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나는 세상에서 삶은 밤을 가장 좋아해요. 삶은 밤은 정말 맛있어요. 할머니가 넘어지셔서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의 일인데요. 쌍둥이 누나와 나는 큰아빠의 집에 한 달 동안 가 있어야 했어요. 아빠는 저녁마다 먹을 것을 아주 많이 사왔어요.
할머니와 집에 있을 때는 먹을 것을 한 번도 사 오시지 않더니 우리가 큰집으로 가자 아빠는 달라지셨어요. 다섯 가지도 넘는 과일이랑,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과자랑, 모양이 예쁜 초코렛도 사 오셨어요. 하루만 사 오신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그러나 큰 엄마는 한 번도 우리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주지 않았어요. 큰 엄마는 할머니와 똑같았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우리 엄마는 미워하고 큰 엄마만 좋아했나 봐요.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큰 엄마가 밤을 삶아 놓으셨는데 먹으라고 다섯 톨을 주셨어요. 속이 노오란 밤은 참 맛있어요.
금세 먹어 버리자 큰 엄마는 다섯 톨을 더 주셨어요. 다시 준 다섯 톨도 금세 먹자 이번에는 세 톨을 주셨어요. 세 톨도 금방 먹고, 또 주신 두 톨도 금방 먹자 큰 엄마는 저를 보고 밤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뱃속에 들어앉았느냐고 말했어요. 정말 그랬나 봐요. 양푼에 반쯤 남은 밤을 혼자 다 먹으라고 해도 다 먹을 것 같았어요. 큰 엄마가 말했어요. 원이 형은 먹으라고 양푼 째 주어도 세 톨 이상은 먹지 않는다고요.”
내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밤 자루를 지고 가던 아저씨를 불렀어요.
“어르신, 그 밤을 팔지 않으시겠어요?”
“팔 겁니다. 얼마나 사시게요?”
“다 사겠습니다.”
“이걸 다요? 이렇게 많을 것을 다 산다고요?” “물론입니다. 이 꼬마가 밤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아저씨는 밤을 팔게 되자 무척 좋아 하셨어요. 선생님은 밤을 버스 타는 곳까지만 갖다 달라고 말했어요. 아저씨는 집은 더 멀다며, 밤을 모두 팔게 된 것이 기쁘셨는지 자꾸 웃으셨어요. 웃으시는 아저씨의 얼굴은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착한 나무꾼 같았어요.
너무 많이 걸었나 봐요. 다리가 아프고 어지럽기도 했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넓은 등을 나에게 내밀었어요. 나는 싫다고 말하지 않고 선생님 등에 업혔어요. 선생님 등에 업혀서 가는데 커다란 잿빛 나비 하나가 자꾸만 따라 왔어요. 선생님이 말했어요.
“하늘아, 저 앞을 좀 보렴. 노을이 참 아름답지?” 붉은 빛이 길게 그려진 하늘은 아름다웠어요. “하늘아, 저 노을은 신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란다. 사람은 아무도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은 그릴 수 가 없지.”
그러나 나는 선생님은 그릴 수 있다고 속으로 가만히 말했어요.
“하늘아, 노을이 저렇게 붉게 타다가 차츰 잿빛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어떤 화가가 그릴 수 있겠니?”
선생님의 목소리가 노을처럼 아름답게 잠겨 들었어요.
“아, 한 사람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늘이 너라면 그릴 수 있을 거야. 너는 초록 물고기가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으니까.”
해가 지는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아마도 따듯한 선생님의 등에 업혀서 보는 하늘이라 더 아름다웠을 거여요.
노을 때문에 선생님도, 나도, 밤 자루를 지고 저 만큼 앞서 가는 아저씨도, 산 아래 피어오르는 연기와 풀숲에 낮게 엎드린 풀벌레도 덩달아 노을빛 아름다움으로 물들어 갔어요. 노을을 보느라 선생님의 목에 감았던 팔이 나도 모르게 스르르 풀렸어요. 선생님의 등은 너무나 넓고 편했으니까요. 눈을 감고 있어도 아름다운 노을은 내 가슴과 눈 속으로 모두 들어 와 내 몸은 차츰차츰 노을빛을 닮아가고 있었어요.
