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운동만 하면 행복할까?
미치도록 운동만 하면 행복할까?
  • 노창현 뉴욕 특파원
  • 승인 2010.01.2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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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농구기자를 하던 90년대 중반, 학부모 A씨와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A씨는 당시 유명한 대학스타의 아버지로 대표팀에서 가해지는 아들에 대한 차별을 하소연하던 끝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세요? 키는 장대처럼 큰데 배운 게 없어요. 국졸이거든요.”

멀쩡하게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국졸로 내리깎으며 한탄하는 A씨의 마음을 저는 이해했습니다. 우리나라 학원스포츠의 현실을 말해준 것이니까요. 한국의 운동선수는 중학교부터 사실상 공부를 포기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오전수업만 대충 하고 대회기간 중에는 아예 수업을 전폐합니다.

역시 농구하는 아들을 둔 B씨는 아들이 중학교 2학년때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아들이 농구를 계속 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B 씨에게 담임선생은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꼭 농구시켜야 하나요?”하고 농구팀 코치는 “대체 언제까지 공부 시킬 겁니까? 다른 애들처럼 농구에 전념해야죠”하고 을러댔습니다.

결국 B 씨는 미국 이민을 택했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농구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아들이 전학한 시기는 농구시즌이 한창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매일 여덟시간을 훈련하며 농구선수로 단련된 아들의 실력은 또래 미국 아이들보다 몇수 위였습니다. 당장 팀에 합류하면 승리는 맡아놓은 것이었죠.

그러나 미국학교 코치는 ‘팀 합류후 열한번의 연습을 한 후에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는 리그규정을 고집스럽게 지켰습니다.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선수들의 출전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1쿼터와 3쿼터는 주전선수들, 2쿼터와 4쿼터는 후보선수들을 내보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대 팀도 마찬가지여서 공정한 대결이 가능했고 주전들만 신나게 뛰고 후보들은 부럽게 코트를 바라보는 풍경은 먼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경기 또한 수업이 끝난 후에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열리기 때문에 수업을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나마 농구시즌이 끝나면 팀 자체가 없어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별로 계절 스포츠가 있어서 미국 아이들은 일년에 서너개 스포츠를 예사로 합니다.

스포츠의 편식은 아이들의 신체발달에 해가 될 수 있어 여러 스포츠를 고르게 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교부터는 주전팀(Varsity) 2진팀(Junior Varsity)으로 나눠지고 실력대로 경기에 투입되지만 계절별로 팀이 운용되는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공부할 것 다하면서 계절마다 다른 스포츠를 마음껏 하는 미국에 비해 선택된 소수의 선수들이 공부를 도외시하고 일년 365일 한 가지 운동만 죽어라 시키는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가 유소년기에 미국을 압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성년이 되면 상황은 돌변합니다. 미국 선수들이 엄청나게 넓은 선수층을 기반으로 대학시절부터 전문 분야에 집중해 기량이 일취월장하는 반면, 한국 선수들은 너무 일찍 과도한 훈련으로 부상에 시달리거나 조로현상을 보이기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미국 대학의 운동여건이 한국만큼 좋은 것도 아닙니다. 시즌이 끝나면 팀은 해체되고 차기 시즌이 돌아올 때까지 개인훈련만 가능할 뿐 코치가 팀을 지도하는 것은 NCAA 규정에 위배됩니다. 만일 이런 규정이 없다면 승부를 위해 과도한 훈련을 하게 될 테고 부상위협과 함께 학생의 본분인 공부가 소홀해질 것입니다.

한국농구의 기대주로 평가되는 최진수가 미국대학 생활을 중단하고 KBL(한국프로농구) 진출을 타진했지만 신청마감이 끝났다는 이유로 좌절됐습니다. 대체로 여론은 최진수의 구제를 외면한 KBL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칙을 지켰다는 점에서 KBL을 나무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팀간의 이해가 얽혀 있고 과거에 규정을 무시한 사례가 있다고 하지만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매릴랜드대에서 활약하다가 학과목 낙제로 팀훈련을 할 수 없게 된 최진수에 대해 사람들은 여름방학 때 국가대표 차출로 공부할 기회를 잃었으니 배려해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스스로의 선택이 빚은 결과가 아닌가요. 미국 대학의 엄격함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고민한 후 대표팀 소집에 응했어야 합니다.

2학년이 됐지만 주전경쟁이 더 어려워진 것도 유턴의 사유가 된 듯 합니다. 정작 안타까웠던 것은 최진수가 KBL에 제출한 탄원서의 내용입니다. "운동보다 더 힘든 것은 공부였다……미치도록 농구를 하고 싶다……공부에 신경쓰지 않고 농구만 하고 싶다."

운동만 하면 되는 나라에서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야 하는 나라로 건너와 눈물겨운 고생을 한 최진수에게는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공부를 도외시하는 빗나간 학원스포츠의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가슴이 답답합니다.

학원스포츠의 개선 노력은 종목별, 연맹별로 시행할 게 아니라 교육부 차원의 전면적인 도입이 돼야 합니다. 엘리트 스포츠가 붕괴하면 어떡하냐구요? 운동기계만 양산하고 특정소수의 전유물에 불과한 엘리트 스포츠라면 차라리 붕괴하는 것이 낫습니다.

운동선수의 학습권과 모든 학생들의 운동참여를 보장하는 선진국 형이야말로 더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토대를 마련하고 한국 스포츠의 바람직스러운 미래를 약속할 것입니다.

노창현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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