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떠돌이들, 생방송 뉴스캐스터요 스파이였다
중세 떠돌이들, 생방송 뉴스캐스터요 스파이였다
  • 양태자 비교종교학 박사
  • 승인 2010.07.2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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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랑인 부랑자, 중세유럽
언젠가 한번 독일 에센에서 ‘국제 경찰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 때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전시 중 하나가 ‘독일 도둑들의 언어’에 관한 것이었다 한다. ‘가우너’는 독일어로 도둑이란 뜻이지만 한국 사전적인 뜻으로는 도둑뿐만 아니라 사기단, 악당의 뜻도 있다. 독일어의 맥락에서 보면 12~13세기부터 일정한 주거지역 없이 여러 갈래 출신들이 유랑하며 자기들만의 은어를 쓰면서 사는 자들의 총칭으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단어의 정의가 아니라 이런 은어를 쓰면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다.

길에서 사는 유랑인들은 정착민들에게 적용되는 법과 질서에서 대개는 벗어난 삶을 살았다. 그들 나름대로 똘똘 뭉쳐 살아갈 대책을 찾다 보니 상징적인 은어를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 그들끼리의 결속력을 더 다졌다. 그러니 이들의 은어 속엔 세기를 이어오는 유랑인의 자취와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연구에 일생을 바친 볼프는 유랑인들의 이런 삶의 방편을 일종의 ‘창조’라고 정의한다. 왜냐면 몇 백 년을 내려 오면서 이런 은어들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다듬고 또 추가발전시키면서 대물림까지 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만난 이들도 동일한 부류가 아니고 천차만별의 출신들끼리다 보니, 처음엔 같은 동료끼리라도 서로 다른 은어를 사용하다가 갈수록 통일된 은어로 거듭 발전을 했다고 볼프는 언급한다.

이들이 동료유랑민들을 위해 은어를 새길 때는 석탄이나 분필 또는 빨간 초크를 사용했고 석탄이나 분필이 없으면 버들개지를 엮거나 꼬아서 암호로 사용했다 한다. 대개 교회와 수도원의 담벼락이나 경당 부근이 그들이 자주 고발, 고소, 밀고 당하는 장소였기에 거기에 표징을 많이 남겼다는데 이때는 돌담 벽에 뾰족한 것으로 새겼다 한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도 삶의 기본요소인 매일 먹을 곳과 하룻밤 숙소를 찾는 것이다. 막 어떤 마을에 도착한 이들은 지나갔던 동료들이 문 주위에 표시해 둔 상징적인 정보를 통해서 어느 집에서 가장 배부르게 얻어 먹을 수 있는지, 어떤 집 주인이 경건하고 자선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떤 역이나 선술집에 들어 가서는 안 되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더러 재미있는 표징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이 집엔 단지 여자들만이 산다’ 아니면 ‘이 집 주인은 많이 난폭함’ 등의 은어도 있다.

단순한 정보교환에서 출발했던 이 은어들이 나중엔 공동 정당방위와 자구책 등을 함께 강구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면서 이들은 소위 그들 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때론 유랑인들끼리 비밀망을 조직하여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그들만의 목적을 가진 단체 도둑협회·강도단체를 만들어 살았지만 늘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 살았다.

‘로빈 후드’ 같은 경우는 관계당국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폭동을 일으키는 어느 정도 낭만이 가미된 소설이지만, 사료가 전하는 강도·도둑단체는 그 현실이 많이 다르기에 자주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붙잡히면 그들은 대개 감방에서나 교수대에서 최후의 삶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이들이 가장 오픈하게 모이는 곳은 주로 시장터라고 뤽은 밝힌다. 이때 시장에서 주어지는 허드렛일을 해주고 얻어먹거나, 여기서 알게 된 마을 주민을 통해서 지저분한 헛간일지라도 하루 잠자리를 얻기도 하는데, 특히 날씨가 안 좋은 날 헛간에 머물 수 있는 날은 그들만의 천국이 된다. 때로는 한 마을 이장이 이들을 영접하거나 특별히 머물 수 있는 허가를 내릴 때는 그곳에서 겨울을 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하고, 그런 땐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상품도 더러 팔 수 있었단다.

