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자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 18
박은자 장편동화 / 하늘이 이야기 - 18
  • cwmonitor
  • 승인 2009.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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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너무 화가 나 있었어요. 다 젖었지만 정말 다친 곳이 하나도 없는데 선생님은 아주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었나 봐요. 하지만 화가 난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턱에 난 까만 수염을 두 손으로 자꾸 갈라내며 소리를 질렀거든요.

아마 선생님은 화가 나면 그런 버릇이 저절로 생기나 봐요. 선생님이 아주 많이 화를 내셨기 때문에 나는 슬픈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누가 때려도 울지 않지만 나를 보고 재수 없다고 말하면 슬펐거든요. 내 다리가 한쪽 짧아서 절룩거리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병신이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재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럴 때 내 마음이 무지하게 슬펐어요. 재수 없다는 말은, 병신이라고 놀리는 것 보다 더 마음이 아파요.
선생님은 나를 업고 개울 밖으로 나갔어요. 선생님은 나를 내려놓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나를 업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서 말했어요.

“선생님이 나쁘지? 욕심쟁이지? 아주머니가 너에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 걸 사진에 담으려 하다니....... ”

선생님 등에서 그만 내리고 싶었어요. 내 옷이 젖어서 선생님의 옷도 다 젖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하지만 내리려고 몸을 꼬물거리자 선생님은 내 엉덩이를 두른 팔에 힘을 꼭 주셨어요.

한참을 올라가자 계곡에 늘어서 있던 이상한 집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그러자 날개를 벌리면 옆구리가 하얀 새들이 숲에서 퍼덕퍼덕 날랐어요. 잠자리가 떼 지어 비행하는 것도 보였어요. 길옆 긴 풀잎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작은 잠자리는 꽁지가 빨갛고 예뻤어요.

선생님은 나를 평평한 바위 위에 앉혔어요. 그리고는 젖은 옷을 벗기더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꾹 짜서 바위에 널어놓는 거여요. 나는 수건을 치마처럼 둘러서 고추를 가렸어요. 선생님께서는 잠바를 벗어서 입혀 주셨어요. 선생님의 옷을 입고 긴 소매를 흔드는 것이 탈춤을 추는 것처럼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은 냄비를 바위에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어요.

“덩 더 쿵! 덩 더 쿵!”
선생님의 장단에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나비들도 날라 와 너울너울 춤을 주었고, 보랏빛 구절초들도 바람에 한들한들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산모퉁이를 돌아가더니 물을 떠 왔어요. 그리고 아주 맛있는 라면을 끓였어요. 라면을 먹는데 옆에서 빙빙 돌던 고추잠자리가 선생님 머리에 앉았어요. 선생님 머리에 앉은 잠자리를 잡으려고 일어서려 하자 선생님이 말했어요.

“아서라. 잠자리는 네 어깨에도 앉아 있다. 잠자리 날아가지 않게 일어서지 마라. 라면도 조심조심 먹어라.”
정말 내 어깨에도 잠자리가 앉은 것일까요? 고개를 돌려 쳐다보려는데 선생님은 다시 말했어요.

“아서라. 쳐다보지 마라. 잠자리가 놀라서 날아갈라.”
선생님은, 선생님 머리에 잠자리가 앉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선생님은 국물도 남기지 말라고 하셨어요. 내가 국물을 남겨서 숲에 버리면 아주 예쁜 풀벌레가 슬퍼진다고요. 그래서 국물까지 다 마시자 그만 배가 불룩 나왔어요.

따가운 가을 햇볕에 옷은 금세 말랐어요. 선생님과 다시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두 갈래 길이 나왔어요. 하나는 기도원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산사로 가는 길이었어요. 선생님은 기도원에서 찍을 것이 더 많다고 하셨어요. 기도원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어요.

잡풀이 우거지고 감나무가지가 모두 하늘을 향해서 뻗어 있었어요. 감은 빨갛게 익어 탐스러웠지만 너무 높은 곳에만 열려서 딸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감을 먹자고 말했어요. 감나무 밑에 가자 정말 감이 많았어요. 대부분 깨져서 주홍빛 감물이 흐르고 이미 하얀 벌레가 가득히 먹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선생님과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았어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하늘아, 지금은 아무도 오지 않아 폐허가 된 기도원이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와서 기도를 하던 곳이란다.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감나무도 옆으로 늘어지지 않고 저렇게 하늘로만 가지가 올라간 모양이야.”

선생님이 해 주신 이야기가 너무 신기해서 물었어요.
“정말요?”
“선생님 말이 엉터리 같니?”

나는 고개를 저었어요.
“선생님, 사람들이 이 기도원에 와서 드린 기도가 다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진 기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기도도 있었겠지.”

“선생님,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는 얼마나 슬플까요?”
선생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하늘아, 네 기도가 얼른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니?”
“네. 슬플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어요.”

“하늘아, 기도는 이루어질 때까지 하는 거야. 중간에 쉬거나 얼른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화내면 안 되는 거야. 하늘이가 엄마를 잊지 않고 늘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꼭 엄마를 만나게 될 거야. 왜냐하면 기도는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거든. 저 감나무를 보렴. 아마 저 나무들은 겨울에 새들이 배고파할 때 양식이 되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저렇게 가지들이 위로 뻗었을 거야. 사람들은 비록 땅에 떨어진 것만 먹게 되었지만 높은 나뭇가지에 달린 저 감들이 새들에게는 아주 맛있는 양식이 되지 않겠니?”

그러고 보니 감나무에 떼 까치도 와서 앉아 있고, 비비 새들도 날아 왔다가는 다시 숲으로 날아가고는 했어요.
선생님은 감나무를 사진에 담았어요. 감나무의 큰 키를 담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서 풀숲에 몸을 숨기기도 했어요. 선생님이 사진에 담는 것은 아주 많았어요.

풀숲에 숨은 누런 호박과 털털털 소리를 내는 경운기를 끌고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농부, 고추잠자리 떼의 아름다운 춤, 그리고 잠자리를 좇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나, 선생님은 생명이 있는 아름다운 것들 위에 찰칵찰칵 소리를 심어 주었어요. 나는 모두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바람이 불 때 마다 몸을 흔드는 갈대꽃과 키 낮은 풀들이 속삭이는 소리, 굽은 등이 더 정겹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 아름다운 춤사위를 벌이는 잠자리 떼의 두런거림, 아무도 따가지 않는 늙은 호박의 애처로운 소원까지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볼 수 있었어요. 조금만 귀를 열어도 들을 수 있었어요.

산을 내려오는 길에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시고 노래를 불렀어요. ‘가을’노래와 ‘과수원길’과 ‘산’을 아주 낮은 소리로 불렀어요. 선생님의 노래는 새들의 노래와 함께 섞였어요. 선생님을 따라 나도 낮은 소리로 불렀어요.

박은자동화작가 / 온양 예은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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