간판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어요. 아침밥을 조금밖에 먹지 않아서 배도 고팠어요. 병원 문을 열자 대기실에는 배가 산처럼 나온 아줌마 두 분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접수창구 안에 앉아 있던 큰 아빠가 나를 보더니 나오셨어요.
“큰아빠, 안녕하셨어요?”
“왜 왔니?”
“아빠를 만나러 왔어요.”
“아빠는 바빠서 너를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집에 가라.”
“아빠가 바쁘세요?”
“그래. 얼른 가.”
“아빠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안 돼! 얼른 가! 아빠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또 아빠는 약속이 있어서 너를 만날 시간이 없단 말이다. 그리고 네가 여기에 오면 안 돼! 다시는 오지 마. 알았어?”
큰 아빠는 무섭고 화가 나신 음성으로 말했어요.
박은자동화작가 / 온양 예은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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