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이판사판
  • 최재봉목사
  • 승인 2010.01.18 14: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최재봉 목사<전 한국교회인권센터사무국장>
끝장을 본다는 말로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붙어서 된 말이다. 그리고 이 이판과 사판은 불교 용어로서 조선시대에 생성된 말이다.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에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정권의 교체와 함께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승려는 최하 계층의 신분으로 전락이 되었으며, 심지어 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승려들은 사찰(寺刹)을 존속시키는 것과 불법(佛法)의 맥(脈)을 잇는 사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는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雜役)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하였다.

이들을 사판(事判)이라 부르게 되며, 이와는 달리 은둔(隱遁)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이 있었다. 이를 이판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이판사판의 뜻이 전이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되어 ‘이판사판’ 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이판승과 사판승이 분열하여 싸움을 하였고 이러한 싸움을 ‘이판사판’싸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왜곡된 잘못된 것이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현대 불교가 융성한 것도 이 두 부류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였음은 이웃종교인으로도 분명하게 인정하는 바이다.

조선건국이후 불교의 승려가 된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불심의 선택이었지만 민중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인생의 마지막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인 막판인 ‘이판사판’승이 되는 것이라며 부정적인 의미로 아직까지 흘러나온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조선의 건국에 신흥 유학자 사대부 세력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려 말 일부 이것은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이 355일 만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용산참사에 대한 여러 가지 매듭이 채 끝을 맺지 못하고 장례만을 합의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장례만이라도 치르게 된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 남은 여러 매듭이 잘 풀려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지난 1월 7일(목)에 있었던 순천향 병원 영안실에서 있었던 기독교장례위로예배에서 그 설교를 오정현목사(사랑의교회)가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장례위로예배의 설교에서 오정현 목사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함께 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섰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봉사단 단장이기도 하지만 부친이 부산에서 철거민, 난민,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40여년 동안 목회를 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그들의 아픔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세우신 것 같다. 애환과 아픔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을 보았다. 중산층 지향이 아니라 복음 지향적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요지의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사랑의 교회의 재건축문제가 불거진 마당에 방인성 목사(함께여는교회)는 ‘오정현 목사가 이 자리에 왜 나오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질문하면서 어린 시절 철거민과 빈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자리를 빌어 2100억을 들이는 사랑의 교회 건축을 포기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며 이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주기 바란다. 한국교회가 살아야 한다. 개발의 논리를 버리고 걷힌 헌금을 철거민과 빈민에게 나눠주고 건축을 포기하라’고 오정현 목사에게 직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현재의 문제를 이판과 사판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왜곡된 잘못된 시각이다. 소위 일부 대형교회 이판과 그에 비판적인 그룹 사판과의 대결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실천 없는 ‘이판사판’기독교가 될까 그것이 걱정이다.

최근 인터넷과 여러 매체에서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고 있다. 기독교의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소.영’ 정권이라며 비난받고 있던 상황이 아닌가? 혹시 고려 말 불교의 폐해를 지금 기독교 내부에서 지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 말씀의 응답과 실천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예수라면 누구와 함께 하였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다. 아니면 ‘이판사판’기독교가 될지 모르는 걱정이 앞선다. 

‘개발의 논리를 버리고 걷힌 헌금을 철거민과 빈민에게 나눠주고 건축을 포기하라’라고 철거민과 빈민들에게는 복음을 선포한 방인성 목사의 말씀과 그리고 ‘애환과 아픔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을 보았다.’라는 오정현 목사의 말씀도 하나님의 응답이라 하였으니 강남에서 2100억의 건축을 앞둔 사랑의교회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그것이 당장의 실천과제가 아닐까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 신관 201-2호
  • 대표전화 : 02-3673-0123
  • 팩스 : 02-3673-01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종권
  • 명칭 : 크리스챤월드리뷰
  • 제호 : 크리스챤월드리뷰
  • 등록번호 : 서울 아 04832
  • 등록일 : 2017-11-11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임종권
  • 편집인 : 임종권
  • 크리스챤월드리뷰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크리스챤월드리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