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자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 17
박은자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 17
  • cwmonitor
  • 승인 2009.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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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오시자마자 나는 선생님을 졸랐어요. 나와 엄마가 살던 라일락 집에 빨리 가자고요. 엄마는 어디에 계시든 그 꽃향기는 절대로 잊지 않았을 거라고요. 선생님이 사진을 찍기만 하면 그 사진에는 꽃이 필거라고요. 그러면 엄마가 그 꽃향기를 맡고 나를 찾아내실 거라고요. 엄마는 정말 어디에 계신 걸까요?

토요일이었어요.
학교 공부가 끝나고 교문을 막 나서고 있었어요. 누군가 큰 소리로 불렀어요.
“하늘아! 하늘아!”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은 털보 선생님이었어요. 선생님은 사진 장비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어요.

“사진을 찍으러 가는데 하늘이가 함께 갈 수 있을까?” 선생님이 교문에서 나를 기다려 준 것도 꿈같은데 선생님은 사진 찍으러 함께 가자고 했어요. 나는 할머니도 잊고, 누나도 잊고, 아빠도 잊어 버렸어요.
선생님을 따라 버스를 탔어요.

버스는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갔어요. 아니에요. 나는 어디든 가 본 곳이 없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나에게는 새롭고 처음 가는 길이었어요.
햇빛이 가득한 들판은 마치 그림 같았어요.

고추잠자리가 나는 것이 보이기도 했어요. 고추잠자리 떼의 비행은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차에서 내리고 싶었어요. 고추잠자리처럼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었어요. 그러면 나도 고추잠자리처럼 날 수 있을까요?

버스는 들판을 다 지나고 상가가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도 지났어요. 버스는 아주 좁은 길에 들어섰어요. 그러자 갑자기 초가집들이 나타났어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하늘아, 저기 보이는 마을이 민속 마을이란다. 너 가본 적 있니?”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정말 난 가본 곳이 없어요. 학교와 집과 학원 말고는. 아참, 학교에서 현충사로 소풍을 간 적이 있기는 해요. 현충사에 두 번, 남산에 한 번 소풍을 갔었으니까요.
“다음 토요일에 민속마을에 가자. 그곳은 하늘이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단다.”
“무엇인데요?”

“자연을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 같은 거야. 돌담도 있고. 연자방아도 있고. 시냇물이 집안 정원을 흘러가기도 하지. 우리 조상들은 돌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물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살았단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다르지. 말하자면 죽은 것이 없단다. 다 살아 있단다. 마당을 시멘트로 덮지 않았지. 사람들보다 수 백 년을 더 오래 살고 있는 나무들도 많이 있지. 햇볕이나 바람이 정겹게 머물다 가는 마을이야. 새들도 아주 많지. 사람들도 착하고. 그리고 봄에는 우리의 꽃들이 많이 핀단다. 하얀 냉이 꽃과 흰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고 매화랑 살구랑 복숭아꽃도 피고 돌배나무에서도 하얗게 꽃이 피지.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싸리 꽃도 긴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피어난단다.”
버스가 멈추었어요. 선생님처럼 털보인 기사 아저씨가 소리쳤어요.

“버스는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할아버지 두 분이 서둘러 내렸어요. 선생님과 나도 내렸어요.
“이제부터는 걷는 거다. 걸을 수 있지? 힘들면 얼른 말해야 한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고 돌이 많았어요. 하지만 바람이 내 몸을 끌어 주었고, 감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새떼를 보면서 무척 즐거웠어요.

두 번이나 넘어졌지만,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 주지 않고 혼자 일어나라고 했어요. 넘어져서 혼자 일어나는 일이 조금도 창피하거나 슬프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내 옆에는 구레나룻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선생님이 옆에 계시다는 사실은 굉장히 신나는 일이었으니까요.

골짜기에는 물이 많이 흘렀어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물이 흐르는 골짜기 옆으로는 이상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거여요. 이상한 집들의 방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며 놀기도 했어요. 춤추느라 틀어놓은 음악도 소리가 너무 컸어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새들은 다 숨어 버렸나 봐요. 나무가 우거진 골짜기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흐르는 물위에 만들어 놓은 평상에 앉아서 고기를 구어 먹거나 노래를 불렀어요. 정말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했어요. 털보 선생님은 서서 한동안 계곡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탄식하며 말했어요.

“지금은 그래도 가을이라 빈 평상들이 있구나. 여름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놀기 때문에 빈 평상을 찾아 볼 수가 없지.”
계곡에 내려갔지만 평상에 앉아서 고기를 구워 먹던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밥풀과 김치, 그리고 고기조각이 둥둥 떠 다녔어요.

손을 담글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은 그런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 위에 셔터를 눌렀어요.
그런데 아무도 앉지 않은 빈 평상이 보였어요. 그래서 징검다리를 간신히 건너 평상까지 가까스로 걸어갔어요. 신발을 벗어 들고 평상에 올라앉자 아주머니가 쫓아왔어요. 그리고는 소리를 지르는 거여요.

“앉지 마! 손님이 없어서 화가 나 죽겠는데 재수 없게 스리.......”
그런데 나는 얼른 내려올 수가 없었어요. 아주머니가 쫓아와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너무 놀라 정신이 나갔나 봐요. 우물쭈물하자 아줌마가 나를 밀어냈어요. 내 작은 몸은 그만 물에 풍덩 빠지면서 길게 미끄러졌어요.

모든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고, 그 한 순간은 선생님의 카메라에 담겼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나를 안고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어요.“이게 무슨 짓입니까? 자릿값이요? 얼마요? 도대체 얼마 때문에 애를 이렇게 밀어요?” 선생님은 사진을 찍다가 아주머니가 나에게 지르는 소리를 들었대요.

선생님은 쾌재를 불렀대요. 앉아서 쉬고 싶은 넓은 바위와 그늘이 진 커다란 나무 아래면 평상을 만들어 놓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횡포를 사진에 꼭 담고 싶었대요. 봄부터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이기심 가득한 사람들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나무와 물과 새들이 가여워서 가슴이 아팠대요.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소리쳤대요.
“계곡에 설치한 평상을 들어내요!”

“햇빛과 바람을 막는 천막도 걷어내요!”
“새들을 쫓는 시끄러운 음악은 꺼버려요!’

그러나 사람들은 못들은 척 했대요. 아니 장사를 망친다고 화를 냈대요. 선생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신음하고 있는 나무와 새들, 그리고 병들어 가고 있는 계곡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대요. 그래서 연속적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대요. 그런데 계곡에서 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가 그만 나를 밀쳐서 개울바닥에 구르게 만든 거지요.

박은자동화작가 / 온양 예은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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