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 사랑의 두 얼굴
에니어그램 / 사랑의 두 얼굴
  • cwmonitor
  • 승인 2009.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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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두 팔 벌린 모습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 모습은 사랑의 본질적 표현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준다. 첫째는 품어주는 모습이다. 예수는 그 팔로 어린아이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품어 주었다. 두 번째 모습은 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놓아 주는 사랑이다. 이것이 순수함과 지혜를 갖춘 사랑의 두 얼굴이다.

두 팔을 벌린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들어서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긴 방법은 무방비요, 무력함이었다. 온갖 비난과 욕을 감수하고 매를 맞고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하는 예수의 모습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사랑의 속성은 그 사랑이 클수록 비극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자비(慈悲)라는 한자어가 잘 보여 주고 있다. 지상에서 우리는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조건 없는 사랑에 들어설수록 내가 나에게 주는 고통과 상대가 나에게 주는 고통이 심각해 질 수 있다. 내 마음을 다 주었고 생각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있을 때, 오히려 그 상대가 나를 공격적으로 대 한다면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 놀라운 것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과 자신을 못 박고 증오하는 원수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바로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의 모든 미움과 폭력으로부터 승리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가 23:34)
이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 무지하고 상대에게 무지한 맹목적인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두려움과 집착에 의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싸울 줄만 알 뿐 용서와 관용과 이해의 사랑을 알 까닭이 없다. 에니어그램이 다루고 있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못 박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온 경우는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무지몽매한 악행에 대하여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마저 큰 사랑의 품으로 안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원수들이 나를 위협하고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은 나의 삶을 결정할 수는 없다. 나라고 하는 존재와 삶의 결정권을 그 어떤 폭력과 강요에도 포기하지 않는 힘과 권리를 우리는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폭력에 무릎 꿇지 않고, 미움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을 선택했다면 그 순간의 내 선택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선택은 죽음조차도 빼앗아 갈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폭력과 미움보다도 강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내용은 이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이 믿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
예수의 다 이룬 사랑. 바울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우 어렵고 힘든 여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성숙과 믿음만큼 비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는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 17) 이 물음을 내가 받는다면 무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차마 민망해서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자신 있게 맹세할 수 없었다. 그는 예전의 큰소리치던 베드로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요한 21:17)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의 모든 것이란 베드로의 배반, 변덕, 두려움, 이기심, 이해타산 등의 어둠을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속에는 베드로의 순박함, 용기, 결단, 순수한 사랑도 있다.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에는 이 양면성이 있다. 창조의 원리 역시 빛은 어둠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둠을 인정하지 않고 피하려 할 때 인간은 빛을 만날 길이 없다. 하나님은 보화를 나의 어둠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러므로 내가 피하고 싶고 비참해 하고 슬퍼하는 곳에 우리는 눈을 돌려 자세히 바라보아야 한다. 이 두 날개의 지혜를 얻어야 삶은 비상할 수 있다.

베드로는 슬프고 민망하지만 자신의 서투른 사랑과 어둠을 예수의 넉넉한 팔 안에 내 놓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민망한 어둠 속에서 사랑의 빛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는 은혜로움으로 역사의 중심축에 세우셨다.
www.moam.co.kr


이병창 목사

시인·진달래교회
moam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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