15~16세기엔 유랑인들이 너무 넘치자 일반인들로부터 원성을 샀다고 하지만, 어쨌든 거의 다 외지고 격리된 마을에 살았던 주민들에게는 유랑인들이 세상 정보통 구실을 했다. 어느 마을에 들어서서 경계심 없이 인간적으로 소통되고 난 후 이들은 돌아다니며 듣고 보고 한 세상체험을 고스란히 마을주민들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500년 전! 라디오나 TV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유랑하던 이가 찾아와 빙빙 세상 돌아가는 얘기 보따리를 줄줄 풀어 놓았을 때 마을 주민들의 기쁨은 어떠했겠는가? 주민들에겐 유일한 세상 생방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어쩜 그 당시엔 ‘걸어 다니는 라디오’ 역할을 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럼 500년 전의 먼 유럽으로 쫓아 가기에 너무 힘이 든다면 1900년도 정도의 우리 시골 마을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당시는 대개 전기 없는 호롱불 아래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시대다. 어느 날 한 보따리 장수가 우연히 이 마을에 들어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보고 듣고 한 생생한 세상 얘기를 호롱불 아래서 마을 주민들에게 구수하게 풀어 놓을 때 그들에겐 그 자체가 어쩜 ‘화면 없는 TV’였을 수도 있겠다.

오늘부터 한 살인 아기를 포함하여 100년 후면 우리 모두 이 지구를 다 떠나게 된다. 그렇담 다시 앞으로 500년 후는 어떤 유형의 사회가 미래인들에게 주어질까? 아침에 아침 먹으러 뉴욕에 갔다가 점심때 다시 서울에서 볼일 보고 저녁에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일 처리하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대구에서 서울 가는 버스나 기차를 기다리듯이 우주 정거장에서 비행기를 기다릴지도! 그땐 이미 해외 여행은 시시한 일상사가 되어 버리고 달나라, 별나라 여행을 하면서 외계인을 사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지난 500년 전의 유랑인의 세상을 따라가 보니 절로 상상의 미래가 비례해서 그려진다. 세상이 하루하루 다르게 너무 ‘발전’ 하기에 말이다. 어제 만든 핸드폰이 내일은 헌 것에 속해 버리는 세상이 아닌가!

자,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 그럼 어떻게 이들의 은어를 발견할 수 있었던가? 1540년께 자주 일어났던 살인과 방화! 그러나 범인을 잡을 수 없었다 한다. 그때 사전에 들통난 살인 방화 때문에 붙잡힌 한 유랑인이 법정에서 이들 은어의 정체에 대해 자백했는데, 그들의 사전 모의 계획은 특정한 시간에 한 집을 습격 후 약탈하고 그 집을 불 지르기로 했던 것! 자주 있던 살인방화범을 쉽게 잡을 수 없었던 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만의 은어로 비밀정보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때 드러난 유랑인 들의 은어가 자그마치 340개 이상이었다는 것! 몇 백 년이 흐른 후 1930년대 독일 경찰이 이런 은어에 대한 특별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을 때 발탁된 이가 바로 위에 언급했던 학자 볼프다. 그 이후도 그는 베를린에서 이들의 은어에 대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거의 완성 단계에 라이프치히 출판사에 넘겨 주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물이 인쇄도 되기 전에 폭탄을 맞아 사라졌다 한다. 전쟁이 끝나자 이 학자는 다시 중세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기이하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유랑인의 기본 은어 6437개를 재수집 하고 연구하고 해석을 하였다 한다. 자그마치 11년이라는 세월을 다시 투자하여!

1차 대전 후 범죄가 증가했을 때 감옥 안에서 죄수끼리 서로 간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은어를 썼기에 그 당시 경찰과 법원은 이 문제 땜에 골머리를 앓았다 한다. 그렇지만 중세기 이래로 확산된 이 유랑인의 은어표징은 1·2차 대전 때도 전시에서 요긴한 방법으로 사용되면서 일종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한다. 이런 현상은 후세인들이 중세기 때부터 알게 모르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랑인들의 문화를 답습한 것은 아니었을까?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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