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쌍둥이 누나와 나를 보내며 엄마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이었어요. 까만 토끼 인형을 주면서 엄마의 눈에서 강물처럼 흐르던 눈물이었어요. 범람하는 강물처럼 흐르던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아빠와 누나와 나는 엄마를 떠났어요.
엄마 없이 유치원에 입학하고, 엄마 없이 유치원을 졸업하고, 엄마 없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엄마가 오지 않는 소풍을 세 번이나 갔어요. 엄마가 오지 않은 가을 운동회에서는 열 번도 더 넘어지며 달리기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 뛰며 힘내라고 응원을 했었지만 엄마가 함께 뛰지 않고, 엄마의 응원소리가 들리지 않는 운동회는 너무 슬펐어요.
구레나룻 선생님의 가슴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어요. 할머니는 남자가 울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울고 있는 내 등을 자꾸만 쓸어 주셨어요.
“그래. 실컷 울어라. 보고 싶을 때는 보고 싶다고 말해야지. 울고 싶을 때는 이렇게 울었어야지.”
가을이 오고 있나 봐요.
학교에 가는 길모퉁이에 있는 과일가게 진열장에는 어느새 파란 사과가 우리를 보고 배시시 웃고 있었어요. 해님이 더 뜨거워지면 빨간 사과도 저 진열장에 와서 예쁜 모습으로 턱을 괴고 학교에 가는 우리들을 보게 되겠지요.
나는 아침마다 30분 일찍 학교에 가야 했어요. 처음에는 구구단을 검사 맡기 위해서 일찍 갔어요. 아무도 오지 않은 교실인줄 알고 문을 세게 열면 소리가 깜짝 놀라면 소리쳤어요.
“아이, 깜짝이야!”
어느 때는 내 팔을 팡팡 때리기도 했어요. 소리와 나뿐인 교실에서 소리는 나에게 구구단을 외워 보라고 시켰어요. 내가 구구단을 외우다가 더듬거리면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함께 구구단을 외웠어요. 그러면 막 창문께로 온 햇빛이 살짝 웃으며 소리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어요. 자꾸만 틀리는 구구단 때문에 내 얼굴도 빨갛게 물들었어요.
내가 구구단을 우리 반에서 다섯 번째로 다 외운 것은 모두 소리 덕분이에요. 소리는 내가 구구단을 다 외웠을 때도 계속 일찍 오라고 했어요. 소리는 내가 숙제를 해 왔는지 살펴보았고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날은 자기 것을 나누어주었어요. 더러는 일기를 검사하기도 했어요. 나는 소리를 좋아했지만 소리가 일기를 검사하는 것은 정말 싫었어요. 일기에는 미술 선생님이랑 소리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소리가 일기를 검사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소리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소리가 물었어요.
“요새는 왜 내 이야기를 쓰지 않는 거니?”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소리가 다시 물었어요.
“내가 싫어졌니?”
“네가 내 일기를 보니까 쓸 수가 없잖아.”
소리는 한참을 생각하는 눈치였어요.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끝에 햇빛이 반짝였어요. 눈이 부셨어요. 분홍색 핀도 반짝였어요.
“내가 일기를 안보면 내 이야기를 다시 쓸거니?”
소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럼 이제부터는 일기 검사는 하지 않을 거야.”
소리는 약속을 잘 지켰어요. 그 후로는 일기를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소리와의 약속을 잘 지키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일기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까만 구레나룻의 미술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는 했으니까요.
나는 매일 미술 선생님 이야기를 썼어요. 미술 학원에서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그림을 그리다 온 날에도 선생님 이야기를 썼어요. 선생님도 보지 못했는데 무엇을 썼느냐고요? 선생님을 보지 못해 슬퍼진 내 마음을 썼어요.
선생님이 오시지 않는 날에는 대학생형이 와서 누나들과 형들을 가르쳤어요. 도대체 선생님은 왜 자주 오시지 않는 것일까요? 예쁜 여자 선생님이 멀리 시집간 것처럼 까만 구레나룻 선생님도 혹시 멀리 장가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루는 참지 못하고 희은이 누나에게 물었어요.
“선생님은 왜 안 오셔?”
“선생님은 저기 계시잖아.”
희은이 누나가 가리킨 곳에는 대학생 선생님이 누나와 형들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누나, 대학생 선생님 말고 이렇게 까만 수염이 많은 선생님 말이야.”
“아, 털보 선생님? 미안해서 어쩌나. 나도 잘 모르는 걸.”
털보 선생님이 가시는 곳을 알기 위해 나는 아주 많이 애써야만 했어요. 학원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니까요.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에게도 물어보고, 대학생 선생님에게도 물어 보았어요.
드디어 선생님이 어디에 가시는지 알았어요.
선생님은 화가이기도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을 더 좋아 한대요. 그래서 바람처럼 사진을 찍으러 다니신대요. 선생님을 바람이라고 말한 것은 대학생 선생님이었어요. 바람이 부는 방향은 바람 저만 안대요. 선생님이 가시는 곳도 선생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른대요.
나는 선생님을 기다렸어요. 선생님이 오시면 꼭 같이 가서 사진을 찍을 곳이 있거든요. 엄마와 함께 살던 라일락 나무가 있는 집말이에요. 지금은 가을이지만 선생님이 가서 사진을 찍으면 라일락 나무에 당장 꽃이 필 것만 같았어요.
언젠가 쌍둥이 누나 둘이서 할머니 몰래, 아빠도 몰래 엄마가 혼자 사시는 라일락 나무집에 갔었대요.
그런데 엄마는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았대요. 만약에, 선생님이 라일락 꽃나무를 사진 찍고, 그 사진에 라일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면, 라일락 꽃향기가 세상으로 흘러간다면, 그래서 우리 엄마도 그 꽃향기를 맡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와 누나는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은자동화작가 / 온양 예은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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