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 최악의 한파가 엄습한 13일 오후 11시께 서울 중구 서울역 지하통로.
퇴계로 남대문 시장 방면 지하도에는 노숙인 20여 명이 두꺼운 종이 상자를 세워 바람을 피해 잠을 자고 있었다. 침낭 속에 몸을 파묻은 이들은 1~2m 간격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
검정색, 남생 점퍼를 껴입은 채 냉기가 흐르는 지하도에서 추위를 피하려 장갑과 털모자, 귀마개 등을 착용하고 있었다. 미리 만들어 놓은 종이 상자 안으로 몸을 넣으려 애쓰는 노숙인의 모습도 보였다.
8년 동안 노숙생활을 해왔다는 이모씨(62)는 주로 서울역 인근을 오가며 추울 때는 서울역 3층 대기실에서 지낸다고 했다.
이씨는 "올해는 계속 추워서 지내기 힘들다"며 "그나마 가끔 서울역 주변 교회 등에서 옷가지를 가져다 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간대 지하철 4호선 회현역 지하통로 안에서도 이같은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5번 출구 남대문파출소 방면 지하도에는 5명의 노숙인이 침낭과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다. 종이 상자는 물론 우산까지 이용해 차가운 바람을 피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얼음장 같은 바닥을 피하기 위해 고무판을 깔고 새우잠을 자는 노숙인도 있었다.
예전에는 지하철 역 지하도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하도 내에서 노숙을 단속하는 등의 이유로 최근 노숙인이 서울역 대기실로 모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 노숙인은 전했다.
서울역 3층 대기실에는 60여 명의 노숙인이 대형 TV를 보면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졸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같은 층 패스트푸드점 안에서 몸을 녹이는 노숙인도 종종 눈에 띄었다.
복장도 각양각색이었다. 허름한 점퍼와 해진 운동화는 기본, 군용모자에 군용 야전상의를 입은 노숙인의 모습도 보였다. 또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모습도 쉽게 목격됐다.
2층에도 4~50여 명은 족히 넘을 노숙인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이들은 곳곳에 배치된 의자에는 물론 승차권 매표소와 은행 현금지급기, 화장실 앞에까지 자리를 깔고 누워 있었다.
15년간 노숙생활을 해왔다는 정모씨(58)는 1998년 식당 운영 중 화재로 큰 손실을 입어 노숙을 시작하게 됐단다. 노숙 초기에는 인력시장에서 일당 5만원씩을 받고 일을 했지만 당뇨가 심해 그만뒀다고 정씨는 말했다.
정씨는 "요즘 너무 추워 바지 2벌과 외투 3벌을 항상 껴입고 다닌다"며 "지하도에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서울역이 따뜻해서 최근에 여기로 왔다"고 말했다.
갈 곳이 없는 오전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잠을 자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어제 한 동생이 국수를 사준다고 해서 나갔는데 날이 추워 주변 포장마차가 문을 닫았다"면서 "컵라면과 소주를 사먹고 천안가는 지하철을 타고 잠들었더니 오후 3시였다"고 정씨는 말했다.
한 자원봉사단체 관계자는 "올 겨울 즉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비해 노숙인이 20% 늘었다. 특히 40대 남성의 수가 부쩍 늘었다"고 밝혔다.
올 겨울 한파가 지속되면서 노숙인들의 건강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노숙인 정씨는 "봉사단체에서 하루 두 끼를 노숙인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에 식사 문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원체 기운이 없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를 감당하지 못해 죽는 일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뇨병을 앓고 있어서 약을 먹고 있다"며 "약을 챙겨 먹지 않으면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치료하려면 한 달은 걸리는 데 그러고 싶진 않다"고 씁쓸해 했다.
한 봉사단체 관계자는 "최근 들어 지병을 앓던 사람들이 날씨가 추워지면서 합병증으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술을 많이 먹고 죽는 일도 잦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는 건강 악화보다 사람들의 외면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2000년대 들어 사람들이 무심해졌어요. 그 전까진 노숙인들에게 말 거는 사람도 많았고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는데 지금은 그냥 '없는 사물'처럼 대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각박해진 거죠 뭐…."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