“하늘아, 나한테도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리는 누님이 한 분 있단다. 그 누님은 얼마 전 수녀원으로 가셨지. 누님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그렸단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를 그렸지. 예수님을 소리쳐 부르던 문둥병자도 그렸단다.
누님이 그린 많은 그림 중에 선생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림이 있단다. 무슨 그림인가 하면 너보다도 더 작은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예수님을 만나러 풀밭을 정성껏 걸어가는 거야. 그런데 아주 예쁜 벌레들과 새들과 꽃들이 소년의 뒤를 따르는 거야.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속의 작은 아이가 되고 싶어 눈물이 글썽해질 때가 있단다. 그런데 너는 그림속의 아이를 참 많이 닮았어.”
잠들어서 자꾸만 늘어지는 나를 업고 선생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느라 잿빛 나비는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왔지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은 된장찌개를 사 주셨어요. 선생님이 사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맛있어요. 밥 한 공기를 다 비우자 선생님은 씩씩하게 소리를 질렀어요.
“아줌마, 여기 밥 한 공기 더 주세요.”
아줌마가 밥 한 공기를 더 가져오자 선생님은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내 밥그릇에 담아 주셨어요.
“더 먹어. 넌 더 먹을 수 있어. 맛있지?”
“네. 정말 맛있어요.”
“너는 많이 먹어야 해. 많이 먹고 키도 커야 하고 살도 좀 쪄야 해.”
문득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으라고 달래시던 엄마의 얼굴이 선생님 얼굴에 겹쳐 보였어요. 그러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어요. 눈물이 또 나올까 봐 서둘러 밥 한 숟가락을 크게 퍼서 입에 넣었어요.
버스는 올 때처럼 다시 흔들거리며 선생님과 나를 싣고 산굽이와 신작로를 막 달렸어요. 멀리 사슴목장이 가까이 왔다가는 멀어져 가고 엄지 손톱만한 열매가 다닥다닥한 상수리나무도 가까이 왔다가는 금세 멀어져 갔어요. 내 얼굴에도 무언가 가깝게 와서는 자꾸 눈앞을 가물거리게 했어요. 선생님 등에 업혔을 때처럼 졸음이 쏟아졌어요.
버스가 노란 불들이 환하게 켜진 시내로 들어오자 선생님은 잠이 든 나를 흔들었어요. 버스에서 내리자 선생님은 학원에서 밤을 쪄 주시겠다고 말했어요.
“정말요? 정말 밤을 쪄 주실 거여요?”
나는 벌써 군침이 돌았어요. 그래서 무거운 밤자루를 내가 들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하하 웃으셨어요.
“그래라. 네가 들어라. 어디 우리 하늘이가 얼마나 힘이 센가 보자.”
나는 얼른 밤 자루를 들었어요. 그러나 밤 자루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낑낑대자 선생님은 또 큰소리로 웃으셨어요. 그리고는 밤 자루를 번쩍 들어서 어깨에 메었어요.
학원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라면을 끓이는 양푼에 밤을 가득히 쪘어요. 선생님이 큰 소리로 말했어요.
“자, 한 번 실컷 먹으렴.”
그러자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내가 원이 형을 닮아버린 거여요. 처음에 한 톨은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두 톨을 먹는데 더는 먹기가 싫은 거여요.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선생님이 삶아주는 밤은 왜 두 톨밖에 먹을 수 없었던 것일까요? 실컷 먹으라고 선생님이 양푼 가득히 삶아 주셨는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실컷 먹어도 되는데 말이에요.
집이 저만큼 보이자 선생님이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했어요. 토요일인데 너무 늦었기 때문에 집에 가면 할머니께 꾸중을 들을 것 같았어요. 집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서서 망설이자 선생님이 말했어요.
“아무 걱정 말고 가라. 오늘 선생님과 보낸 시간은 너의 아빠가 허락을 하신 일이다.”
선생님은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아실까요? 마치 내 마음속에 들어 와 있기라도 하신 것처럼. 아니면 내가 선생님 속에 들어 가 있어서 선생님은 나를 아주 잘 아시는 걸까요?
박은자동화작가(온양 예은교회 사모)
저작권자 © 크리스챤월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